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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하지 못함이 없는 믿음 (막 9: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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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하지 못함이 없는 믿음 (막 9:14-24)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정의하는 말 중에 <지식의 홍수 시대> 혹은 <정보의 홍수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특정한 분야에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만의 몫이었던 시대가 아닙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반 전문가들이 되어갑니다. 웬만한 것들은 인터넷만 켜면 다 해결해 줍니다. 특히 장사하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터넷 때문에 장사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싼 물건을 사는 곳을 다 알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건 값을 빤히 알고 달려드니 장사하기가 그리 힘들답니다. 정보와 지식을 통해서 여러 분야를 지식적으로 섭렵하는 도구나 기능, 능력이 갖추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평가하는 전반적인 평가가 “참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지식이 홍수를 이루고 정보가 넘쳐서 살기 좋은 시대가 되었는데 이 시대는 여전히 불행이 남아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많은 것을 알고 다 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아는 만큼 행복한 것도 아니요, 배운 만큼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행복하지 못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믿음, 곧 신뢰의 문제입니다.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듣기는 많이 들어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를 않습니다. 배울 만큼 배웠고 알만큼 알지만 신뢰하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니까 결국은 아무 능력도, 아무 결과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많은 정보가 있고, 많은 지식이 있다 하지마는 결국은 믿음으로만이 결과가 있고, 열매가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인데 그걸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대화가 있고 수많은 약속이 있다고 할지라도 불신의 관계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믿긴 믿어야겠는데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믿어져야 그 다음 단계로 갈수 있는 것인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합니까? 믿어질 때만이 지식도, 경험도, 정보도 비로소 그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살아가는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그렇습니다. 가족이 그렇습니다. 친구가 그렇습니다. 성도가 그렇습니다. 이렇듯 인간관계에 필요한 것이 신뢰라고 한다면 신앙생활 하는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무엇을 통하여 보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선은 우리들의 예배행위를 보실 것입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 모습을 기대하며 보고 계실 것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닌 몸과 마음과 정성을 함께 드리는 예배를 기대하고 계실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준비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예배의 행위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들의 기도행위를 보실 것입니다. 

집중 되고 흐트러지지 않은 기도의 자세를 보고 계십니다. 인도자의 기도를 따라 지나치게 “아멘, 아멘” 해서 거슬리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반대로 꼭 아멘을 해야 할 때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멘” 이라는 의미는 “그렇게 되기를 함께 간절히 원합니다.” 하는 의미인데 정말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아멘”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나 설교를 들을 때에 마음에 진심으로 동의가 일어나면 “아멘” 하는 겁니다. 기도가 나쁜 기도는 없지 않습니까? 설교가 잘못되라고 하는 설교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마음으로 원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무슨 독립군인양 끝까지 “아멘” 안 합니다. 이거 체면문화입니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기도한다고, 혹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기보다 직분이 낮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기도한다고 “아멘” 하면 무슨 체면에 손상이라도 가는 것처럼 입 꾹 다물고 아멘 안합니다. 정 뭐하면 대충 헛기침으로 얼렁뚱땅 마무리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의 자세입니다. 함께 한 마음으로 원한다는 간절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걸 보고 계십니다. 또 하나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의 헌신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할 것을 드리는 자세입니다. 일주일 중에 주일이라고 하는 하루의 시간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리고 교회에 인심이나 쓰듯이 교회 나가 주는 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지만 그 모든 것 중에 십분의 일만을 드리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그의 헌신적인 신앙고백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거창한 신학을 갖다 붙이고, 옳으냐 그르냐를 논쟁할 문제가 아닙니다. 십일조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내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보시고자 하는 이 모든 것, 예배행위, 기도생활, 헌신의 삶에는 한 결 같이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 모든 것들이 불가능합니다. 믿음 없이 올바른 예배가 가능합니까? 