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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로 인하여 무너졌을 때, 예수를 바라보라 (시 3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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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로 인하여 무너졌을 때, 예수를 바라보라 (시 38:1-22)

여러분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일을 하나 꼽아 보라면 무엇을 말하시겠습니까?

다윗에게 “평생 잊지 못할 사건 하나를 말하라”고 하면 무엇을 말할까요?
소년일 때, 골리앗을 죽인 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일?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을 이룬 일? 저는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였던 일을 말하리라 생각합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왕이 되고 통일을 이룬 것, 대단해 보이지만 죄 하나만 못하다는 것이 기가막힌 일입니다. 실제 대통령, 국회의장, 대단한 성공이지만 죄가 드러나면 감옥에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까?
 
오늘 시편은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이 드러났을 때, 비참했던 심정을 회상하며 썼던 시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다윗의 기념하는 시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다윗의 기억에서 떠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물론이지만 친구나 가족 마저 외면하였습니다. 

11절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내 상처를 바라보곤 비켜섭니다. 가족들마저 나를 멀리합니다.
우리가 은밀히 지은 죄 중에 하나, 1/10. 아니 1/100 만 드러나도 아내 남편 자녀, 목사 교인 친구 이웃 얼굴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사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지은 죄가 이렇게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005년 1월 동남아 쓰나미, 스리랑카 해안 갑자기 바다가 물러나더니 많은 물고기들이 바닥에 드러나 퍼덕거렸습니다. 어부들인 마을 사람들은 너도 나도 바다로 달려 들어 물고기를 건졌는데 쓰나미가 덮쳐 다 죽었습니다. 

죄가 꼭 이와 같습니다. 죄는 분명히 유혹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실상을 보는 눈이 뜨여야 합니다. 죄 뒤의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직후, 어떠했을까요? 모든 것이 뒤집어졌습니다. 에덴 동산이 지옥처럼 변했습니다. 그 두려움, 그 절망,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시 38:1~5 주님, 주님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님의 진노로 나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 주님의 화살이 나를 꿰뚫으며, 주님의 손이 나를 짓누릅니다. 주님께서 노하시므로, 나의 살에는 성한 곳이 없습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나의 뼈에도 성한 데가 없습니다. 내 죄의 벌이 나를 짓누르니, 이 무거운 짐을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내 몸의 상처가 곪아터져 악취를 내니 이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가 드러난 순간, 다윗이 경험하였던 고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경험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춤을 춥니다. 우리를 죽이고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12절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올무를 놓고, 내 불행을 바라는 자들이 악담을 퍼부으며, 온종일 해칠 일을 모의합니다. 

여러분 중에 여전히 죄를 기웃거리거나 품고 사는 이가 있다면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에 몹시 슬퍼하였고 눈물로 요를 적신다고 하였습니다. 
6~8절 더 떨어질 데 없이 무너져 내린 이 몸, 온종일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니, 이 몸에 성한 데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몸이 이토록 쇠약하여 이지러졌기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신음하며 울부짖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이런 경험을 해 보지 못하였습니까? 그렇다면 곧 하실 것입니다.

13-14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14절 참으로 나는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되었고, 입은 있어도, 항변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지은 자의 처지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슬픔을 가져야 합니다. 죄로 인한 애통함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귀한 것은 회개만 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9~10절 아, 주님, 나의 모든 탄원,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나의 모든 탄식, 주님 앞에 숨길 수 없습니다. 심장은 거칠게 뛰고, 기력은 다 빠지고, 눈조차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15절 주님, 내가 기다린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에게 친히 대답하여 주실 분도 오직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갈망하면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서 주님을 보았을 때, 주님은 이미 삭개오를 아셨습니다. “삭개오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삭개오는 모든 사람들이 정죄하고 외면하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권력을 가지고 돈을 모으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되면 만족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더 무서운 고통이 닥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팔아먹고 법을 어겨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가?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은 재물로도 사람은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작은 것 같지만 바닥이 없는 구덩이와 같아서 무엇을 채워도 족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저주받은 마음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도 구원받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삭개오의 이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삭개오야!” 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부모도 당신의 깊은 속을 모르고 친구나 심지어 남편이나 아내도 모르지만, 주님은 당신의 깊은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은 삭개오에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삭개오 안에 들어가기를 갈망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보여 즙니다. 주님은 오늘 당신 속에 들어가기를 갈망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당신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삭개오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급히 내려와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주님이 필요함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죄로 인하여 비참하게 무너졌지만 그에게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원받고 싶었습니다. 죄를 이기고 싶었습니다.
21~22절 주님,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를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빨리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이 다윗에게는 죽음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다윗은 살 수 있었습니다. 회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죄가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은혜였습니다,

죄를 감추면 안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죄가 감추어지면 오히려 큰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면 죽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들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주려죽게 되어 돌아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 속으로 연습한 대사가 있습니다.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하지만 아버지는 이 아들을 위해 동네 잔치를 벌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하면 이런 복을 받는구나 하시겠지만 아닙니다.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탕자가 이런 잔치를 원했을까요? 여러분이 탕자라면 이런 잔치 자리가 편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이 놈아, 동네 사람이 볼까 창피하다. 저 구석 방에 가서 숨어 있어. 누가 와도 꿈쩍하지 말아!”라고 야단쳤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겁니다. 

