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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의 기도(2)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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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기도(2) (마 6:9-13)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용서의 기도 두 번째 시간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대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죄 용서의 문제는 우리 신앙에서 핵심이고, 신자가 일용할 양식에 관한 문제를 구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양식을 구할 때마다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죄에 대한 관점에 문제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도 현대인들이 힘겹게 살아가는데 무겁고 칙칙한 죄의 문제를 다루지 말고, 밝고 행복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건강한 교회는 죄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교회입니다. 교회 이외에 죄를 다룰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죄가 터치되어 마음이 좀 불편해져야 좋은 설교입니다. 진리가 외쳐지고 우리가 문제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불편한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비위를 맞춰주고 칭찬해 주는 곳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진정한 나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이 나를 욕할 때 진정한 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인간의 본질적 문제, 우리의 속성, 내면의 깊이 있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해답이 나옵니다. 그리고 교회는 죄를 드러내어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인입니다. 우리 안에는 악이 있고 선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의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왜 있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가 그만큼 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고 완전히 부패된 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십자가 앞에서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기 전에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이해하기 전에 인간의 진면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주기도문에서 죄의 용서는 처음 구원을 얻을 때 회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회심’인데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돌이키는 회개이고,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회개는 구원받은 이후에 신자가 일상에서 죄를 지었을 때 고백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려고 할 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발만 씻지 말고 목욕을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발을 씻는다는 것은 일상에서 우리가 용서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이 회개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신자라도 영적으로 깊어지지 않고 하나님과 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길은 성결, 깨끗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의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가까이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으면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주일에 와서 예배하고 찬양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 안에 불결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솔직하고 정직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17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여기에서 상한 심령이란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지만, 아무에게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한 정직한 고백을 하는 심령, 그 깨끗한 그릇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전성기는 죄에 대해 민감해서 아주 작은 문제까지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얻는 사죄의 기쁨을 누릴 때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정직한 고백을 하지 않으면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에 문제가 생기고, 사람과 문제가 생깁니다. 회개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우리는 회개가 희귀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죄를 덜 짓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죄의 종류만 달라졌지 죄인이 살아가는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죄에 대해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는 죄성이 있는데 그 죄성은 죄와 빨리 타협을 합니다. 선한 삶, 거룩한 삶은 빨리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그 죄에 대해 무뎌져 온전히 회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관용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동성연애의 문제도 사회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한 기준을 정하고 있지만, 이것이 문화화되면 관용하게 됩니다.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그럴 수도 있지” 합니다. 이런 관용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의 기준이 해이해지고 결국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회개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하는 이 기도는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 중에 가장 오래된 죄는 ‘죄를 부인하는 죄’입니다. 인간은 죄에 대한 합리화에 아주 능숙합니다. 죄를 감추려 하고 합리화하고 미화합니다. 세상은 죄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입니다. 죄를 지었어도 가능하면 오리발을 내밉니다. 죄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바보가 되고 죄인이 되어 수치를 당하니까 끝까지 부인하며 버티는 것입니다.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가끔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교회 안에서 말씀대로 살고 죄를 짓지 않고 산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는 자기도 모르게 의로움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도 그랬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만 보면 “회칠한 무덤들아”라며 신랄한 공격을 하십니다. 무덤 안에는 썩은 것이 가득하지만, 겉에는 회칠을 해서 그럴듯하고 깨끗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종교적 열심으로 자기만족에 빠지고 그것을 자기 의로 삼아 미화하기 때문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결국, 자기 의에 도취되어 하나님도 필요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적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오랫동안 믿다보면 의인의식이 찾아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외형적으로 잘 실천해도 심각한 것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납니다. 마가복음에는 어릴 때부터 모든 계명을 잘 지켰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주님이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시자 그는 근심하며 그 자리를 떠납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종교생활로 인한 위험성은 도를 닦을수록 자기를 정당화하여 자기를 강화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모범적으로 신앙 생활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쌓여가는 자기 의가 문제입니다. 자기 의가 쌓이면 자연히 죄를 고백하는 기도가 사라지고, 날마다 자기를 합리화하고 자랑하고 드러내는 일에 힘을 쓰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내가 얼마나 깨끗하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정직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정직해지는가에 따라 신앙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드러난 죄보다 은밀하게 숨어있는 죄를 지적하십니다. 외적인 행위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마음으로 짓는 죄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하십니다. 구제하는 것, 모범적으로 사는 것,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보다 무슨 마음으로 그것을 했느냐 그 마음의 동기가 무엇이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지만, 속에는 교만과 질투가 있다면 주님이 보시기에는 책망 받을 일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의 악함을 보십니다. 세상에서는 정직하게 말하면 망신을 당하고 공격당하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자신의 문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야 합니다. 고백하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참회록은 진리의 깊은 빛이 비추어져서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볼 때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지 않으면 참회가 안 됩니다. 

연말연시에 몽땅 용서해달라는 기도는 하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지은 은밀한 죄를 깊이 고백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깊고 은밀하고 예민한 기도를 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자신의 상태를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이 복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내가 죄인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이 기도를 통해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수많은 죄를 몸으로 마음으로 짓고, 죄인지도 모르고 죄의 습성과 악습을 날마다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그것을 드러내어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은혜는 그것을 충분히 덮고도 남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속적으로 다루는 민감성이 중요합니다. 

