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먹는 자는 살리라 (요 6:52-59)

첨부 1


먹는 자는 살리라 (요 6:52-59)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104년래의 가뭄이라고 해서 비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처음 100mm의 비가 왔을 때 평소 같으면 매우 많은 양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메말랐기에 다소 해갈은 되었지만 아직도 완전 해갈하기에는 모자란다고 아직도 100mm이상 더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또 다시 비가 많이 왔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너무 많이 왔다고 합니다. 

사실 얼마큼 있어야 적당한 것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무슨 일을 할 때도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실상은 모를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요즘은 레시피(recipe)라고 해서 약제로 말하면 처방이 되겠고 음식으로 말하면 조리법이 되겠습니다. 이 조리법을 보면 양을 아주 정확하게 재고 그에 따라 무슨 양념을 얼마큼 넣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니 초보자도 그 조리법을 보면 크게 실수하지 않고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요리하고는 다릅니다. 요리는 태우기도 하고 잘못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툭툭 털고 다시 만들면 됩니다. 영화를 만들 때도 N. G라고 해서 잘못됐을 때는 다시 찍으면 됩니다. 하지만 인생은 다시가 없습니다. 물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나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간 것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지난날을 거울삼아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인과라고 해서 원인이 있고 그에 열매가 따라오게 됩니다. 사과나무를 심으면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를 심으면 배가 열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오늘 어떤 결과가 있다는 것은 그 결과가 있기까지의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고하지 않고서야 어찌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어쩌다 한두 번 심지도 않은 것을 거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마다 꼴뚜기가 아닙니다. 특히나 농부들은 말합니다. 땅은 정직하다고요. 땀을 흘린 만큼 거둔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수고하여도 하나님이 돕지 않고서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번 가뭄과 비를 통해서도 깨닫거니와 하나님이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그것도 알맞게 주시지 않는다면 세상에 남아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두 아들은 둔 어머니가 있어 한 아들은 우산 장사요 한 아들은 짚신 장사라 비가 안 오면 우산 장사하는 아들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고 비가 오면 짚신 장사하는 아들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반대로 이야기하면 비가 오면 우산 장사하는 아들이 잘 되니 좋고 비가 안 오면 짚신 장사하는 아들이 잘 되니 좋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이 무엇 때문입니까?

가장 먼저는 상실의 두려움입니다.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염려합니다. 무엇인가 소중한 것이 없어질까 봐 또 걱정합니다. 지금은 잘 나가지만 어느 날 갑자기 망하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 염려하고 지금도 가진 것이 모자라서 힘든데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게만 살다가 끝나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또 염려합니다. 지금은 멀쩡하게 살아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죽을까봐 또 염려합니다.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한번은 다가올 죽음이지만 내가 생각지 않은 때에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게 될까봐 염려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들까봐 걱정하고 어디가 아프다 싶으면 이게 죽을병은 아닌가 싶어서 또 걱정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정원의 잔디가 되려고 하지 말고 들판의 잡초가 되라고 했습니다. 잡초는 어떤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손길 아래 자라는 잔디는 아주 약해빠져서 조금만 환경이 변해도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사람이 가꾸지 않으면 잔디밭에 잡초 한 두 포기가 나기 시작하면 금방 잡초 밭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조금만 웃자라도 시들어 죽어갑니다. 그런데 그냥 풀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ㅈ납초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는 근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든 것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아픔도 있고 모자람도 있고 상실의 두려움도 있지만 그보다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워 먹게 하겠느냐?”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쥐약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하고 믿지를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보다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점쟁이들 말이라면 군소리 않고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영은 영으로만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은 어둠 속을 보지 못합니다. 빛이 없으면 그저 깜깜절벽입니다. 아무리 대낮이라도 빛을 차단하는 안대를 눈에 낀다면 앞을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아는 길이라면 더듬어서라도 가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한 걸음도 제대로 내딛을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영으로야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말합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는 빛이 비쳐져야 합니다. 빛이 없이는 어둠을 밝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둠 스스로는 빛을 낼 수 없습니다. 빛이 없기에 어둠입니다. 그러나 누가 어둠 가운데 빛을 비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을 주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그냥 어둠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겨났습니다. 더 이상 어둠만의 세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 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 그 빛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유대 지파를 통해서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올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와서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할 때 그곳은 베들레헴이라고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막상 그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는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사야서 7:14은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선포합니다. 누구보다도 이 말씀을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처녀의 통해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요 독생자라 말씀을 하셔도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속죄 제물로서의 자기의 살 즉 자기의 몸으로 말씀하시고 자기의 피를 대속의 피로 말씀을 하시는데 막상 유대인들은 그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예수님의 살을 뜯어먹고 예수님의 피를 빨아 마시는 것으로 생각하니까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역시 그냥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보다 자세히 알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또 잔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심으로 떡과 잔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자신의 몸과 십자가에서 흘리는바 대속의 피를 가리키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이 살과 피는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못 박히시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을 대신 갚아주셨음을 기억하기 위해 떡과 잔을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떡을 먹고 잔을 마심으로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나를 위한 은혜로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고난이요 죽음이심을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고백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우리가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자”는 다시 말해서 주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모든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따라서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의 고백으로서 떡을 먹고 잔을 마시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든지 이 성찬의 자리에 설 때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의 고백으로서의 떡과 잔을 기쁨으로 먹고 마셔야 할 것이요 우리의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자녀 됨의 증거로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 또 하나의 실천 즉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참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사랑하고 더불어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먼저 떡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육체가 힘을 얻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생명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밥을 먹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반적인 밥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먹어야 사는데 양식이라고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내려주시는 만나가 유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떡이요 생명의 떡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밥이든 빵이든 먹거리와 만나는 결국은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밥을 먹고 만나를 먹어도 때가 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죽음을 피하게 할 능력이 없는 떡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떡은 말 그대로 생명을 주는 떡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요 6:32~33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떡은 참된 떡이요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떡은 무엇일까요? 무리들이 주님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간구했는데 그들이 달라고 한 바로 그 떡은 어떤 떡일까요? 죽어가는 세상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떡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직접적으로 밝히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찢겨질 그 살이 참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음료입니다. 일반적인 음료는 마셔도 또 목마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음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참된 음료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시니 여인이 예수님께 대답하기를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이에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런데 6장에 와서 이제 주님이 주시는 바 생수는 바로 주님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 먹고 마시는 자는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참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바로 그 주님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실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나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주님을 날마다 먹고 마셔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밥이나 떡을 먹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이 날마다 풍성한 은혜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말씀이시기에 말씀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고 그 능력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말씀대로 지키셔서 모든 은혜의 선물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 되신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깨달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그러니까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우리가 살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결국은 말씀 안에서의 믿음이요 말씀을 근거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았으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가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한다면 어찌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힘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살기 위해서도 먹어야 하고 먹어야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이 살기 위해서도 날마다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살은 어떻게 먹는 것일까요?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을 먹는 방법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하라” 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했으니 이 명령을 따라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서로 종노릇하라, 서로 짐을 지라, 서로 받아들이라, 서로 기도하라, 서로 용서하라, 서로 찬양하라, 서로 복종하라, 서로 하나 됨을 지키라, 서로 격려하며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렇게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입니다. 

