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 (갈 6:14-17)

첨부 1


예수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 (갈 6:14-17)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잠언 16장을 통해서 어리석은 우리 인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진리는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속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할지라도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인도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겸손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교만하면 멸망이 뒤따라오지만, 겸손하면 영광이 뒤따라옵니다.  그러므로 겸손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첫째도 겸손해야 하고, 둘째도 겸손해야 하고, 셋째도 겸손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우리가 결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까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바른 뜻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일들을 이루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길과 계획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역사와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람 앞에서 무너지고 정복당하고 새 틀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길을 먼저 계획했을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하십시오.

겸손의 반대말은 거만함입니다.  거만하다는 말은 잘난 체 하면서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거만하다는 말과 비슷한 말로는 건방지다, 도도하다, 버릇없다, 교만하다, 무례하다라는 말들입니다.  무례하다는 말에서 우리는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거만함은 사랑이 없는 사람의 행동에서 나오는 비뚤어진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에게서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 아는 지식을 가지고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 다 있는 것처럼 거드럼을 피우지 마십시오.  모름지기 하나님의 사람은 겸손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살아간 삶의 자국 자국들에서 믿음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사람들을 보면 그가 머물렀던 삶의 자리가 결코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믿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가 살았던 삶의 모습들에서 믿음의 냄새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복점이나 백화점에 서 있는 마네킹을 보십시오.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손발도 멀쩡합니다.  우리보다 키도 훨씬 크고 더 잘 생겼습니다.  그러나 마네킹이 머물러 서 있었던 그 자리를 향해 아름다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네킹에게서는 어떠한 믿음의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가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살아서 꿈틀거리게 될 때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교회와 성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으면 형식만 남게 될 것입니다.  종교적인 흉내만 내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흉내만 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력이 없는 형식을 붙잡고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심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머무는 자리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야 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능력이 바로 거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생명체는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성장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건강을 얻기 위해서, 혹은 가정이 잘되기 위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를 하면서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예수를 믿으면서 영적인 성숙이 따라와야 합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섬겨줍니다.  그래서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숙한 리더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섬겨 주고 교회에 힘껏 헌신함으로서 오는 보람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에 활력이 나타납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 영적 침체가 찾아옵니다.  결국 그는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생명을 잃어버리면 결코 세상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자랑은 십자가입니다.  성도의 자랑도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이 머문 자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헬라 사람들이 어리석게 생각했던 십자가를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능력 있는 제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평생 십자가를 붙들고 믿음의 삶을 살았던 그는 그가 머물렀던 삶의 자국 자국마다에 예수를 위하여 받은 흔적들로만 남았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은 천국에 가서도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받았던 상처난 자신의 몸에 남겨진 예수의 흔적을 예수님께서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흔적을 보시고 우리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크게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면서 영광의 면류관을 머리에 씌워 주셨을 것입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받았구나.  착하고 충성된 나의 종 바울아! 이제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거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주님 계신 저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 앞에 서는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내 제자라 확신할 수 있는 나의 흔적을 보여다오"라고 요구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보여드리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서 받아야만 했던 예수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아니 솔직히 예수로 인해 받아야만 했던 예수의 흔적이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의 '흔적'이라는 말은 원어로 '스티그마타', '스티그마'라는 말입니다.  '흔적'이라는 말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노예가 많았습니다.  노예에게는 물론 주인이 있었습니다.  노예가 도망가지 못하게 쇠사슬에 묶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풀어놓기도 하는데 이 노예가 도망을 갔습니다.  한 번 도망갔다가 붙잡히면 얼마든지 주인 마음대로 죽일 수가 있습니다.  당장 목을 쳐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죽이면 주인에게 손해가 아닙니까?  그때는 노예의 몸에 문신을 합니다.  인두를 불에 달구어서 몸에 주인의 이름을 새겨 넣습니다.  이제 그는 영원히 그 집의 노예입니다.

노예라고 하여 모두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예는 본래 팔 수도 있고, 자유를 주어 내보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양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한 번 도망갔던 종은 영원한 낙인을 가지게 됩니다.  어디에 가도 인두로 새긴 낙인이 드러나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합니다.  도망을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 아래 어느 곳을 가도 아무개의 종이라는 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티그마', 흔적입니다.

