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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신경 19 - 죄사함을 믿습니다. (엡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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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19 - 죄사함을 믿습니다.(엡 1:7) 
 

여러분은 기독교의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죄사함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저주가 죄로 인하여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모든 문제의 뿌리입니다. 뿌리를 제거하면 열매가 사라지는 것처럼 죄를 해결하면 죄로 인하여 발생한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보면 죄와 관련된 단어가 약 10가지 정도 나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마르티아’입니다. 이 말은 ‘화살이 과녁에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과녁을 향해서 날아가는 화살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모든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파라바리스’입니다. 이 말은 ‘줄을 따라 가지 못했다’라는 뜻입니다. 서커스에서 곡예사가 줄을 따라가지 못하면 떨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줄은 하나님의 명령을 말합니다. 죄란 하나님의 명령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셋째, ‘파라포토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미끄러져 넘어지다’는 뜻입니다. 자제하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랍니다.
   
넷째, ‘아노미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불법(不法)’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는 것이 죄란 말입니다.
   
다섯째, 본문에 나오는 단어로 ‘파랍토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정도에서 이탈함’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가 코스에서 벗어나면 실격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고의로 말씀에서 벗어났든 연약해서 말씀에서 벗어났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신경의 고백의 순서에 따라서 죄사함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신앙을 고백하면서 “죄를 사하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은 정말 중요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 안에는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1. 왜 죄사함이 필요한가? 
   
인간은 왜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까?

1) 죄의 보편성 때문에 필요하다.    
죄의 보편성은 세 가지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첫째,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익살맞고 장난기 있는 아더 코난 도일경이 친구들을 놀려먹은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는 사회에서 명성 있는 12명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모든 것이 드러났다. 곧 비행기를 타라”였습니다. 

그런데 24시간 안에 명성도 있고 지위가 있는 유명인사 12명 모두가 출국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높은 자리에서 큰 죄를 범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죄가 없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가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자기가 죄인 것을 몰라서 그렇지 사실 사람들 중에는 어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죄인임을 아는 죄인들 이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죄의 크기가 다를 뿐이지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은 원죄가 있습니다.
원죄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죄책과 부패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입니다. 아담이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원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바울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므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우리들 역시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자신의 가계에 대한 글을 쓰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성이 ‘옥’씨입니다. 옥씨는 고려시대의 왕족인 왕씨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전주 이씨가 반란을 일으켜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씨조선을 세우게 되자, 왕씨들이 완전히 몰살당할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쪽의 거제도나 북쪽의 함경도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서도 생명에 위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을 바꿔버렸습니다. ‘전’씨와 ‘옥’씨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그저 손바닥만한 논이나 밭을 개간해서 겨우 먹고사는 상놈 집안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옥씨 후손들은 이씨 조선 500년 동안 엄청나게 고생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옥씨 후손들은 억울합니다. 조상들이 이씨에게 나라를 빼앗겼는데 후손들이 옥씨 성을 쓰며 힘들게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태어나니 옥씨인데 어쩌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롭다고 외쳐도 죄인으로 태어났으니 죄인인 것입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셋째, 자범죄가 있습니다.    
자범죄란 원죄의 부폐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삶속에서 짓는 죄를 뜻합니다. 원죄는 원인이요 자범죄는 결과입니다. 보통 불신자는 원죄는 부정하지만 자범죄는 인정합니다. 자범죄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짓는 죄를 말합니다. 
 
2) 죄의 심각성 때문에 필요하다.    
왜 죄사함이 필요합니까? 먼저는 죄의 보편성 때문에 죄사함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죄의 심각성 때문에 죄사함이 필요합니다.
죄가 뿌리라면 그 뿌리로부터 열리는 열매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입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성경은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 죄가 기도응답을 방해하며, 죄가 우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는다고 말합니다. 죄 때문에 육체의 죽음도 찾아왔고 죄 때문에 영적 죽음도 찾아왔습니다. 인류의 모든 저주는 죄로 인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이 시급한 것입니다. 
 
