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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 야곱 이야기(4) (창 27: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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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 야곱 이야기(4) (창 27:18-30)
 
성경에는 무너지는 가정이야기 한 편이 실려있습니다. 

요즘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라는 주말 드라마가 40%에 가까운 시청률을 보여주면서 국민드라마로 불리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어린 아들을 많은 세월이 지나 장성한 후에 되찾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이런 가족드라마에 반드시 필요한 구성요소가 있는데, 바로 가족에 대한 따뜻하고 진솔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긴장과 갈등이 있고, 다툼도 일어납니다. 때로는 시기와 질투도 뒤따라옵니다. 속고 속이는 가운데, 속임수를 넘어서는 재치와 지혜도 교차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흐름에는 늘 반전이 있습니다. 이 반전을 통해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고 그간의 오해가 풀립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쾌감도 느끼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과는 또다른 형태의 가족이야기입니다. 가정이 세워지는 따뜻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총감독과 연출도 있고, 주연배우, 조연배우, 그리고 엑스트라까지 등장을 합니다. 총감독과 연출은 어머니 리브가가 맡았습니다. 그녀는 이 모든 사건, 즉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도록 하는 일을 꾸미고 진행시킵니다. 그리고 리브가의 지도에 따라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주연배우는 야곱입니다. 조연배우는 아버지 이삭이고, 마지막에 엑스트라처럼 등장하는 인물은 형 에서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눈이 어두워져 앞을 잘 보지 못할 정도로 나이가 많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만을 탐하고 있습니다. 사냥꾼인 맏아들 에서를 좋아하는 것도,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잘 가져다주었기 때문인 것처럼 비춰지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영적인 판단력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의 대화가 단절된 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 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한 아들을 편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삭이 아들을 향해 “내 아들아” 라고 부르는 부분이 종종 나오는데, 이것은 작은 아들인 야곱에게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던 말입니다. 오직 큰 아들에게만 “내 아들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아들 야곱은 이삭의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가정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다른 아들을 편애합니다.

하루는 이삭이 큰 아들 에서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창세기 27:4)

내가 너를 축복하고 싶으니 내가 먹고 싶은 별미를 만들어서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내가 곧 죽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사건 이후에도 이삭은 수십 년 더 살아갑니다. 즉, 이 때는 죽을 때가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미 남편과의 대화가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맏아들 에서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는 남편을 속이기 위한 일을 꾸밉니다. 맏아들 에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될 속임수를 마련한 것이 바로 어머니 리브가인 것입니다. 리브가는 작은 아들 야곱을 부추깁니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창세기 27:13)

이번에는 어머니가 야곱을 “내 아들아” 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에게 “내 아들아”라고 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작은 아들 야곱에게 “내 아들아”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내 아들’이라고 표현은 하지만, 완전히 편이 갈라져 아버지는 큰 아들을, 어머니는 작은 아들을 ‘내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이 일로 인해 저주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마저 자신이 감내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떨까요? 야곱은 자기의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열등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생기는 열등감이 그의 삶을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어머니에게 쉽게 맡겨버렸습니다.

야곱은 형이 사냥을 하러 들로 나갔을 때,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속이는 일을 공모하게 됩니다. 물론 그가 복 받기를 간절히 원한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속이라고 했을 때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창세기 27:12)

마치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항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어머니와 함께 속임의 각본을 만들고 연기를 하게 됩니다. 그는 매끈매끈한 손과 목에 새끼 염소 가죽을 두릅니다. 형 에서는 털이 많았는데 동생 야곱은 매끈매끈한 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가 만든 별미와 떡을 들고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와 아들 야곱이 만든 완벽한 속임수였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어머니 리브가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이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록 리브가가 거짓말을 하기는 했지만 좋은 뜻으로 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한 것이라는 점에서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리브가가 쌍둥이 형제를 임신했을 때 그들이 뱃속에서 너무 다퉈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합니까?” 그 때 하나님의 계시가 들려왔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다” 리브가는 그 음성을 들은 후로, 언제 이 역전이 일어날 것인가 기대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리브가가 직접 개입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녀의 거짓말을 ‘거룩한 거짓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거짓과 불의조차 사랑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성경에서 리브가의 이름은 사라지고 맙니다.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야곱의 아내 라헬도 어떻게 인생을 마쳤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리브가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우리에게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곱 안에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이 없었습니다.

