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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의 공동체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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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만드는 사람들의 공동체 (마 5:1-12)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우리 시대에 소위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화두를 던져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분이십니다.  그가 한 번은 기차 여행을 가면서 식당에 있는 열차 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건너편에 한 초로의 부부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부인이 남편을 향해서 끊임없이 불평하는 소리가 건너편에 앉아있는 필 박사의 귓전에 들려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거 야채가 왜 이래?  야채가 신선하지 않은 것 같다.  고기는 너무 질긴 것 같고, 포도도 너무 신 것 아니야?  이 열차의 온도는 너무나 맞지 않는다.  날씨도 안 좋고.  여보, 우리 괜히 여행 나온 거 아니야?"

이렇게 끊임없이 불평하는 이 부인의 소리가 필 박사의 귓전에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필 박사를 의식한 듯 부인 곁에 앉아 있던 남편이 좀 미안함을 느꼈던지 필 박사에게 이야기를 건네 왔다고 합니다.
"선생님! 참 죄송합니다.  이해를 좀 해 주십시오.  제 아내가 본래 직업이 그렇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필 박사의 호기심이 발동을 했다고 합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죄송합니다만 부인의 직업이 무슨 직업이신데요?"
그러자 이 남편은 다시 "예, 제 아내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지요."
그러자 다시 필 박사가 물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제조하시는데요?"
그랬더니 이 남편은 설명하기 어려운 미소를 띄우면서 필 박사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 제 아내는 불행을 제조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스스로 불행을 만들면서 살고 있는 여자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불행을 만드는 사람들', 이 단어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만약 불행을 만드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반대로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도 존재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마태복음 5장입니다.  5장 1-12절 까지를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산산수훈 가운데 팔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팔복 가운데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이 들어있습니다.  여기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를 영어로는 Peace maker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피스 메이커가 존재한다면 저는 행복 메이커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 주위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불행을 만들어 살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행복을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불행하다고 불명하고 원망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더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불행 메이커이십니까?  아니면 행복 메이커이십니까?

우리는 지난 4월부터 수요일 저녁기도회에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관한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수요일 저녁기도회 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팔복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윤리에 관해서 함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 아침에는 예수님의 팔복에 관한 말씀을 개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오늘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여러분과 제가 행복을 만드는 사람으로 우리의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느냐를 함께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팔복이 가르치는 행복한 인생의 열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팔복이 가르치는 행복한 인생의 열쇠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팔복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한 인생의 열쇠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말 번역에 이 팔복을 보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혹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나 이것을 좀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을 하자면 사실은 "복이 있도다" 라는 낱말이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여"  그 다음도 "복이 있도다 온유한 자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이 있도다" 라는 말이 먼저 서두에 나왔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희랍어로 '마카리오스' 혹은 '마카리오이' 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는 blessed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happiness, 혹은 형용사로 happy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happiness가 아니라 여기서 blessing이라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blessing이라는 이 단어가 소위 happiness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happiness라는 단어는 happen이라는 동사에서부터 유래한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happen이라는 것은 우연히 어떤 일이 발생하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행복이 그런 것이라면 행복은 어떤 우연의 선물이라고 밖에 정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인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영향을 받아서 서구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만났을 때 주고받는 축복의 인사 가운데 그들은 이렇게 서로에게 축복을 합니다.  "God Bless you!"