3) 죄의 처리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 때문에 필요하다. 
죄사함이 필요한 세 번째 이유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범한 많은 죄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작은 죄마저도 우리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한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착한 일을 해도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고행을 하거나 수도를 해도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돈을 구제하는데 사용해도 여전히 죄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죄사함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2. 죄사함의 방법은 무엇인가? 
   
1) 구약의 방법은 짐승 제사이다. 
히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 제물을 가지고 나가서 제사를 드리므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속죄제의 제물을 보면 제사장이나 회중 전체는 수송아지를 드렸고, 족장은 숫염소를 드렸고, 평민은 암염소나 어린 암양을 드렸고, 가난한 사람들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렸고, 극빈자는 고운 가루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의 효력은 1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히 10: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2) 신약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다.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쏟아주신 이유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대신 고난을 당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속량이라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한 소년의 죽음을 통해서 은혜의 원리를 설명하였는데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미국 어느 지방의 철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느 날 한 소년이 철길을 따라 학교에 가다가 간밤에 내린 폭우로 철도가 끊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있으면 기차가 지나갈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기차를 멈추게 하지 않으면 수백 명이 희생당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차를 멈추게 할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기차가 지나갈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소년은 자기의 셔츠를 벗었습니다. 그리고는 책가방에서 작은칼을 꺼내어 자기의 다리를 찌른 후, 흐르는 자신의 피로 흰 셔츠를 물들였습니다. 소년은 피를 흘리면서, 피로 빨갛게 물든 셔츠를 흔들며 기차가 달려오는 쪽으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스톱!, 스톱!, 스톱!”
   
힘차게 달려오던 기차의 기관사는 다행히 그 붉은 깃발을 보고 기차를 세웠습니다. 기차는 소년 앞에서 멈출 수 있었습니다. 기관사가 뛰어내려와 보니 몇 미터 앞의 철도가 끊어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기관사는 기차길 옆에 쓰러져 있는 소년을 부축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소년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이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기차 속에 있던 승객들은 누구 때문에 살았습니까? 소년 때문입니다. 기차를 세우기 위해 자기 자신의 피를 흘린 소년 때문에 승객들을 살 수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소년으로 말미암아 살아났기 때문에, 소년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생명을 얻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3) 오직 믿음으로 속죄를 받는다. 
기독교는 믿음의 원리가 중요합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무리 진수성찬도 먹어야 배부르듯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은혜는 믿을 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ter)가 종교개혁을 할 때에 어느 날 서재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종이에 가득 쓴 것을 루터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 본 루터는 기가 질렸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맥이 탁 풀렸습니다. 자기가 오래 전에 지은 죄를 낱낱이 기록해 놓은 죄 리스트였습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리기까지 했던 죄를 빼곡히 다 적어 놓았습니다. 마귀는 그 뒷면을 또 보여주었습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요사이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귀는 비웃는 얼굴로 루터를 향해서 “이 기록이 모두 사실이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마귀는 루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런 더러운 녀석이 무슨 종교를 개혁해? 너나 좀 똑바로 살아라! 너 이 죄 값을 어떻게 할래?” 이때 루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있는데 뒤에서 분명히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있었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를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루터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 때 루터에게 롬 8:1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래서 루터는 새 힘을 얻어 크게 외치며, 책상에 놓여있던 잉크병을 들어 벽에 던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라고 외치자, 마귀는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을 때 우리는 죄사함을 받게 되며 마귀의 정죄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4) 연약해서 넘어졌을 경우 자백하면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어도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은 연약하기 때문에 또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한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다음에 그 죄를 어디에 갖다 두시지요?”, “얘야, 어제 네가 칠판에 그림을 그렸지?”, “예.”, “그 그림이 어디에 있니?”, “지우개로 닦았어요.”, “지우개로 닦은 다음에 그림을 어디에 두었니?”, “엄마, 칠판에 그린 그림을 지우개로 닦으면 없어지잖아요.”, “그래, 우리의 죄도 하나님께서 사하시면 없어진단다.” 할렐루야! 맞습니다. 따라 합시다. “내 죄는 없어졌다.” 우리 과거의 죄는 없어졌습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때때로 죄를 짓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때때로 실수합니다. 그 죄도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나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습니다. 우리는 죄가 해결된 사람들입니다. 
 