그런데 잔치를 벌인 겁니다. 부잣집에서 소를 잡고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벌렸으니 웬만한 동네 사람들은 죄다 모였을 겁니다. 모인 사람들이 “오늘이 무슨 날이지? 회갑인가 아니면 큰 아들 혼사 날인가?” 묻지 않겠습니까?  탕자는 하루 종일 잔치에 모인 사람들에게 “저 놈이래! 아버지 재산 다 말아 먹은 놈, 참 속도 좋아!”라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얼마나 난감하고 낯뜨거웠을까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회개는 이렇게 죄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발간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설교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많은 곳에서 저를 강사로 부르십니다. 이번에도 남아공 코스타에 갑니다. 
초청을 다 수락하지 못할 정도로 바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목사, 유명해졌네?” “복 받았네..”라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잔치 자리에 앉아있는 탕자의 심정이 됩니다. 
제가 쓴 책에는 온통 제 자신의 부끄러운 고백만 담겨있습니다. 
부흥회에 가면 수도 없이 제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곤 합니다. 이제 이 책까지 더해졌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지 생각하면 죽을 맛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철저히 죄에 대하여 단절시키시는 것입니다. 

저는 탕자가 잔치를 통해 철저히 깨어졌을 거라고 믿습니다. 아버지가 베푸는 잔치는 자아가 죽는 자리입니다. 아버지는 자아가 깨어지는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다윗이 왜 자기가 저지른 부끄러운 죄로 인하여 고통당하던 일을 기념하는 시를 썼겠습니까?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은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자신의 부끄러운 죄를 고백하거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고 화내지 말고 “저 사람 복받았네! 죄를 해결받았네,” 하고 축복해주시기 바랍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정말 죄 안짓게 될까요? 죄가 싫어질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다윗은 정말 다시는 죄 짓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죄 짓고 싶지 않을 때가 옵니다. 
암이 생기면,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 가정이 파괴되고 인간관계가 다 끊어지게 되면, 자녀들이 자신이 지은 죄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지옥이 눈 앞에 있을 때, 여전히 죄짓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전(前)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재임 기간 중에 백악관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르윈스키라는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스캔들에 휘말렸습니다. 당시 그는 두 달이 넘게 거실 소파에서 자야했습니다. 남편의 고백을 들은 아내 힐러리 여사는 ‘그 순간에 남편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클린턴은 외롭고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동료이자 벗인 고어 부통령에게까지 외면당했습니다. 
한 순간의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 것에 대한 쓰디쓴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하원에서 그의 탄핵이 가결되었습니다. 4,500명이나 되는 목회자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다시 그런 죄를 짓고 싶겠습니까?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지 않고도 죄가 싫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전도자 라치 월커슨이 워싱턴 주에서 대규모 전도집회를 열었을 때 이야기다. 전도집회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강단 앞으로 나왔기에 리치는 모든 사람과 만나 상담할 수 없었다. 전도 집회를 마치고 몇 주 지난 후에 리치는 한 여대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리치 월커슨씨. 저는 몇 주 전에 시애틀에서 있었던 전도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대학 신입생이고 친구들의 초대를 받고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망설이다가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사살 저는 이주 절박한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4년 전부터 악몽과 같은 시간을 보냈고 있었습니다. 그 악몽은 제가 열네 살 되던 해에 삼촌이 저희 집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부당한 성적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위협과 협박에 저는 아무 말도 못했고 대학에 입학하여 집을 떠날 수 있게 되기만 참고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할 때쯤 저는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습니다. 학기 초에 저는 아무 남학생하고나 같이 잤고 거의 매일 술과 마약에 취해 모든 것을 잊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악몽 가운데 있었습니다. 전도집회에 갔을 때 저는 거의 한계점에 이르렀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을 때 거의 달려나갈 뻔 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타고 5시간을 달리는 동안 저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대학 기숙사 방에서 삼촌이 제 방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꿈속에서 도와 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고 싶었지만 소리를 지를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삼촌은 계속 자기에게 오라고 명령했고, 저는 피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삼촌에게 가려는데 갑자기 기숙사 방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두 팔을 벌리고 저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저는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려 재빠르게 삼촌을 지나 예수님의 두 팔에 안겼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친구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나는 자유다! 나는 자유를 얻었다! 난 이제 정말 자유를 찾았다!’라고 울부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죄의 사슬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핵심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 죄에서 자유하게 되면 우리도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쩌면 진정한 회개의 증거요 죄에서 벗어난 증거일 것입니다.

지난 며칠간 저는 몇몇의 동역자에 대하여 불편한 마음과 실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언제까지 도와야 하나?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나?’마음이 상하여 모른 채 내버려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책을 읽고 메일을 보내 오셨습니다.

“... 목사님! 책에서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사랑해 주실 거라고 하셨죠? 저도 그 대열에 끼일 수 있나요? 목사님 말씀에 너무 기뻐하고 감사하고 가슴 벅차고 목이 메입니다.”

이 메일을 받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제가 그렇게 썼거든요.“걸리기만 해 봐, 사랑하고 말거야!”주님은 이 부담스러운 메일을 왜 제게 보내게 하셨을까? 회개했습니다.“주여, 제가 힘이 닿는데 까지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돕기 힘쓰겠습니다.”

한 선교사님과 후원교회 문제로 상담하였습니다.“저는 재정후원 때문에 후원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 후원 때문도 아닙니다. 선교사인 제가 혹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짓는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끝까지 저를 품어주고 믿어주고 다시 일으켜 줄 그런 교회를 찾습니다.”이것이 후원교회였습니다.  

죄로 무너졌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유혹하고 다가 올 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가 보일 때,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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