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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 (롬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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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 (롬 9:1-5)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여러분, 기우(杞憂)라는 고사 성어를 아시지요? 옛날 중국의 ‘기’나라에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주야로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걱정도 팔자다.”라는 말처럼, 쓸데없이 공연한 걱정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핀잔하는 말입니다. 두 사람의 유대인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나는 꼭 기독교로 개종하겠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가 기독교로 개종하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천당은커녕, 비석 밑에서 돌아눕고 말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사람이 “걱정도 팔자일세. 내 아우도 곧 개종할 텐데,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도로 제자리로 돌아올게 아닌가?”라고 대답했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영국의 여류작가 엘리엇은 사람들이 5 가지의 감옥, 곧 1)자기 사랑의 감옥 2)근심의 감옥 3)향수의 감옥 4)선망의 감옥 5)증오의 감옥에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녀에 의하면 인간은 근심의 감옥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괴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근심이라는 마귀다.”고 그의 작품 ‘파우스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근심의 문제는 실로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미국 청년의 수가 30만 명이었는데,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놓고 근심과 염려 때문에 심장병에 걸려 죽은 미국 시민들은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염려가 지나치면 위장 통증, 종양, 두통, 설사, 두드러기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찬송가 가사처럼,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구이며,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누구입니까? 

성경에서는 근심이나 염려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염려를 헬라어로는 ‘메리므난’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여러 조각으로 나누다’라는 동사 ‘메리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 ‘상이한 방향으로 분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염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근심이나 염려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근심이나 염려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근심이나 염려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 되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고,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또 근심이나 염려를 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히 3:12에 “형제들아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마음이 가장 악한 마음이고,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뿌리에서 끊어진 꽃과 같이 영원히 죽고 말 것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또한 고후 7:10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세상 근심은 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필요하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로마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면, 1-11장까지의 교리 편과, 12-16장까지는 실천 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리 편중에서 9-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에 있어서 유대인은 무엇인가? 특히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유대인의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이것은 대단히 곤란하고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늘 아래 그 어떠한 민족도 이스라엘만큼 놀라운 영광을 누렸던 민족은 없습니다. 그 어느 나라도 이스라엘 민족만큼 세계의 주목을 받은 나라도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이었으며, 하나님의 축복된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축복과 특권들을 생각할 때, 은혜에 충만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무수한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택정함을 입었다는 사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특권도 그들의 것이었으며, 훌륭한 조상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모든 인류의 운명과 장래에 대한 언약을 부여받았다는 사실,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과연 어떻게 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4, 5절에 보면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하면서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믿음이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졌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유대인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자, 그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기의 동족 때문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1-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하노니.” 라고 하였습니다. Living Bible의 우리말 번역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성령님이 내 안에서 양심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동족 때문에 정신적인 고민과 많은 슬픔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에게,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향하여서는 ‘항상 기뻐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고서, 정작 바울 자신에게는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니, 이건 자가당착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의 근심과 고통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집을 마련할까? 하는 의식주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과 질병에 대한 근심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는데, 그러한 바울 자신이 세상적인 큰 근심과 그로 인한 그치지 않는 고통을 느끼며 살았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근심과 고통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한 바와 같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3절에 밝혀져 있는 대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서 하게 된 근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비록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는 하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인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부인하고 있으니,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큰 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역설한 바울은, 제아무리 자신의 동족이라도, 불신 유대인들에게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어느 누구라도 구원받을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불신하는 동족의 멸망은 뻔한 것이며, 그래서 사도 바울의 동족 때문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신 동족을 위한 바울의 근심과 고통은, 간절한 구원의 소원으로 나타나는데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여기 ‘저주’란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천벌을 뜻합니다. 단순한 어떤 경제적인 손실이나 시간적인 손해, 또는 육적인 죽음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이 아울러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무서운 멸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한 것과, 니느웨성이 멸망한 것이 바로 아나데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멸망이 자기에게 오는 한이 있을지라도,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그 저주를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생명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했으므로, 그리스도와 끊어짐은 그의 모든 것이 끝남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보다 더 큰 아픔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의 최대의 고통, 최대의 희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동족애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동족애요 민족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동족애는 그가 단지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 민족이 잘되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동족애는 골육의 친척인 이스라엘 민족의 번영과 안일을 바라기보다는, 민족 전체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는 신앙적 차원의 애국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애국심, 이러한 민족애를 갖기까지에는, 먼저 바울의 철저하고 확신에 가득 찬 신앙이 밑받침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신앙이 희미한 자는 결코 이러한 애국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내가 믿는 신앙의 확신이 있어야만,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힘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찰리 피스’ 라는 사람은 중한 죄를 지은 범죄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을 모조리 무시한 흉악범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영국 리즈시 아멜리 교도소에서 그는 사형 집행일의 아침을 맞았습니다. 교도소 목사님이 언제나처럼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성경을 낭독하면서, 그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찰리는 지옥에 대해 목사님이 직접적으로 읽고 있는 태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동료 인간이 잠시 후에 떨어질 지옥 구덩이에 대하여, 그렇게도 초연하게 줄줄 읽어 내려 갈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전도자는 도대체 영원한 불 못이 그 희생물을 영원히 태운다는 말씀을 과연 믿고 있는가? 믿는다면 어떻게 조금의 떨림도 없이 그러한 말씀을 읽어 내려 갈 수가 있겠는가? “그대는 사망에 이를 것이며, 사망은 모든 소망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하오.” 이런 말을 눈물 한 방울 없이 해낼 수 있는 전도자도 과연 사람인가? 이 모든 말이 찰리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쳤습니다. 

