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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네시보로 그가 (딤후 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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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시보로 그가 (딤후 1:15-18)
  
유대인들은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하여 대하도록 가르친다고 합니다. 
  
첫째는 ‘병(病)과 같은 사람’입니다. 병이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고 심하면 죽게도 하는 것처럼, 병과 같은 사람은 가급적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멀리하고 피해야 할 사람입니다. 둘째는 ‘약(藥)과 같은 사람’입니다. 약은 평소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병이 들면 필요합니다. 

이처럼 평소에는 멀리하다가 가끔씩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는 ‘밥과 같은 사람’입니다. 밥은 늘 챙겨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을 얻고 건강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밥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힘을 얻고 도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는 어떤 사람이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주위에 밥과 같이 늘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 늘 가까이 하며 지내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기독교 베스트셀러 작가인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 목사님은 그의 책 『영적인 열정을 회복하라』에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기쁨을 주는 사람입니다. 같이 있으면 힘이 됩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떠나는 것이 기쁨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과 행동에 가시가 있어 같이 있으면 자꾸만 찔립니다. 그래서 그 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해서 이리저리 피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같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가 없어짐으로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다른 사람이 피하고 싶은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겔로와 허모게네입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고 사도 바울과 어떤 관계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오늘 본문에만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근거로 그들을 이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생애 맨 마지막에 기록한 책입니다. 특히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1-2년 전에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듯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됩니다. 로마에서 사도 바울은 두 번이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면서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교회에서 사도 바울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면서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복음을 위해서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소아시아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로마에 와서 자신을 변론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소아시아 교회 지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사도 바울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면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아주 섭섭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물론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도 바울은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무도 사도 바울을 도와주지 않자, 섭섭한 마음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소아시아 교회들이 사도 바울의 도움을 외면할 때, 그 중심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사도 바울을 적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소아시아 교회 교인들 중에 ‘그래도 사도 바울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할 때 그들이 앞장서서 사도 바울을 돕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없었다면 그들은 예수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고 복음을 통해 구원받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이 힘들고 외로울 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로 할 때 그들은 사도 바울을 외면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그 두 사람이 앞장서서 사도 바울을 대적했으니 사도 바울이 그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사도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보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오네시보로에게 복을 비는 기도가 두 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교회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굉장히 아팠는데, 오네시보로를 생각하니까 가슴이 뭉클해지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쓰던 도중에 너무너무 고마운 오네시보로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사도 바울이 오네시보로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기도한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16-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오네시보로는 사도 바울을 자주 격려해 주었습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많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보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찾아가서 바울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격려해 주었다’는 말은 용기를 주었다는 뜻과 함께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마음을 싱싱하게 해 주었다,’ ‘새 공기를 마시게 해 주었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기분을 아주 상쾌하게 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 하더라도 바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성품을 갖고 있는 인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자 마음에 섭섭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도라 하더라도 그 마음에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노년에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바울은 몸이 약했기 때문에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외로웠습니다. 사람이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9절에 보면 디모데에게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젊었을 때에는 정신없이 일하느라 사람이 그립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삽니다. 그리고 실제로 젊었을 때에는 주변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이 점점 멀어지고 없어집니다. 시간은 많지만 사람이 없어지니까 사람이 그리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무척이나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 에베소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있는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자신에게 와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오네시보로는 자원해서 사도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17절의 말씀에 의하면 부지런히 사도 바울을 찾아와 만났습니다. 오네시보로가 사도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다’는 말은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찾아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로마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로마 구석구석을 샅샅이 찾아 헤매다가 결국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로마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육로로 오는 길은 아주 먼 길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서 로마에 가야 합니다. 오네시보로는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로마에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 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헤매며 사도 바울을 찾아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지 찾아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수인 사도 바울을 누군가 쉽게 알려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네시보로는 포기하지 않고 묻고 물어서 사도 바울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마음에 기쁨을 주었습니다. 오네시보로가 찾아와 준 것 자체로 사도 바울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인은 기쁨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눈다는 것은 내가 뭔가를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소유한 자만이 나눌 수 있습니다. ‘소유한다’고 하면 우리는 대부분 재산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 가운데 일부를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재산만이 아닙니다. 재산을 나누는 것이 어쩌면 가장 쉬운 나눔입니다. 물론 그것도 쉽진 않지만,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쉬운 나눔은 그 재산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재산을 나누는 것만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찾아가 그와 함께 있어준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에 용기를 주고 격려를 주는 나눔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과 같이 연세가 많은 사람이나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는 찾아가 한 번 더 만나주는 것은 큰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양과 염소를 나눌 때에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물론 이 말씀은 주님께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자에게 한 것을 말합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은 몇 십억씩 기부했기 때문에 칭찬받은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의 재산 전부를 다 팔아 내놓았기 때문에 칭찬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 한 끼 대접했을 뿐입니다. 물 한 잔 주었을 뿐입니다. 또 병들었거나 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가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칭찬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내가 많이 있어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나눔은 내게 있는 작은 것입니다. 밥 한 끼, 물 한 잔, 그리고 찾아가주는 것, 그것이면 족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네시보로 그도 역시 많은 것을 사도 바울에게 갖다준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위해서 많은 돈을 가져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배부르게 먹게 해 주었다고 말씀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찾아와주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네시보로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네시보로처럼 사도 바울을 만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로마에까지 먼 길을 가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를 필요로 하는 내 이웃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빈손이어도 괜찮습니다. 외로워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주는 그것만으로도 그는 큰 위로를 받고 마음에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것, 이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낙심되어 용기를 잃고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내 말 한마디로 용기를 얻게 된다면 이 얼마나 보람된 일입니까? 외로움 때문에 마음이 답답한 사람을 찾아가 그의 마음을 시원케 해 준다면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역시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습니까?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는 사람이었습니까? 내가 있음으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내가 거기 있음으로 불편하고 껄끄러운 사람이었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대접받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들을 높여주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기피하고 멀리했던 세리들, 나병환자들, 천민들, 여인들, 가난한 사람들, 예수님은 그들에게 웃음으로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을 반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주님을 닮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닮아 대접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겨주고 높여준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기쁨을 나눠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먼저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내가 용서받으려 하지 않고 내가 먼저 용서해 주고,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고 누군가를 격려해 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여러분, 오늘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이 말씀이 결코 틀리지 않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교만이 가득하고, 마음속에 원통과 사나움을 가득 안은 폭력성이 지배하고, 신앙의 가치보다는 쾌락을 더 좋아하고 추구하는 못된 심성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기희생을 통해서 사도 바울을 위로하고 사도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해 주었던 오네시보로와 같은 사람이 정말로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그 오네시보로가 누구여야 하겠습니까?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교인들 중에는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은인이기는 하지만, 그가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랬기에 바울이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에 바울의 도움을 외면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갇혀 있는 로마에까지 먼 길을 가게 되었고, 어디에 갇혀 있는지 모르면서도 바울을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찾아다녔습니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다. 어느 한 감옥에 가서 ‘여기 유대에서 온 바울이라는 사람이 갇혀 있소?’ 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간수들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겠습니까?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 이름을 어떻게 다 안단 말이오. 귀찮게 하지 말고 썩 꺼지시오.’ 그러면서 면박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기를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감옥에만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알만한 사람이라면 일일이 다 찾아다니며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아시오?’ 그렇게 물어물어 다니는 것이 한 두 집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끌려간 사람이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지 평범한 사람들이 어디 쉽게 알 수 있겠습니까? 힘이 있고 권력 깨나 있는 사람이라면 권력을 이용해서 알아봐 준다고 하지만, 오네시보로는 그런 권력의 힘도 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발품을 팔아 감옥을 수소문하며 사도 바울을 찾아야 했습니다.
  