또 “지키라” 하신 것들도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라, 십계명을 지키라 명하셨으니 지키는 것이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입니다. 또 “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명하셨으니 버리라고 하는 것을 버리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 결심과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살은 영생의 말씀이지만 그러나 그 영생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생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영생의 말씀을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이 내 죄가 씻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마 26:27~28은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에 대하여 증거 하시기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은 곧 예수님의 영생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내 죄를 대속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도 주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란 바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보혈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주님의 피를 마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고 내게 능력 주시는 성령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내가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심으로 죽은 영혼이 산 영혼으로 거듭나게 되고 영생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리하면 우리 영혼이 잘되고 우리들의 범사에 잘되며 어떠한 대적 앞에서도 강건할 것이며 또한 우리들 사업이 복을 받고, 근무하는 직장에서 우리들이 복을 받을 것이며, 그리고 우리들의 자녀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요셉과 같이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모든 자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복을 주님을 먹고 마심으로 다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마 7:21~23은 말씀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영생은 믿음으로 받고, 천국도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고 주여 주여 라고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렇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그러나 행함이 없고 불법을 행하는 믿음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행함이 없고 불법을 행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어떤 사람들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요한 일서1:6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즉 행함이 없고 불법을 행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란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주일이면 교회당에 나와 하나님 말씀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신앙고백도 하지만 그러나 일단 예배당밖에 나오면 세상 사람들처럼 죄를 범하고 거짓말을 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불법이란 무엇입니까? 요한 일서 3:4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죄란 불법 곧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신 아담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행하는 자, 곧 하나님의 말씀에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사람, 버리라고 하는 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 또한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사람, 지키라고 하는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주여 주여 한다는 것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뜻입니다. 종의 가진 모든 것은 다 주인의 것입니다. 종이 가지고 쓰고 있다고 해도 그 모든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보디발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지혜롭게 행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인 되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네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인 줄 착각하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지는 않습니까?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한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까지도 사실은 주님이 주신 생명입니다. 주님이 오늘이라도 그만 하면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발버둥을 쳐도 안 됩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는 자기에게 달란트를 맡겨 주신 뜻을 바로 알아 바로 나가서 장사하여 배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알아 행하기 위해 날마다 주님으로 먹고 마시며 주님의 은혜 아래 성령의 도우심과 지혜를 간구하고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는 그 뜻을 따라 순종함으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받아 누리되 더 풍족하게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