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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양식 (요 6: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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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
요한복음 6:26-40

요한복음 6장에는 개역성경에서는 ‘떡’이라고 번역을 했고, 표준새번역에서는 ‘빵’이라고 번역을 한, ‘떡 혹은 빵'이란 표현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무려 한 장에 21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그만큼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 혹은 생명의 빵’이라는 표현을 중요하게 여기셨고,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란 표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요한복음 6:26-40절 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과연 ‘생명의 떡’이란 무엇이고, 떡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명의 떡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벳세다 광야까지 당신을 따라와서 말씀을 듣느라고 허기진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는, 그냥 돌려보내지를 않으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무리에게 나누어주는 방법으로, 장정만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은 음식을 12광주리나 거두는 이적을 행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을 직접 보거나, 소문을 들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을 때에, 예수 앞에 모인 무리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가 바로 유대인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기 때문에, 먼저 히브리적 개념에서 ‘떡’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떡’이란 표현은 [히](lechem), [그](artos) [영]bread라고 합니다. 식물성 음식의 일종으로,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떡은, ‘한국인에게는 밥, 서구인에게는 빵’과 같은 먹거리입니다. 떡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헴]은, ‘양식, 식물, 음식’ 등으로 번역된 말이고, 그리스어 [아르토스]는 ‘양식’으로 많이 번역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후에, 가장 지치고 피곤할 때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에도, 돌로 떡이 되게하라는 마귀의 시험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하기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신 8:3을 인용하신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친숙한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삶에서 ‘떡의 필요’를 인정하셨습니다. 

양식은 분명히 육체를 성장하게 하고,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갈 때에, 비로소 참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육체만을 위한 떡으로는 아무리해도 심령에 선한 영양은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육체만을 위하여 떡을 먹는 생활에는, 언제나 죽음의 두려움이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생활 가운데는, 항상 생명에 대한 확신이 함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벳세다 광야에서 여러분에게 이런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빵은 보통 밀가루로 만듭니다.(삿 6:19,삼상 1:24,28:24,왕하4:41). 또 성경에 보면 보릿가루로 만든 빵도 먹었으며,(민 5:15,요 6:9). 이밖에, 다른 잡곡 가루를 섞어서 빵을 만드는 일도 있었습니다.(겔 4:9). 
   
성경을 보면 ‘떡을 함께 먹던 친구’, 특히 ‘신성한 교제를 나누던 친구를 배반하는 일’은, 가장 가증스러운 배신행위였습니다(시 41:9, 요13:26-). 그리고 떡은 하나님의 은사로서 부스러기마저도 소중히 여겼습니다(요 6:12).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본문(요한복음 6:33-)에서, 자신을 가르켜서 ‘참 떡’,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떡’d란 표현도 ‘불의의 떡’(잠 4:17), ‘속이고 취한 식물’(잠 20:17), ‘게을리 얻은 양식’(잠 31:27), ‘환난의 떡’(사 30:20), ‘눈물 양식’(시 80:5)등, 은유적(隱喩的)으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잠간 언급했듯이, ‘떡(레헴)’이란 표현이 구약성경에서는 몇 가지로 등장합니다.

(1) 떡은 야훼께서 죄를 지은 아담을 저주하실 때에, ‘노동의 대가로서 얻는 떡’ 즉, ‘일용할 양식’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창 3:19절에서 아담에게 말씀하기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2) 떡은 잔치를 위하여 준비된 것으로 상과 음식을 대표하여, 떡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창 14:18절에서 창세기 기자는 기록하기를, ‘그 때에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떡은 잔치 음식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함께 떡을 뗀다는 것, 곧 음식을 같이 먹는 것’ 다시 말해서 ‘공동으로 식사를 한다는 것’은 고대세계에서는 지금까지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의 관계를 수립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8:12절에 출애급기 기자는 기록하기를, ‘그리고 나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하나님께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쳤다.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 와서, 하나님 앞에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제사 음식을 먹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함께 떡을 뗌으로써, 평화의 관계를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3) 구약성경에서 ‘떡’은 레위기 3:11절에 나오는 것처럼 화목제물을 가리킵니다. 레위기 3:11절에서 레위기 기자는 기록하기를, ‘그러면 제사장이 그것들을 제단으로 가져가서,, 주께 살라 바치는 음식제물(화목제물)로 바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크게 고기와 기름으로 분별이 되는데, 여기서 제물로 드려진 고기는 다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먹게 되어 있고, 기름은 하나님께 태워서 연기로 드리는 것인데, 이 제물로 태워지는 기름을, 히브리어에서는 동일하게 레헴, 바로 ‘떡’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사장을 통하여 드려지는 제물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드리는 ‘떡’이라고 이해를 한 것입니다. 

