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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시나요? (렘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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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부족하다고 느끼시나요? (렘 1:4-10)

우리가 ‘레몬’을 생각하면 상큼함을 떠 올릴지 모릅니다. 레몬이 들어가는 요리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특히 생굴에 곁들인 레몬 향, 생선회를 먹을 때 레몬이 곁들여지면 비린내가 없어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중에 레몬만 덥석 씹어서 맛을 보신 분들이 있으신가요?
너무 신 맛이 강해 눈살을 찌푸리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속에 모두 레몬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레몬의 상징성을 여러분이 잘 이해할 필요가 있네요. 레몬은 아주 시죠. 그것 자체만 가지고는 별로 매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레몬을 바라보며 상큼함과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이유는 레몬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레몬이 무언가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그 무엇과 맛을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혹시 여러분은 자신이 소유하는 레몬 때문에 너무 시어서 이맛살을 찌푸려야 할 때가 있지 않았나요? 하지만 이제 이런 상상으로 말씀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너무 시어서 그대로 쓸 수도 먹을 수도 없지만, 어떻게 하면 멋진 맛을 낼 수 있을까? 새 봄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 속에 있는 레몬이 가장 멋진 맛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 중의 하나가 레모네이드입니다. 적당한 레몬의 향에 달콤한 소다가 섞여서 나오는 레모네이드,

저는 개인적으로 요리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떤 요리를 하든지 여러 가지 시도를 합니다. 한 번도 넣어보지 않았던 재료를 넣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발견한 것은 음식에는 아주 잘 맞는 궁합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개발하고 경험한 바로 ‘치즈’만 예를 들어볼까요?

고추장과 치즈, 치즈와 김치가 참 궁합이 잘 맞는 음식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김과 치즈가 잘 어울리구요. 삼겹살과 돼지고기에는 새우젓이 잘 맞는 궁합이지요. 홍합에 양파와 치즈를 함께 얹고 약간 오븐에 구워주면 아주 멋진 맛이 납니다. 특히 신라면에 치즈를 넣으면 매운 맛을 중화시켜 고소한 맛이 나고요. 김치 볶음밥에도 맨 마지막에 치즈를 얹어서 약간 녹이면 기가 막힌 맛이 납니다. 
결국은 무엇을 만나느냐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지지요. 여러분 안에 있는 신 레몬이 무엇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부족감

[레몬, 레모네이드를 꿈꾸다]의 저자 이재기는 인생의 신 레몬 중의 하나가 “부족감”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선지자가 있습니다. 모두 훌륭하게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사야와 더불어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유다왕 요시야 13년부터 시드기야 왕 11년까지 대략 41년간을 활동한 사람이었고,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면서 회개를 촉구했던 사람, 그 멸망할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41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예레미야 선지자를 처음으로 부르셔 소명자로 삼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반응이 무엇이냐면 “부족합니다.”라는 것이죠.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본문 4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라고 되어 있죠? 무슨 말인고 하니, 그는 지금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5절을 보세요.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사실 이쯤 되면 없던 자신감도 생겨야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여러분 중에 분명히 그렇게 말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를 부르시면 무조건 순종하겠다.” 
저는 종종 이런 말도 듣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직접 보면 믿겠다!"
"나도 신약성경에서처럼 예수님이 직접 죽인 자를 살리시는 것을 보면 믿겠다!"
그런데 성경을 보세요. 그 당시에 예수님을 직접보고,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도 믿지를 못하고 떠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부족감” 아니 “열등감”은 지금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도 거부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 부족감과 열등감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쓰게 만드는 것인지 아십니까?
바로 예레미야의 반응이 여러분의 반응이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6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니아다 하니"

여러분은 어느 때 부족하다고 느끼시나요?
많은 부모는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무력감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고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저 역시 그런 경험을 하지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일을 해도 오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볼까요? 
아름다운 선교회를 통해 많은 일을 합니다. 이 선교회를 만들 때, 저의 개인적인 목회를 돕는 선교회지만 저의 사적인 일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목회적으로 필요한 일을 위해 쓴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돈을 어떻게 쓰든지 분명하게 영수증 처리를 하고 장로님들을 통해 감사를 받게 하는데도 이상한 소문들이 들립니다. 그럴 때마다 무력감을 느끼지요.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수 있나 하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떤 사역의 중책을 맡았을 때, 대중 앞에 나서서 말을 하고 기도하고, 가르쳐야 되는 일 때문에 무력감을 느껴보시지 않았나요? 혹시 여러분이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학교에서 시작할 때마다 “부족함” 때문에 당황해 보시지 않았나요?
결국은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부족감이 우리의 삶과 사역을 무척이나 위축하게 만들고, 사역의 현장에 뛰어 들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 요인이 됩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문제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이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족감 때문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실 여러분의 삶에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인가요? 바로 그 어떤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바로 그 부족감이 여러분의 삶에 레몬은 아닌가요?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레몬을 레모네이드로 바꾸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예레미야의 부족감과 열등감을 사명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언이십니다.

