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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을 정복하라 (창 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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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정복하라 (창 1:26-28) 


저는 신학교를 다닐 때 조직신학이 재미있었습니다. 조직신학이란 주로 기독교적인 교리들을 공부하는 신학을 의미합니다. 주로 신론, 인간론, 죄론, 구원론, 내세론과 같은 것들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의 논리는 참 쉽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와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교리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면 하나, 셋이면 셋만을 이해할 수 있는 우리들의 머리구조가 셋이면서 하나요, 하나면서 셋이라는 삼위일체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면 사람이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시지 어떻게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고,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어떻게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하나면서 동시에 셋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서라도 이해하여야 하고,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서라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둘 중에 하나만 이해하고 주장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즘 이단은 이상한 사이비 이단들이 많이 있지만 기독교 초기에 보면 대부분의 이단은 지금과 같은 이상한 사이비 이단보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이신 하나님만 주장한다거나 하나님이 결국은 세 분이시라는 면을 주장하는 이단, 그리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가운데 하나만을 인정하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많았습니다.

바른 기독교 신앙은 하나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인 진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신성과 인성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고 함께 조화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능력 중에 하나가 바로 하늘과 땅에 대한 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사를 공부해 보면 교회의 신학이 시소를 타듯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초월주의 신학과 내재주의 신학입니다. 초월주의 신학이란 하늘과 땅을 생각할 때 땅 보다 하늘에 치우친 신학을 의미합니다. 초월주의 신학에 빠지게 되면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바라보게 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영과 육을 논할 때 육보다는 영에 속한 일에 치우친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월주의 신학에 빠지게 되면 세상적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집니다. 그냥 기도하고, 기도를 통하여 신비한 영적인 체험들을 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상과 하늘을 다 포함하는 나라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냥 천국 즉 하늘에 있는 나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냥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설명을 드리자면 순복음 교회가 이에 가까운 신학적인 노선과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반대로 내재주의 신학이란 신학과 신앙의 관심을 하늘보다는 땅에 두는 신학을 의미합니다. 저들의 관심은 주로 세상입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문제들에 대하여 민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하다못해 이 세상이 민주적이지 못한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투쟁을 합니다. 대표적인 교단으로 이야기하자면 기장측 교회를 들 수 있습니다.

초월주의 신학의 장점은 하늘입니다. 그러나 단점은 세상과 땅입니다. 내재주의적인 신앙의 장점은 땅과 세상입니다. 그러나 단점은 하늘과 영적인 능력입니다. 가장 좋고 건강한 신학과 신앙은 둘 다를 포함하는 신학과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신학과 신앙을 분석해 보면 저는 땅과 세상에 보다 관심이 더 많은 사람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보아도 하늘 보다는 말씀보다는 땅에 대한 말씀에 더 눈이 많이 갑니다. 초월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이 제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늘 조심은 하려고 하고 너무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타고난 성품과 방향은 크게 바뀌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제 설교와 목회는 언제나 한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저는 제가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한 쪽이 늘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여러분들은 저와 함께 교회 생활을 하시면서 저의 설교를 들으실 때 이 점을 늘 유의하고 조심하셔야만 합니다.

오늘의 설교도 전형적인 제 취향의 설교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 단어는 ‘땅’이라는 단어와 ‘정복’이라는 단어입니다. 저와 다른 취향의 신학과 신앙적인 입장을 가지신 분들은 저와 반대로 성경을 읽으실 때 ‘하늘’이라는 단어에 더 많이 관심이 가실 것이고, ‘정복’이라는 단어보다는 ‘섬김’이라는 단어에 더 눈이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깊이 읽다보면 그 두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과 단어들이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땅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 하늘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늘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 땅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정복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복이라는 단어와 개념 속에 섬김이 들어있고, 섬김이라는 단어 속에 정복이라는 개념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세 제자를 변화산에 데려가셨었습니다. 변화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비한 세상과 세계를 경험하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영적인 신비와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체험과 경험을 한 제자 베드로는 황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갑자기 땅과 세상이 우스워져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그냥 여기서 살자고.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왜 자신을 변화산에 데리고 올라가셔서 그와 같은 체험을 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몰랐습니다. 베드로에게 그 하늘의 신비한 것을 보여 주신 까닭은 그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산을 내려가 땅과 세상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돕고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때 그 변화산 아래에는 귀신에 들려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들어가는 자녀를 둔 부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하신 일은 그 자녀를 고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변화산 속에서 하늘만 보았지만 성경을 통해서 보아야 하는 변화산에는 하늘이 있는 동시에 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하늘은 땅이고, 땅은 하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취하여 땅을 잊어도 안되고, 땅에 취하여 하늘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1992년 여름 처음 미국 코스타 집회에 강사로 초빙을 받아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때 설교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한 ‘고지를 정복하라’는 설교였습니다. 그 설교가 제법 이곳 저곳 테입을 통하여 전파되었습니다. 그날 제 설교를 사람들은 고지론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제 고지론은 올해로 만 20년이 되었습니다.