이제 야곱과 아버지 이삭의 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들 야곱은 별미와 떡을 가지고 이삭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내 아버지. 너무나 불러보고 싶었지만, 늘 형 에서에게 빼앗긴 이름이었습니다. 야곱은 그동안 아버지 곁에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첫 아들 에서만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토록 부르고 싶던 아버지를 부르면서도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주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아, 네 목소리 그대로 ‘아버지’ 하면 안 된다.” 그래서 그는 형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어디에도 자기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 속임수 속에는 그의 처참한 삶의 실존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자기를 향해서 “아버지”라 부르는 음성에서 의심이 생겼습니다. 늘 들어왔던 맏아들 에서의 음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려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확인합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창세기 27:18)

참 이상한 말 아닙니까? 여러분, 집에 가셔서 아들에게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라고 한 번 물어보십시오. 아마도 자녀가 ‘우리 아버지 미쳤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만큼 이상한 일입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가정의 딜레마입니다. 이 가정의 위기이고, 아픔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아픔인 동시에 아들의 아픔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에게 먹을 것을 가지고 오는 이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라고 처음부터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재차 “그런데 네가 도대체 누구냐?” 하고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창세기 27:21)

이번에는 아버지가 직접 아들의 몸을 만져보기를 원합니다. 분명한 확인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 다가온 아들의 몸을 만져보니 털이 있습니다. ‘털이 많은 건 에서인데. 음성은 야곱이고 몸은 에서라...’ 그는 이상히 여깁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또 한 번 묻습니다. 

이삭이 이르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창세기 27:24)

야곱은 계속해서 묻는 아버지에게 그 때마다 자신이 에서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축복권 하나 받기 위해서 “난 에서인데요. 야곱이 아닌데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정체성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오직 자신을 위해 축복받기 원했습니다.

결국 이삭은 야곱에게 맏아들 에서가 받을 복을 모두 내립니다. 그것은 지상의 복, 풍요의 복이었습니다. 지도자의 번영의 복이고, 탁월함의 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축복이 야곱에게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창세기 33장 3절 이하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게 될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야곱은 형 에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면서 “당신이 나의 주님”이라고 표현합니다. 결국 마지막까지 에서가 형이었고, 야곱은 동생일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본문을 더 자세히 읽어보면 속여서 얻은 축복은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야곱에 대해 ‘사기꾼, 교활한 자’ 라는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왔습니다. 분명히 야곱에게는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것은 그가 ‘불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토록 받고 싶었던 축복을 받았지만 그가 불쌍한 자일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삶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향해 달려온 멋진 인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는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바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이 채워지기를 원했습니다. 한 마디로 기복주의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축복과 기복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축복은 받으면 받을수록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서 쓰여집니다. 내가 받은 복이 주변으로 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복은 다릅니다. 나만 좋은 것, 나만 배부른 것, 내 것만 풍성해지는 것, 남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는 것, 이것이 기복의 핵심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인생을 보았을 때, 그 차이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복은 자기 자신만의 복으로 멈춰서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의 복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지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로 확대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사모해야 할 하나님의 복은 무엇일까요? 나 자신만을 위한 복일까요?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사모해야 하는 복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정체성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에서’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을 정도로 속마음이 공허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체성을 잃어버린 결과, 남의 것을 탈취하려는 도둑놈의 심보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그저 장자의 축복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바로 야곱의 한계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대로 인생을 살아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억눌려서 살고 있습니까? 젊은 시절에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본받으려고 하는 열심과 시도는 옳은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을 닮고 싶은 노력,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삶에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계속 위인들의 삶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나보다 잘나고 위대한 사람에게만 사로잡혀 있으면, 나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 나 자신의 모습은 상실한 채 끊임없는 열등감 속에 묻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세를 부리게 됩니다. 마치 힘 있는 것처럼, 유명한 자처럼 행세합니다. 속임수를 부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처음에는 아버지를 속이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이름마저도 도용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야곱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냥감을 잡았는지 묻는 아버지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내게 순조롭게 짐승을 잡게 하였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속임수에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복을 구한 것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선물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욕심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내 아들아, 너는 도대체 누구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에서”라고 대답하는 그 순간에 이미 숨는 자, 도망자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직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야곱과 같은 DNA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거부하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를 가장 거부하는 사람도,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가장 믿지 않는 사람도 바로 나 자신입니다. 스스로를 연민에 빠뜨리면서 자기를 속이는 자도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내 모습을 감사하며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유명한 인물이 되지 않았어도 말입니다. 배우처럼 멋지게 생기지도 않았고,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는 사람이 되지 못했어도, ‘나는 나다. 지금의 나로서 감사하다.’라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소중하다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받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의 그림자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림자는 싫어합니다. 내 속에 있는 어두운 모습은 내가 아니라고 외면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모두를 받아주십니다. 나의 잘함과 못함을 모두 받아주십니다. 

진짜 용기있는 사람은, 자기의 실수를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약점을 스스로 조롱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모자란 점을 유머러스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 말로 자신의 열등감에서 벗어난 사람이고,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사모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 그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내 손에 아무것도 쥐어주시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 되실 때, 우리의 삶이 새로워집니다.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물으십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네가 누구냐?” 그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들입니다. 딸입니다.”라고 대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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