3. 죄사함의 범위 
   
주님은 어떤 죄를 사해 주십니까? 몇 번이나 사해주십니까?

1) 세상에 있는 모든 죄를 사해주신다. 
어떤 죄든 주님의 공로를 믿고 주님에게 나와서 고백하면 다 용서해주십니다. 
 
2) 죄의 경중도 상관없다. 
죄가 얼마나 크냐 작으냐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공로를 믿고 주님에게 자백하면 다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3) 횟수의 제한도 없다. 
사람들은 주님에게 죄를 자백하고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또 다시 그 죄를 범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우리는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을 찾는 것이 미안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면 주님에게 면목이 없어서 죄사함을 위한 기도를 하지 못하고 주님을 멀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주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작게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해서 반복적으로 죄를 범했어도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다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는 말은 무한한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4) 의도적으로 복음을 거부하거나 떠나 갈 때는 죄사함의 길이 없다.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아무리 좋은 음식을 차려놓아도 먹지 않는 사람을 배부르게 할 주방장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깨달았으나 복음을 거절한다면 그 사람은 죄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진리를 거부해버린다면 그 사람은 죄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4. 죄사함 받은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거저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떤 생활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까?

1)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은 회개하고서 또 다시 범죄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비유로 말해줍니다.
잠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거룩한 삶은 세상과 구별된 삶입니다. 거룩한 삶은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종이에 기름을 바르면 기름종이가 됩니다. 기름종이는 물에 넣어도 젖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기름부음이 충만하면 세상에서 사나 세상에 물들지 않는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 앞에 계시고 자신 우편에 계신 주님을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충만하고 그 결과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사과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얘야, 어디서 그 사과를 얻었니”하고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과일 가게에서요”, “아저씨가 주시던?” “아이요. 안 주셨어요,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갖고 왔어요”, “뭐?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셔.” 아이가 대답합니다. “괜찮아요, 가게에는 지붕이 있으니까 하나님도 못 보셨어요”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분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신전의식 속에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 때 성령의 충만하여 구별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2)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에게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기도문에서 주님은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3)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의 은혜는 한량없습니다. 무한정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깨닫는 깊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깨달은 만큼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어느 날 미국 뉴올리언스 노예 시장에서 경매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경매품은 아름다운 흑인 혼혈소녀였습니다. 경매자들이 평소처럼 입찰을 하는데, 소녀의 경매 가격은 계속 올라갔습니다. 경매 가격은 500달러를 넘고, 600달러, 700달러, 800달러, 1000달러를 넘으면서 서서히 경매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데, 갑자기 어느 신사 한 사람이 확신에 찬 소리로 “1,450!”하고 가격을 불렀습니다. 더 이상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소녀는 1,450달러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소녀를 사게 된 그 신사는 북부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소녀는 그 사람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 싫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자신을 1,450달러에 사게 된 신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사는 조그마한 종이쪽지를 주면서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와 함께 가기를 원하지 않는단다. 이 증서는 너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증서야. 이걸 받으렴. 너는 이제부터 종이 아니고 이제부터 자유인이야. 네 마음껏 살 수 있는 자유자란 말이야”
   
소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나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그 비싼 돈을 지불한 건가요? 정말 내가 자유의 몸이 된 건가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아요?” 그러자 그 신사는 “물론 너는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에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라고 말하자,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저의 남은 생애를 선생님을 섬기며, 선생님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저를 선생님 집으로 데려다 주지 않겠어요?” 소녀는 신사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원하여 신사를 위하여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만큼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 몇 종류의 신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두려움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아서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이런 신앙은 율법적인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은 하지만 그 마음에 기쁨은 없습니다. 언제나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입니다.
   
둘째는 축복을 위한 신앙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을 믿지만 축복이 목적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이런 신앙은 기복적인 신앙이며 신앙의 깊이가 없습니다.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환란이 오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런 신앙은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축복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고난도 연단도 주님을 위한 희생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져야 할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사함의 은혜를 믿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원죄를 사해주신 주님을 믿습니다. 자범죄를 사해주신 주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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