제 설교와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제 설교와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저지론 또는 미답지론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하고 약한 곳으로 내려가라고 하셨는데 왜 김목사는 고지를 정복하라고 이야기하고 주장하느냐가 핵심이었습니다. 성경 어디에 하나님이 고지를 정복하라고 하셨느냐고 질문을 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면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시하곤 하였습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바로 고지를 정복하라는 말씀이 아니냐고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성경은 틀림없어 오늘 우리들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분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저지와 미답지로 내려가라고도 말씀하시지만(우리는 그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수도 없이 많이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땅을 정복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섬김과 희생을 말씀하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기독교적 진실이지만 하나님은 똑같은 성경에서 우리가 깜짝 놀라 의아해 할 만한 단어인 ‘정복’이라는 말씀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아무렇지 않게 ‘섬김’과 ‘정복’이라는 단어 함께 쓰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당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두 단어를 들을 때 당황하는 것은 그 두 단어가 서로 충돌하고 배치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경에서 그 단어를 함께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시는 까닭은 하나님에게 그 단어는 서로 충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복이라고 하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제압하여서 저들의 노동력과 부를 착취하고 저들을 부리며 그것으로 자신들만 호의호식하며 누리는 것을 연상합니다. 이제까지 세상의 정복자들이 주로 그렇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하시는 까닭은 그렇게 하라고 하심이 아닙니다. 잘못된 정복자들에게 빼앗겼던 세상을 저들에게서 빼앗아 저들이 부리고 착취하고 지배하는 약하고 낮은 사람들을 돕고 섬기라 하심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5절에서 16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찌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을 정복하면 말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정복자들이 세상의 고지를 정복하여 세상과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기 때문에 세상이 나빠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택하는 것은 그와 같은 목적으로 땅과 세상과 고지를 정복하려고 하는 경쟁을 악하고 부정한 것으로 보아 그것으로부터 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거룩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가 세상적인 정복자와 같은 심정과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와 같은 경쟁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다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정복하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 멸망의 가증한 것들이 서 있는 자리들을 없이하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도전하였지만 고지 정복이 주는 세상적인 마력과 매력에 빠져 세상적인 정복자들처럼 타락에 빠질 위험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지를 정복하려고 하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또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고지를 정복하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을 쓰지 않고 고지에 오를 방법이 있는가가 실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답은 어렵다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다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과 문은 본시 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좁다는 말씀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는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다.’입니다.

야망을 가지고 고지와 세상을 정복하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노력하지 않고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그것을 쟁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방법으로만 고지를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힘과 능력이 없는 사람들 중에도 고지를 정복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는 꽤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남 잘 때 자기 않고. 남 놀 때 놀지 않고 정말 죽기 살기로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세상의 약자들과 낮은 자들을 잘못된 정복자들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도 저들 못지않게, 아니 저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은 포기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무조건 땅과 세상과 고지와 정복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힘들어서 못 한 것이 아니라 옳지 않고 악한 것이기 때문에 안 한 것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식과 방법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땅을 정복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매도합니다. 비겁한 일입니다. 그것은 비겁을 뛰어넘어 악한 일입니다.

공부해야 할 때 공부하지 않고 교회에만 나와 열심히 봉사하면서 믿음이 좋은 것처럼 위장하고 교회 봉사를 자기보다 열심히하지 않고 공부에 매달리는 사람을 믿음 없는 사람으로 매도합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가 된 사람을 다 똑같은 사람으로 정죄합니다.

세상을 부리고 누리기 위해서도 많은 지식과 돈과 권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을 돕고 섬기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지식과 실력과 힘과 돈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위험한 말이 될 수 있지만 저지론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인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벼개하고 누었으니’ 하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팔 벼개하고 누었어도 최소한 나물과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은 아무 문제없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나물과 깨끗한 물조차 마실 수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을 돕고 섬기려면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벼개하고 누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착같게(?) 공부하고 출세하고 돈을 벌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죽어라고 그 힘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힘써 세상에 흘려보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거의 첫 명령과 부탁으로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땅을 정복하여 그것을 지배하고 네 마음대로 착취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세상과 땅을 섬기고 축복하기 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는 세상 다 내 팽겨 치고(?) 교회에 와서 기도만 하고 봉사만 하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현재 주일 낮 예배 외에는 이렇다할 다른 프로그램들이 없는 교회입니다. 물론 앞으로는 수요기도회도 시작할꺼고 새벽기도회도 시작할 겁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예배와 행사가 너무 많아 여러분들을 너무 자주 교회에 나오시게 하는 일을 가급적 조심하려고 합니다. 할 수 있는대로 여러분들을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고 경쟁하실 수 있도록 지원해 드리고 싶습니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경쟁하지 말고 세상과 경쟁할 수 없는 세상의 약자들을 대신하여 세상과 경쟁하십시오. 여러분 자신만을 위하여 돈을 벌지 말고 정말 얼마 안 되는 돈조차 벌 수 없어 인간의 최소한의 품위는 고사하고 생명 조차 지킬 수 없는 약자들을 돕고 섬기기 위하여 할 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하여 돈을 버십시오. 부자가 되십시오. 자신을 위하여 출세하지 말고 약자들의 귄리를 지켜주기 위하여 출세하십시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땅과 세상과 고지와 정복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삼지 마십시오. 고지를 정복한 후에 변질되지 않기 위하여, 타락하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십시오.

'땅을 정복하라‘는 오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을 축복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라고 그런 우리 높은 뜻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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