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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 (눅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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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 (눅 15:3-7) 

사람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귀중한 것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대구 개구리 소년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와룡산에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집을 나간 뒤 행방불명된 5명의 소년들이 11년 만에 죽은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11년 동안 연인원 32만 여명을 동원해 소년들을 찾았습니다. 부모들은 생업도 포기한 채 실종된 자식을 찾아서 전국을 뒤지고 다녔습니다만 결국은 11년 만에 유골로 발견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당연히 부모님들과 가족들입니다. 이들을 누가 죽였는지, 아니면 이들이 사고를 당하여 죽었는지도 아직 모른 채, 이 사건은 영원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이들을 벌써 다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들의 부모님들과 가족들은 아직도 이 아픔을 잊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도 고통스럽고 괴롭겠지만, 반대로 부모를 잃어버린 자식도 가련하고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잃어버린 하나님도 안타깝고 고통스러우시겠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도 비참하고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만큼 이 세상에서 불행하고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최고의 불행이요. 슬픔인 것입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잠시 짧은 영상을 한편 보겠습니다.

(5분짜리 슬픈영화) 

오늘 본문에서 보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애타게 찾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잃어버린 양을 찾고 계시는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안타깝고 절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섬기며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불량하거나 신분이 천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했는데,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도 마찬가지로 죄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이들은 이 같은 죄인들과는 절대로 사귀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같은 장소에 함께 있는 것도 피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을 사람으로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죄인들을 외면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문제 삼고 있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관심이 지금 어디 있는지 도무지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용납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으며, 그들이 초대하는 식탁에 함께 앉으셔서 음식을 드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하시는 태도는 바리새인들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한 영혼의 가치를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하실 만큼 가치가 있는 존재로 여기십니다. 

눅 19:10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고, 막 1:38절에서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잃은 버린 한 마리의 양은 누구를 의미합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어느 특정인을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교회를 다녔지만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는 사람들 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으나 아직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사람들 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 이사 왔거나 그 동안 섬기던 교회를 떠나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여러 가지 일로 시험이나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우리가 찾아와 전도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 가족일 수도 있고, 친인척일 수도 있으며, 내가 가장 가까이 하는 친구와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런 분들이 바로 잃어버린 양으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상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찾아야 할 영혼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찾고 싶어 하십니다.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방황하는 영혼들을 품에 안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서, 교회에서 상처받고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영혼들을 찾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귀한 만큼 이들의 영혼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한 영혼의 소중함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4절에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100이라는 수는 이미 한 눈에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입니다. 큰마음 먹고 하나씩 세지 않고는 한 마리 정도가 더 있는지 없어졌는지 알기 힘듭니다. 

그런데 목자는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늘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혼 사랑은 바로 관심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은 관심으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아흔아홉 마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한 마리 양에 대한 관심을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마리를 소홀히 하는 것을 합리화해 버립니다. 결국 한 마리 잃은 양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고 맙니다. 교회가 숫자 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한 사람의 중요성이 그만큼 적어 집니다. 숫자가 적을 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겼던 마음을 계속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한 생명,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아니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유명한 테레사수녀의 고백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임무가 대중을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한 개인을 돌보고 있습니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 밖에 사랑할 줄 모릅니다. 당신도 내가 한 것처럼 한번 시작해 보십시오. 

나는 한 사람만 인도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4만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은 바다에 물 한 방울 보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물 한 방울을 보태지 않았다면, 바다는 물 한 방울이 모자랐을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 한 사람, 하나로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이라도 귀하게 여기고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찾아야 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살펴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 영혼을 찾는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기 위해서는 영혼을 찾는 직접적인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부부의 사랑을 과학적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를 하면서 부부가 사랑할 때 대뇌에서 특수한 호르몬인 “도파민”과 “옥시토신”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을 지속시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의 호르몬은 짧게는 18개월, 길어도 30개월이 지나면 분비가 끝이 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남녀가 사랑해서 아이를 낳고 나면 아이를 돌봐야 하는데, 부부가 서로 사랑에만 빠져있으면 아이를 돌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때 쯤 되면 남녀 간의 열정적인 사랑은 식도록 사랑의 호론몬 분비가 중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부는 사랑이 식어진 냉랭한 사이가 됩니까? 아닙니다. 부부는 서로 간의 사랑이 지속되도록 끊임없이 사랑의 수고를 합니다. 사랑이 수고로 실천될 때, 사랑의 호르몬 분비가 없어도 차원 높은 사랑을 지속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창 29장을 보면 야곱의 결혼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은 삼촌 라반의 딸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무려 7년을 종살이 했습니다. 그런데 7년을 봉사하고 나니 삼촌이 자신을 속여서 라헬 대신 언니 레아를 주었습니다. 다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을 종처럼 봉사했습니다. 결국 14년을 사랑 때문에 종처럼 일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수고로 아름다운 사랑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수고로 완성됩니다. 열정만 있다고 다가 아닙니다. 관심만 보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에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애쓰는 목자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그 다음에는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즉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가는 수고와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교회로 인도하는 과정 속에 정말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만나고, 물질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많은 사랑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모든 수고를 “해산의 수고”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출산할 때 출산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처럼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이 만큼의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카터 전 미국대통령은 그의 저서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내 교회의 전도 프로그램에 14년 동안 참가하여 10가정씩 140가정을 방문하여 전도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주지사에 입후보하고 선거 운동 3개월 동안에 악수를 나눈 사람은 약 30만 명에 달한다. 나는 나를 위해서는 3개월 사이에 30만 명을 만나보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14년 동안에 겨우 140가정에게 복음을 전달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선거운동을 위해 만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힘들고 어렵지만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기 위해서는 한 영혼을 찾은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어릴 때 경북 고령에서 좀 더 시골로 들어간 곳에서 자랐습니다. 대구에서 고령으로 갈려면 금산제라는 큰 고개를 넘고 이 고개를 넘어가면 큰 강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일이지만 너무나 큰 사건이라 지금도 기억이 나는 일이 있습니다. 

무더운 어느 여름날 갑자기 동네 전체가 난리가 난 것처럼 숭렁거렸습니다. 동네 여고생 4명이 이 강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모두 익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4명중에 한 명이 저의 이종사촌 누나였습니다. 그때 누나는 고등학교1학년이었는데,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다가 날씨가 너무 더워서 친구들과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한 명이 물에 빠지자 구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차례로 다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4구의 시신을 어느 집 마당에 가마니로 덮어놓고 부모들과 가족들이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마니 하나가 들썩거리더니 죽은 사람가운데 한사람이 살아났습니다. 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저의 이종사촌누나가 살아난 것입니다. 아마 물을 많이 먹고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 모두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다시 살아난 누나를 안고 기뻐서 뛰면서 울던 이모님의 모습이 지금도 제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 5-7절 말씀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장의 심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 왔겠습니까?

그리고 1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하면서 영혼구원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제일 큰 기쁨은 한 영혼이 구원받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면 영혼구원에 대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았을 때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을 스바냐 3:17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영혼구원, 즉 생명을 살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지상명령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와 선교는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목자의 심정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가서 힘써 전도하는 참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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