바울을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했다면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이 비록 죄수이긴 하지만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다. 특별히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부끄러워하지 마십시다. 내가 사람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언젠가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신앙인임을 부끄러워하거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마가복음 8:38) 
  
나에게 복음을 알게 해 준 사람을 부끄러워하거나, 나에게 신앙을 가르쳐준 사람을 부끄러워하는 것, 또 나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부끄러워하거나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을 부끄러워한다면 나중에 주님께서도 우리를 부끄럽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오네시보로는 멀리 있는 사도 바울에게만 그렇게 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8절 말씀에 의하면 그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도 많은 봉사를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오네시보로가 신앙생활하던 교회입니다. 오네시보로는 자신이 섬기던 교회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생각하면 오네시보로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비록 자신이 감옥에 갇혀 외롭고 쓸쓸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보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이 게으름만 피울 뿐 자신의 일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사도 바울의 마음이 결코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돕겠다고 나선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보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오네시보로)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기 일에 게으른 사람은 다른 일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아무리 큰일을 하더라도 그는 칭찬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큰 업적을 보고 감탄하고 칭찬할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주어진 직분, 작은 봉사의 일에도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한 지체 높은 공작이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열심히 상자를 만들고 있는 한 노동자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공작은 노동자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만들고 있는 그 상자를 어디에다 쓸 생각이오?” 그러자 그 젊은 노동자는 열심히 상자를 만들면서 대답했습니다. “저는 여기에다 꽃씨를 뿌릴 생각입니다.” 

공작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흙을 담아야 하겠군요. 기왕에 흙으로 채울 상자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깎고 다듬고 하는 것이오? 대충 해도 되지 않소? 쓸데없는 일에 애를 쓰고 있군요. 그렇게 정성을 다해 만든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기나 하겠소?”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사렛에서 목수일을 하신 예수님이었다면, 그분은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을 아무렇게나 하셨겠습니까?” 그 젊은 노동자가 바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였습니다. 
  
작은 일에도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그였기에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조각가요 건축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성경에서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연극으로 한다면 결코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저 잠깐 나왔다가 무대 뒤로 사라지는 단역입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의 평범한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에베소 교회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오네시보로였습니다. 그의 삶에서는 신앙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연로하여 몸이 쇠약해지고 감옥에 갇혀 외롭고 쓸쓸한 자신을 찾아와 자신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 사람, 오네시보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오늘의 오네시보로여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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