그의 몸에 흔적이 새겨지는 순간은 인권이 완전히 박탈당하는 순간이요, 내 존재가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완전한 소유물, 영원한 소유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노예에게 있어서 가장 부끄러운 것이 바로 이 흔적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부끄러운 흔적을 영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와 성도들에게 예수의 이 흔적을 자랑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바울은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자랑을 빌립보서 3장 5절과 6절에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 사람으로서 선민이 된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교육적으로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최고의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종파적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사역으로는 유대교회의 극렬한 행동파였습니다.  유대교회의 모든 교리를 대변하는 젊은 행동파로서 유대교에 반대되는 사람은 로마의 법을 어기고서라도 죽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극렬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또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끌어오기 위해서 거기까지 쫓아갔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모두 자랑에 속합니다.  적어도 자기가 가진 확신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인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에게는 세상적인 자랑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알게 된 후에 그 모든 자랑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덧없는 것이요 헛된 것이요 해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분토와 같이 여겼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다 내버리고 다 잊어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십자가, 십자가만을 자랑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바울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세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이 지닌 고난의 흔적, 희생의 흔적이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로만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 어디에서든 십자가와 자신과의 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맹세한 사람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말하지 않기로, 지식조차 십자가 중심의 것이 아니면 다 잊어버리기로 의식적으로 결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의 자랑의 의미는 마음의 거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쁨의 근거를 말합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있다면, 보람과 긍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랑입니다.  그 근거를 말합니다.  모든 것보다 우선적이요 이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희생할 수 있는 높은 가치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랑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교만하지 않은 자랑에 의하여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자랑이 없으면 죽습니다.  과거에, 현재에, 미래에, 남이 알거나 모르거나, 말할 수 있거나 없거나 사람은 나름대로의 자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랑이 없을 때에 사람들은 자기 존재감을 상실하게 되고 살아갈 의지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진정 능력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을 구속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는 내 마음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치유의 샘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가 겪게 되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순간 그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날마다 들어도 마르지 않는 감격의 샘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무한한 은혜가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는 나를 거룩하게 하며 나의 생활을 승리로 이끄는 신비가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가 나의 생각과 나의 입맛과 나의 취미를 바꾸어 나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인간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십자가의 신비한 능력을 모두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깨끗해졌다면 십자가 때문이요, 내가 딴 사람이 되었다면 그도 십자가 때문이요, 내가 능력의 사람이 되어서 무엇이건 이룬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십자가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십자가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삶이 새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나에게 문제가 있다면 이 십자가의 감격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를 붙잡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십자가가 없는 편안하고 즐거운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없이 자기의 이성과 세상 것들만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와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가 없는 영광된 자리를 꿈꾸고 있습니다.  이런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십자가가 없는 값싼 은혜에 빠진 종교인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서 어떻게 우리가 감격 있는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십자가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의 흔적이 없는데 어떻게 영광된 자리에로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라디아 교회에는 유대교적 율법의 문제를 가지고 와서 사도 바울을 괴롭히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율법이 먼저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학문을 가지고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명예를 가지고 교회에서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면서 명사 대접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목사든, 집사든, 권사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받아야만 했던 거룩한 상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으십시오.  "율법적인 질문을 가지고 와서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아침의 안개처럼 있다가 사라질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가지고 와서 나를 괴롭게 하려고 하지 마라.  내가 정말로 내 몸이 지니기를 원하는 것은 예수의 흔적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나를 바보 취급해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정말로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오랜 세월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 때문에 받아야만 했던 거룩한 상처가 없다면 우리는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내 언어 속에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내가 머물렀던 삶의 자리에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갖기를 갈망하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괴로움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위대한 명령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나, 어떤 고난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픔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불충분하다거나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기에 완전하고도 충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이 고난의 사실을 증거하는 복음전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부터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성도의 가장 위대한 기쁨은 주님의 위대한 명령을 감당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국 초기 선교사님들 가운데 마포삼열 목사님은 모금을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포삼열 목사님이 남들보다 말을 특별히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의 얼굴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상처는 평양의 이기풍으로 인해서 생긴 상처였습니다.

던지기와 박치기 명수요, 평양의 유명한 조폭이었던 이기풍은 한참 건축하고 있는 평양 장대현교회를 때려부수고, 이것도 모자라 마포삼열 목사님이 길거리에서 전도할 때 물에 적셔서 눈 속에 묻어 얼려놓은 솔방울을 던졌습니다.  그 솔방울은 마포삼열 목사님의 턱에 맞아 피를 뿜게 했습니다.  마포삼열 목사님은 손수건으로 턱을 감싸 쥐고 군중의 수모와 야유를 받으면서 숙소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얼굴에는 상처가 크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 가서 설교하든 이 상처는 모두에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자연히 모금이 잘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자신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이기풍은 초대 일곱명의 장로교 목사님들 가운데 한 분이 되셔서 최초로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제주도 복음화에 힘을 쏟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도토리같이 빤질빤질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서 우리가 어떻게 이후에 기쁨으로 주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순교적인 흔적을 가지기에는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매 순간 순간마다,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흔적을 하나씩 만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나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킨 분들과 같은 흔적은 남기지 못할지라도 무릎꿇고 기도했던 흔적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몸부림치며 흘렸던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손에 열심히 주님의 몸된 교회에 충성했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내게 주신 행복한 환경과 재물에 예수의 흔적이 묻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을 위해 마음껏 사용했던 흔적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류 최대의 영광스러운 흔적을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존귀하신 몸에 인류는 잔인하게 상처를 냈습니다.  차마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양을 잃었습니다.  이마는 가시에 찔린 흔적이요, 손과 발은 대못에 박힌 흉터였습니다.  그 옆구리에는 창에 찔린 큰 상처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상처를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영광스런 흔적으로 그 몸에 남겨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때 그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너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았다.  내 흉터는 율법의 저주에서 너희를 속량한 흔적이니 이제 너희에게는 저주와 죽음과 불행이 없어졌다"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죄 많은 우리들을 위해 이처럼 엄청난 흔적을 가지셨다면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해 어떤 흔적을 가지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의 복음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지극히 단순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앞을 봐도 예수요, 뒤를 봐도 예수입니다.  옆을 봐도 예수요, 위에서 내려다봐도 예수입니다.  속을 뒤집어 봐도 예수입니다.  예수 잃어버리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게 우리 기독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십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은 무엇을 믿느냐?  무엇 때문에 사느냐?  너희들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  이 물음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삶으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흔적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의 손바닥에는 못 자국이 선명하게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입술만으로 외치고 고백하는 신앙으로는 가정을 살릴 수 없고, 세상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보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머물렀던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들에게 예수의 흔적을 보여줄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한 영혼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는 언제나 예수의 향기가 납니다.  세상은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서 거룩한 변화를 경험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졌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졌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잊지 마십시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 영원한 하늘 나라의 주인공들입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