이 blessing이라는 단어는 본래 앵글로색슨 단어에서 blood라는 단어에서부터 나온 말입니다.  blood라는 말은 '피'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피의 제사를 뜻하는 말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에 보면 동물을 잡아 피의 제사를 바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제사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성경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희생 동물의 피 흘림을 통해서 그가 대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심판을 대신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서를 받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들어간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모든 피 제사가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초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blessing이라는 단어의 배후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팔복을 살펴보면 이 팔복의 모든 내용은 이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죄를 느끼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표준, 혹은 하나님의 가치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목적 앞에 자신을 드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메시지인 복음을 삶으로써 자기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편에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인생,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사는 사람,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복이 있다,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열쇠는 단순한 행복의 처세를 익히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 기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무엇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삶의 모든 방황은 끝이 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물질로 행복한 줄을 압니다.  물건으로 기쁜 줄 압니다.  그러나 물질의 기쁨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다 날아가는 것입니다.  들의 꽃과 같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아침의 이슬처럼 날아가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영원한 공식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모두가 원하실 것입니다.  저도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에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합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부지런히 재산을 모읍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진정하고도 참된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십시오.  행복의 열쇠는 거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팔복이 가르치는 행복한 인생의 열쇠가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팔복이 가르치는 행복한 인생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인생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싼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행복은 소유에 있습니다.  좀 더 많은 돈을 소유하고, 좀 더 높은 권력을 소유하고, 좀 더 명예를 소유하고, 좀 더 큰 집과 좀 더 큰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을 우리의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고 오늘의 이 팔복에서는 행복을 철저하게 소유가 아닌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게으르게 살아가는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의 아버지가 어느 날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자기 아들에게 교훈을 시작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놀로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이렇게 타이르기 시작합니다.
"아들아! 너 열심히 일해야 해.  그래야 살 수 있어."
아들이 묻습니다.  "왜 열심히 일해야 해요?"  "야! 그래야 돈을 좀 벌지."  아들은 다시 묻습니다.  "돈은 벌어서 무엇하게요?"  "야! 그래야 너도 장가들고 가정을 이루고 그렇게 살 수 있지 않니?"  "그렇게 살아서 뭐해요?"  "그래야 너도 편히 좀 쉴 수가 있고, 편히 놀 수가 있는 인생을 살 수가 있잖니?"
그러자 아들은 빙그레 웃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이나 마찬가지네."

이 아들을 향한 관심 속에서 아버지의 타이름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무엇 때문에 일해야 하는가 라는 목적을 아들에게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해야 합니까?  아니,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이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인격의 변화와 성숙, 이것은 이 땅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의 표현을 빌리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게 하려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팔복을 다시 묵상해 보면 팔복은 철저하게 인격 지향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겸손한 인격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교만한 자신의 인격이 깨어짐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온유한 자를 언급합니다.  그런데 온유와 겸손의 인격을 완벽하게 갖춘 모델 인격이 있다면 누구를 생각해 낼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친히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러므로 팔복의 교훈을 따라가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롤 모델이 되어 있는 사람들,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것은 좋은 역할 모델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이래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에게 중요한 역할 모본이 되었던 어떤 분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어렸을 때, 혹은 초등학교 시절에 혹은 중, 고등학교 시절의 어떤 선생님, 혹은 어떤 형님이나 누님, 내 주변에 교회에서 만났던 어떤 장로님 등의 좋은 롤 모델이 되었던 누군가를 연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들을 만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완벽한 모델이 있다면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나도 예수님처럼 살아야지.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마지막날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아버지 앞에 섰을 때 그런 나로 인해 기뻐하시고 싶어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팔복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팔복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행복한 인생의 열쇠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이 팔복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은 이웃을 향해서 열린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격의 연단이라든지 성숙은 나 혼자서 성취할 수 없는 목표입니다.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깨어지고 다듬어지고 연단 되어 지고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주님이 기대하시는 인격의 모습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팔복에 등장하는 모든 인격적인 요소들은 나 혼자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건강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인격의 모습인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 다시 말하면 겸손한 인격을 위해서 나는 내 속에 있는 교만을 깨는 작업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는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이 겸손의 인격을 빚어갈 수가 있습니다.  긍휼의 인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이웃의 약점과 허물을 품어줄 수 있는 긍휼히 여김, 이것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빚어질 수 있는 인격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금세기에 한 유대인 철학자를 통해서 전 세계의 진지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책 하나가 출간되었습니다.  유태인 철학자인 마틴 부버의 책 가운데 '나와 너'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생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도 나와 영원자 너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그는 말합니다.

시냇가의 조약돌을 보십시오.  돌 하나만 덩그러니 있다면 결코 그 돌은 아름답게 다듬어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돌들이 서로 부딪히고 또 부딪히면서 깨어지고 깎여서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조약돌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너와 나의 관계에서만 우리의 인격은 빚어지고 만들어집니다.

인간은 관계성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고, 관계성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관계성 속에서 세월의 어느 시점이 되면 세상을 떠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인류 역사 이래로 이 법칙에서 예외적으로 살다간 사람은 없었고, 앞으로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격의 연단이 이루어져갑니다.  그런데 내가 이웃을 그냥 이용하고 차버릴 때, 이웃은 나에게 있어서 인격적인 대상이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략해버리고 맙니다.  그 이웃은 내가 성공을 위해서 잠시 이용하는 수단에 불과한 존재가 됩니다.

