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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 소망 사랑 (고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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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소망 사랑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Ⅰ. 본문해설 

13장 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의 상 반절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려고 한다. 

Ⅱ. 지금 있는 것들 

Α. “항상 있는 것인데” 

오늘 우리 말 성경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희랍어 성경을 좀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런데 지금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머물러 있다”가 더 근접하다. 여기에 ‘항상’이라는 부사는 나오지 않고 또 ‘있을 것인데...’라고 하는 미래형이나 추측형도 사실 희랍어 원문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여기에 나와 있는 ‘지금은(누니)’ 이라는 이 단어는 12절에서 두 번이나 등장하는 ‘그 때(토테)’라는 단어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한 그 때와 대조되는 지금으로서의 누니. 이 지금은 모든 것을 명백하게 아는 때가 아니라 지금은 바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머물러 있는 때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세심하게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고린도전서 13장 전체를 통해 사도가 갈파하고자하는 중요한 요지를 놓치게 된다. 

Β. 은사와 신망애 

남겨진 세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신망애(믿음, 소망, 사랑)이다. 주님의 뜻에 대해서 온전히 알게 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은사가 남겨져있고 우리에게 성경도 남겨져있지만 은사와 성경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불러일으켜진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은사의 경륜과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를 살펴보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어떤 은사는 폐지되거나 그 용도가 변경이 되었다. 그 때에 비하면 성경을 가진 우리들이 훨씬 낫지만 영광의 날에 비하면 여전히 우리는 어둠 속에 있다. 영원하고 온전한 주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명백히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렇게 불확실한 때에 우리로 하여금 참 하나님이 주신 계시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이다. 

이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12장에서 13장으로 넘어가기 전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다던 바로 그 길이다.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0) 


Ⅲ. 믿음, 소망, 사랑 

Α. 영광의 지식에 이르기까지 삶 

사도는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영광의 지식에 이르기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우리들이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가야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Β. 신망애로 살아감 

믿음, 소망, 사랑은 은사가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이 은혜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은사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고린도전서 12장의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영적은사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사도가 보여주겠다고 말한 탁월한 길이고, 은사와 대비되는 은혜의 결과로서의 믿음, 소망, 사랑이다. 

성경은 믿음을 두 종류로 나눈다. 은사로서의 믿음과 은혜의 결과로서의 믿음이다. 은사로서의 믿음은 하나님이 아주 특별히 교회에 당신의 뜻을 알리기 위하여 주신다. 이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확고하게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확신을 갖고 교회를 진리 안에서 세우는 역할을 한다. 

또 하나의 믿음은 은혜의 결과로서의 일반적인 믿음으로 여기에서 ‘믿음’은 은혜의 결과로서의 믿음이다. 주님의 뜻을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영광의 날의 올 것이고 그 때에는 주님의 뜻이 찬란하게 드러나 온전히 알게 된다. 그 때에는 은사도 계시의 말씀인 성경도 필요 없게 되는데 그 때까지는 이 희미한 계시들을 붙들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의지하며 살아야할 신뢰와 확신이 필요하다. 이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 

당연히 두 번째 언급되고 있는 소망도 은사가 아니다. 욥을 보면 인간의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모든 시련을 한 번에 당했다.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치열하게 비난을 당할 때 말로써는 그들을 어떤 이론으로도 반박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조용히 하나님 앞에 시선을 고정하고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소망의 은사이다. 그러므로 은혜가 떨어지면 절망하게 되는데 이 절망이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의 이 결론은 성경적이다. 

이미 신자가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역사하는 방법은 대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우리를 감화시켜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의 감화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이 안에서 감동이 일어나면서 나를 사랑하던 사랑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생겨나게 된다.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영적(spiritual)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은혜의 비밀을 많이 가져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인격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 이것이 영성에 대한 최고의 증거이다.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사도가 말하는 것은 은사를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게 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만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사랑으로 살 수 있다. 이는 은사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오는 것이다. 


Ⅳ. 결론 

여러분들의 신앙의 지난날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여러분들은 은혜의 추수기가 있었을 것이다.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에 있어서 고난도 이기고 형언할 수 없이 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기쁨 때문에 나 자신 다 주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봉사하여도 아깝지 않은 때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살게 했는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불만족과 많은 불행이 이 세상의 자원의 결핍 때문에 오는 것이고 이것들이 채워지면 우리는 편안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결국 이 모든 우리의 불만족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그리스도 없는 삶,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삶을 사는데 원인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탁월한 표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그리워하고 그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 없이 살기보다 은혜와 함께 죽기를 바라는 것이 성도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하늘 위 높이 계셔서 당신이 하시기 가장 좋아하는 일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다. 이런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 은혜로서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사는 것 말고 우리에게 또 다른 어떤 탁월한 길이 없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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