믿음 없이 제대로 된 기도 생활이 있을 수 있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옥합을 깨트려 기꺼이 드리는 헌신의 행위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향하여 우리에게 절실히 원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임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책망어린 어조로 개탄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19절)” 이 말씀 속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이 세상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직선적으로는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숨겨진 의미는 이렇습니다. “더 이상 얼마나 내가 너희와 같이 있고, 얼마나 뭘 더 보여주고, 얼마나 많은 것을 더 가르쳐야 믿음 있는 사람이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믿어야만 하는데 어째서 의심을 하고 있느냐, 의심하니까 너희가 무능하고, 의심하니까 병을 못 고쳤고, 귀신을 내쫓지 못했고, 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니더냐.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어야 참 믿음을 갖게 되고 믿음의 사람이 되겠느냐?” 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서 무척이나 애씁니다. 건강을 위한 모임에는 참석도 잘하고, 또 건강에 관한 책은 잘 팔립니다. 그런데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를 가만히 보면 간단합니다. 음식 적당히 먹고, 운동 적당히 잘하고, 마지막으로 마음이 편안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마지막 부분이 전체의 75%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잘못 먹고, 시간에 딱딱 맞춰서 운동은 못해도 마음이 편하면 건강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자, 마음이 편하면 건강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까? 이상하게도 돈이란 많을수록 불안하고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식이 많으면 속이 편할 것 같나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던가요? 편안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믿을 수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믿을 때 불안이 없어지고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남편도 믿고, 아내도 믿고, 자식도 믿어야 합니다. 의심하면 결코 편안할 수가 없고 편안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는 건강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신뢰라고 하는 이 믿음은 참으로 중요한 것인데 그럼 믿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믿음이란 원래 그 뿌리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먼저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내가 저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내 아내를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자식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남편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어떤 믿음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믿음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것도 체질화의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불신이 반복되고, 습관화되고, 성격화되고, 마지막에는 성품 화되어 버립니다. 의심 체질이 되어버립니다. 이러면 구제하기가 참 힙이 듭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에게 습관화가 되어야하고, 성격화가 되고, 성품 화 되어서 믿음 체질이 되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믿음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벙어리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멀쩡한 아이가 불속에 뛰어들고, 말도 못하고, 자기 몸을 자기가 상하게 해서 피를 내고, 그러니 얼마나 아버지가 괴롭겠습니까? 이 아들을 고쳐보려고 별 사람을 다 찾았습니다만 그 때마다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실패가 아닙니다. 결국은 믿음에 대해 배신당한 것입니다. 

그가 누구를 찾았을 때는 고쳐 주리라는 믿음을 걸고 갔는데 그때마다 수 없이 배신당했고 이제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불신이 반복되고, 습관화되고, 성격화되고, 성격화 될 즈음에 드디어 예수님 앞에 왔는데 마침 예수님께서는 변화 산에 올라가 계시고 산 밑에는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 제자들은 한번 고쳐보겠다고 한 사람 한 사람 나서봅니다만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또 한 번 실망합니다. ‘아이고, 그래도 뭔가 기대했었는데 여기서도 별도리가 없구나.’ 하고 낙심합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다가 이 장면을 보셨고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당신의 제자에게 내 아들을 데리고 와보았지만 못 고쳤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사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여러 번 실망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믿을 수가 없다는 일종의 마음의 표현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라고 하는 말로 나타납니다. 이 의심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동정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나냐, 너냐, 저 제자들이냐가 아니다, 믿는 자의 문제다. 누구든지 결국은 믿음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여러분, 능력의 문제는 주인공이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만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대를 믿음 없는 세대라고 말씀합니다. 믿을 수도 없는 세대, 어쩌면 믿어서는 안 되는 세대에 삽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얻어야합니다. 세상이 모든 것을 불신하고 의심한다해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만은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까지 의심하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에 능력 있는 자가 됩니다.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 이것만이 세상을 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수 있는 도구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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