마틴 부버는 이런 관계를 '나 중심적' 인간관계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경쟁과 성취 중심의 사회에서 그런대로 잘 적응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전반은 모든 일들이 잘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성취와 성공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반드시 성취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취 이전에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가 무너진 성취 중심의 인생은 결국에는 매우 황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통해서 이런 흥미 있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하루를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간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여행을 하라."  여행 떠나서 일주일이 지나면 집에 오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 달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새 집으로 이사를 가라."  새 집의 감격은 한 달을 넘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결혼을 하라."  허니문의 감동은 일년 이상을 넘기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탈무드의 절정은 바로 이것입니다.  "일생이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이웃을 섬기라."  그렇습니다.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 가장 중요한 비밀은 내가 이웃을 품고 이웃을 섬길 때 비로소 가능한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북태평양에 있는 하와이를 우리는 지금 지상 낙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래 하와이 섬은 낙원이 아니라 부족과 부족 사이에 많은 싸움이 있었던 그런 섬이었다고 합니다.  결정적으로 하와이의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바꾼 것이 복음이었습니다.  구교와 신교의 선교사님들이 당도하고 평화의 복음을 전하면서 하와이의 섬은 변화된 것입니다.

이 변화의 와중에 신화적 전설을 남긴 카톨릭 사제 한 분이 있습니다.  '다미엔'이라는 신부입니다.  본래 하와이 섬 중에 하나인 몰로카이 섬은 나병환자들을 수용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미엔 신부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 나중에는 그들과 연대화 되기 위해서 심지어 자기 자신이 나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다미엔이 마지막 자기 일생을 마무리 짓기 직전에 이런 고백을 한 것을 아십니까?
"내 인생은 참으로 행복했다."

젊은 청년 다미엔, 그러나 평생 이웃들을 섬기다가 자기 자신이 일그러진 나병환자의 얼굴을 가졌던 다미엔, 그는 마지막에 이런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 인생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무엇이 그에게 행복의 고백을 낳았을까요?  그것은 섬김이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이웃들을 품고 섬기고 사랑하면서 그는 성경이 약속한 놀라운 행복의 비밀을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밖에 못 사는 인생입니다.  이 순간이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이 소중한 인생을 행복하게 사십시오.  기쁘게 사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행복하라는 것입니다.  기쁘게 사십시오.  행복하게 사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기쁘게 살아야 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속에는 언제나 행복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항상 불평하라!  항상 원망하라!  항상 비판하라!  항상 두려워하라!" 이런 말은 없습니다.  성경 갈피 갈피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기억하십시오.  어떤 환경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침의 안개와 같습니다.  그런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행복한 것은 영원한 행복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을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가겠다는 거룩한 욕심을 품으십시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지만 마음의 근심은 뼈를 녹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빚더미 위에 있더라도 기뻐하십시오.  기뻐하면 기쁨의 능력 앞에 무너지지 않을 벽이 없습니다.  무슨 능력, 무슨 능력해도 기쁨의 능력 앞에 녹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기쁨의 능력으로 해결되지 않을 문제도 없습니다.  기쁘게 살아야 됩니다.  행복하게 사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만 열면 하나님의 크고 작은 은혜와 은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붙들고 행복한 자로 위대한 사람처럼 사십시오.  기쁨의 영을 가지고 다시 회복하십시오.  행복의 바이러스를 가지고 다시 회복하십시오.  세상 속에, 우리의 가정과 믿음의 공동체 속에 행복의 바이러스를 공급하는 자가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치료하지 못하는 병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열지 못하는 문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무너뜨리지 못하는 벽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도 없습니다.  오늘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인생을 행복하게 사십시오.  내게 허락하신 가정과 믿음의 공동체를 행복하게 만들어 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교회가 왜 필요할까요?
이곳에 오시면 섬길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함께 믿음의 공동체를 넘어서서 이웃들을 품고 사랑하는 연습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믿음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우리의 행복의 하와이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일생이 끝나는 어느 날 이 고백을 나누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 인생은 정말 행복한 삶이었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팔복의 레슨을 붙들고 행복을 만드는 여행을 한번 시작해 보십시오.

우리들의 믿음의 공동체인 하나님의 교회가 행복을 만들고, 행복을 제조하는 인생의 놀라운 마당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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