(4) 구약성경에는 특별한 ‘유월절 떡’이 있습니다.
유월절이란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의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인이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해방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해방절을 유월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430년 동안 파라오의 노예였던 히브리인이 해방을 얻게 돤 계기가 바로 야훼께서 보낸 죽음의 신이 이집트 사람의 집에는 예외 없이 들어가서 장자와 가축의 맏물을 죽였지만, 양의 피가 발려진 히브리인의 집은 유월(Pass over)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일순간에 이집트 땅에 거하는 장자를 모두 잃은 파라오는 정신이 나가서, 모세에게 모든 히브리인을 데리고, 광야로 나가서,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것을 허락합니다. 이스라엘이 해방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에 이스라엘은 광야로 나가서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급박스러운 일이라 반죽을 해서 발효시킨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에는 이스라엘이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면 이스라엘 백성이 행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양의 피를 자기 집 문설주를 바르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의식입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 행사는 계속해서 행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5) 구약성경에 나오는 떡은 ‘만나’입니다.
만나는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가는 동안, 그러니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사람이 지어놓은 보리를 추수하여 먹는 날까지, 40여년 동안 이스라엘을 거친 광야에서 먹이실 때에, 날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진영 주위에 아침마다 내려 주셨던 양식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만나’를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 혹은 양식'이라고 합니다.

본문 말씀에도 계속적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온’이라는 표현이 거듭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 31-33절에서 예수님은 물에게 말씀하기를, “무리가 예수님에게 대답하기를,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라고 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동일하게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씀하면서, 무리에게 담대하게 당신이 바로 ‘하늘로서 내려온 그 떡’이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었던 것과 구별을 해서,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분명하게 증거를 하셨습니다. 

원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그 생명의 떡임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동사만 가지고도 주어를 표시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강조할 때만 주어를 동사와 같이 표현하곤 합니다. 본문에는 나(에고)라는 말을 앞에 사용하면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본문을 직역을 해보면 ‘내가 정말 정말 말하는데 내가 곧 그 생명의 떡이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진정으로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는 점을 두 번씩이나 정확하게 말씀을 하시고, 51절까지 치면, 세 번씩이나 우회적으로가 아니라 아주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요 6:35, 48, 51) 

그러니까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유월절 떡’과 ‘만나의 본질’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만나도, 화목제사에서 하나님께 태워서 드리던 화목제물의 기름도, 모두가 예수님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일 뿐, 그 실체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여정을 가면서 40년 동안을 만나를 먹고살았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먹고살았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만나와 당신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말씀하고 있는데, 요 6: 50~51절에서, 당신은 ‘살아있는’ 또는 ‘살리는 떡’이기 때문에, ‘살리는 떡인 예수님을 먹는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6:50-51절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인 만나를 매일 먹으면서도 야훼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는 생명을 유지했으나, 영적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출애급 일세대인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참 떡’이고, ‘하늘로부터 내려 온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먹은 사람은, 영적으로 죽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믿으시면 아멘) 

본문을 보면, ‘믿다’라는 말이 9번, ‘오다’라는 말이 12번, 그리고 ‘먹다’라는 말이 11번이나 거듭해서 사용됩니다. 외면적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다른 표현 같지만, 사실 영적으로 보면 동일한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 예수님을 먹는 것이고,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떡을 먹는 행위’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문제 해결을 위하여 전적으로 예수님만을 의지하면서, 오직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 그리고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류의 구세주로 믿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라는 점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본문 51절부터에서는 불신앙적인 유대인에게 도전하는 듯이 무리에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본문 55-5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않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는, 말씀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를 못하고, 실제적으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하는 것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피를 마시는 것은 율법에서 금지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사람, 또는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자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본문 66절에서 보면, ‘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그를 따르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예수님의 교훈을 들었으나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이 예수님을 떠나서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기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은 알 것입니다. 곧 예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전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대속의 살 찢김과 피 흘림을, 바로 나를 위한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떡이 되는 것은,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대속의 죽음 때문애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에는 이미 이런 전통이 있습니다. 이웃과 화친을 하게 되면, 즉 평화의 관계를 이루게 되면, 양쪽이 함께 모여서, 식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들 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이웃에게 공표를 하는 것입니다.

해 아래 사는 모든 인생은 범죄함으로써, 이미 하나님과 원수가 된 존재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죄이고, 그런 형편에서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누리거나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존재는, 마치 줄기에서 잘려진 포도나무 가지와 같아서, 겉 모양은 산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은 이미 말라진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떡을 먹고 마시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죄 많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생명으로 연결되어, 다시금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5:10절에서 로마교인에게 말하기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화목하게 된 것은 저와 여러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펼쳐진 은혜 때문임을 믿고, 항상 주 앞에서 겸손하고,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배경과 관련해서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 6장 전반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는 표적을 행하자,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닌 목적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른 것이 아니라, 떡을 얻어 먹고, 육신이 배부른 까닭이라고 지적을 하십니다. 그래서 본문 26절에서 예수님은 지적하기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표적이란 가리키는 것이 있습니다. 표적은 마치 길 안내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길 안내판에만 시선이 쏠려서, 그 표지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예수님께서 당신이 바로 그 표적이 가리키는 실체라고 직접화법으로 말씀을 하지만, 자기 욕심에 사로 잡혀 있는 당시의 청중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를 못하고, 심지어는 예수의 곁을 떠나는 사람까지 생겨났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생각이 대부분 예수님이 아니고 다른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점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교회에 나옵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계십니까?

세상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여러분의 허전한 심령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을 채우기 위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고, 소망을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하지만 혹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은 요한복음 6:66절의 말씀처럼, 자신이 바라는 목적이 채워지지 않으면, 모두 낙심하고 시비하면서, 예수의 곁을 떠나가고 맙니다. 이처럼 예수의 말씀과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을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처음에는 세상적인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절대로 잊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영생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에게만 하늘의 놀라운 복이 약속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답게 언제나 예수님의 뜻만을 따라서, 살아가는데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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