다윗의 영성의 탁월함은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다윗의 죄에 대한 태도는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장면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장면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그에게 주어진 힘과 권세가 아무도 당할 수 없는 때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선지자 정도는 단칼에 날려버릴 수 있었고, 자신의 죄를 은폐할 수도 있었습니다. 왕으로서 자신의 치졸한 죄를 드러내는 것은 소년 다윗이 골리앗 앞으로 달려나갈 때보다 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을 미화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불완전한 인간, 언제든지 연약한 치부를 드러낼 수 있고, 영웅이라도 여전히 죄인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고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늘 불안하고 연약하여 넘어지지만, 다윗을 통해서 진실함을 배웁니다. 그의 회개는 진실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나단 선지자의 설교를 듣고 다윗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에 대해 화를 내며 심판하고자 하지만 그 주인공은 자신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변의 넘어진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즐기지만 내가 비난하는 그 사람과 나는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신문지상에 오르는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때 그 속에 내가 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 자신의 끔찍한 죄를 잊은 채 그 사람을 정죄합니다. 죄가 드러나는 것은 고통이고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설교를 듣는 회중이 죄를 인식하고 드러난 죄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면 그 길이 사는 길입니다. 죄를 들추어내어 시인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설교의 기능입니다. 

또한, 다윗은 죄의 문제를 다른 어떤 것보다 심각하게 다룹니다. 고대 사회에서 왕은 얼마든지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은폐할 수 있지만, 다윗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고 하나님과 연관을 맺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창세기 39장에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집요한 유혹 앞에서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라고 합니다. 

그는 그 일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나 사회적 지위, 성공의 유무보다 우리의 죄에 대한 태도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죄를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질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깊이 다루기 원하십니다. 

죄로 인한 비극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 죄의 심각성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죄에 쉽게 빠지는 것은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안다면 우리는 쉽게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죄에 대한 맹렬한 심판과 진노를 보여주는 것이 2천 년 전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매달 정도로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맹렬한 진노의 심판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 죄가 우리를 황폐하게 하고 비극으로 몰고 가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인은 죄에 대한 민감성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를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문화 속에서 세상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작은 죄, 지어도 괜찮은 죄는 없습니다. 사단에게 속지 마십시오. 사단은 죄를 축소하고, 별것 아닌 것, 매력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성도 여러분, 죄에 대한 민감성을 놓치지 말고 작은 죄라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서 용서를 구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죄를 고백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십시오. 우리의 죄가 드러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빛이 납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 같아도 눈같이 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두려워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힘을 빼앗아 갑니다. 영적 기운과 신자로서의 기품이 사라지게 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우리가 깊은 정죄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존감과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기도가 막히고, 예배의 감격이 없고, 하나님의 임재는 느낄 수 없고, 점점 어둠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죄를 지은 후의 영적 어두움의 상태가 아주 위험합니다. 그 상태는 또 다른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그 죄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을 때 내 삶을 파멸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라고 고백합니다. 

밧세바 사건으로 그의 인생에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졌습니다. 주의 성신이 떠난 것 같고, 어두운 영혼의 밤을 지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회복시켜 달라고 답답한 심령 가운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있습니다. 죄를 묻어둔 상태의 삶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신앙은 물론이고 삶이 무거워지고, 영적으로 신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묘미는 우리가 죄로 넘어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용서함을 받을 때 찾아오는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때 영적 활력과 구원의 즐거움이 살아나 영적기운이 용솟음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어도 눈물의 회개를 하면 시온의 대로가 열리고 은혜의 수로가 열려 심령이 봇물 터지듯 살아납니다. 이것은 마치 큰 빚을 청산했을 때의 기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빼놓지 않아야 합니다. 죄 용서가 없는 치유와 회복은 없습니다. 

참된 죄의 고백이 없는 한 변화된 삶은 불가능합니다. 내 죄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고백하는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하기 전에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병이 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사함입니다. 우리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내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해결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때 우리 삶에 영적, 육적, 모든 영역의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우

리 삶을 파탄과 비극으로 만드는 모든 요인의 한가운데에는 죄의 문제가 있고, 죄를 무시하고는 삶의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직하게 바라보고 주의 보좌 앞에 정직하게 토설할 때 여러분의 삶에 회복의 은혜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어떤 죄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를 고백하면 의인이 됩니다. 드러내야 삽니다.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솔직함과 눈물로, 마음을 찢어 정직한 회개의 기도를 드릴 때,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한 백성은 더 이상 죄에 짓눌리지 않고 죄의 권세를 꺾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능력 있게 살아갈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살아가는 동안 일상 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밥을 먹고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는 죄 용서가 필요한 자들이요, 죄 용서의 영성이 되살아나면 삶에 회복이 있고, 신앙이 활력을 찾고, 삶의 의욕이 생기고, 구원의 감격과 영적인 기운이 살아나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이 회개의 영성이 개인과 가정, 한국 교회 안에 살아나면 한국 민족과 교회가 살아날 줄 믿습니다. 회개 없는 부흥과 회복, 변화, 예배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죄를 고백하고 죄에 민감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총으로 덮는 은혜를 경험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시온의 대로로 흐르는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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