목사님!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제가 목사님과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같이 주장하는 것을 믿는다면, 동해에서 서해까지 영국이 온통 깨어진 유리 조각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한 영혼을 그처럼 영원한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맨발로 걸으며 나아가겠습니다. 아니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 손바닥과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지옥이 실재하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영국 천지가 온통 깨어진 유리 조각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한 영혼을 건져내기 위해서라면,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라도 외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사도 바울의 이 간절한 소원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춤추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간절한 기도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큰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이 백성을 다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을 창대케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 아버지! 다른 사람은 다 진멸하시고, 저 혼자만 살려주시겠다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어쩌면 저를 이렇게도 사랑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감격할 것인데,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거룩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모세의 기도에서, 또는 사도 바울의 소원에서, 끓어오르는 애국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애국심은 결코 정치적 애국심이나,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나온 그러한 애국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애국심은 모든 동족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 신앙에 거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자는, 곧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자인 것입니다.

나만 편안하고 무사하겠다는 것, 나만 구원받겠다는 생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로 옳지 않는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은 망하더라도 ‘나만’ 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하만’이 꾸민 일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 죽게 될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유대인으로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무서운 경고를 했습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민족이 다 죽을 때 너만 무사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준엄한 책망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가를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가운데 아직도 믿지 않는 식구들이 있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정말로 내가 그리스도인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식구 중의 한 사람이 죽는다면 당장 지옥에 갈 텐데, 이렇게 보고만 있을 것입니까? 이대로 놔둘 것입니까? 여러분의 가족, 형제, 친척 중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큰 근심과 고민과 고통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차라리 내가 저주를 받는 한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한 번 이라도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큰 근심과 고통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은, 결코 의식주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이나 질병에 관한 것도 아니었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세상에 속한 근심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근심과 고통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믿지 않는 동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한 지옥의 멸망을 당하느니 보단, 차라리 바울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동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비원’(悲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곧 모든 중생이 극락왕생하기까지 자신의 구원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심정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진리가 없고, 그래서 구원과 생명이 없는 이교도들도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오늘 불신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가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조난자의 외침을 듣고서도, 구경만 하고 있을 선원이 있을까요? 죽어 가는 환자 곁에서, 태연히 앉아 신문이나 읽을 의사가 있을까요? 불이 나서 사람들이 타죽어 가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소방관이 있을까요? 세상의 많은 이웃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데, 어찌 우리만 예배당에 편히 앉아서 예배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진리를 확실히 믿습니까? 천국이 실재하는 것처럼, 지옥도 실재하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그렇다면 불신 가족이나, 불신 친척이나, 불신 이웃과, 불신 동족에 대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해피 데이를 앞두고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의 불타는 구령의 심정을 가지고, 불신 가족과, 불신 친척, 불신 이웃과 동족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진력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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