“너는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의 부족감과는 달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7-9절의 말씀입니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아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너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더 이상 “아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영어 성경에 보면 예레미야야 스스로를 "I am far too young!"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 일을 하기에는 너무 젊다는 것이지요. 

당시 예레미야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불림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극도로 타락해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정치 9단인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버티는데 말입니다. 얼마나 무섭고 겁나는 상황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슬프도소이다”라고 표현이 되어 있지만. 실제 의미는 “두렵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상상이 가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의 한계와 모습을 바라볼 때 당연히 이런 생각, “부족감”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레미야야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관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레미야가 이 땅에 나오기 전부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아셨습니다. 그의 존재의 시작부터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네가 젊어서 무엇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완숙한 나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겸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겸손을 가장한 소극적 패배주의의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의 실패를 변명하려고 하고, 자신이 소명을 다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들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습 속에서 바로 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저는 “어리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래야만 제가 실수를 해도 변명할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지요. 물론 겸손한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내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왜 그렇습니까?
“네가 가는 곳은 내가 보내는 곳이요, 네가 말하는 것은 내가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권한을 위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신으로 보내시기 때문에 더 이상 젊다는 것, 어리다는 것, 그런 나이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적용해 봅시다.
여러분이 지금 해야 하는 일,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우연히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면 참 난감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난감해 하는 그 일을 누군가 계획하고 있으며, 그 일을 누군가 여러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결국, 우리가 느끼는 “부족감”은 우리의 삶의 근원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를 보내셨으면, 내가 필요한 것을 보내실 것입니다. 그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내게 필요한 사람, 인맥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아셨다’라는 히브리어의 ‘야다’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이 말은 단지 하나님이 예레미야에 대한 정보만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이 아니라 그를 좋아했으며, 사랑했다는 말을 포함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에게 ‘안다’라는 말은 무척 조심스러운 말입니다. 이 말은 성적관계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 만큼 친밀한 관계에서 모든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 대한 ‘청사진’을 이미 가지고 계셨습니다. 스스로는 갑작스러운 일이요, 부족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지요.
아주 좋은 찬양이 있어 소개합니다. 제목은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광야에서도 폭풍 중에도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이 세상 그 무엇 그 누구보다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너와 같이 있고 싶어 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광야에서도 폭풍 중에도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는 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부족감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예레미야는 노련한 정치가와 종교인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기는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8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도 이 땅 위에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실 때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가장 확실한 약속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아닐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참 많은 날을 “무신론자”처럼 산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데 우리의 삶의 현장에 계시지 않습니다. 위협적인 대상이 나타나면 오히려 능력이 되셔야할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낯선 직장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칠 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일을 개척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직장 상사를 만날 때, 때로는 새로운 사역의 현장에서 환경에 압도당할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자신이 약하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메뚜기 콤플렉스’라고 말합니다. 지나친 두려움, 상대방 앞에서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나 자신이 메뚜기처럼 작게 보이는 것을 일컫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 우리의 신 레몬을 레모네이드로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본문 9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손을 내밀어 입에 대셨다는 것은, 아마도 더 이상 예레미야가 부정적인 말,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막으신 것 같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만!”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나님의 말을 예레미야의 입에 두었습니다. 이제 예레미야가 하는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 될 것이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 두는 순간 마치 ‘파워 스위치’를 켠 것과 같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전자제품에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제품이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전기가 들어오는 순간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과 불편에 대하여 “그만”이라고 말씀하시며 파워 스위치를 켜셨습니다.

파워 스위치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가 선지자로서 불림을 받았는데 그의 가장 부족한 부분이 말을 못하는 것이지요. 바로 그 부분, 예레미야의 가장 부족한 부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손을 대신 것입니다. 선지자로서 필요한 은사와 재능과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니,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아픔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 일어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 말씀을 보세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오늘 여러분의 부족감과 열등감으로 스스로 상처를 받고 자기 방어적이 되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부족하다는 마음은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용납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내가 채워지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그래서 사역을 하면서 남 몰래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혼자 상처를 받고 쓴 맛을 감추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번 여러분의 부족감이라는 레몬을 자신감이라는 레모네이드로 바꾸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가장 부족한 부분을 채우시는, 그 부분에 손을 대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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