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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 (딤후 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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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 (딤후 2:20-21)

 
예로부터 사람을 그릇에 비유합니다. 아량이 넓은 사람을 보고는 “그 사람은 그릇이 크다” 하고, 아량이 좁은 사람을 보고는 “그 사람은 그릇이 작다”고 합니다. 또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그릇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도 사람을 그릇에 비유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의하면, 교회를 큰 집에 비유하고 신자들을 그릇에 비유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서 대 가족을 이루고 있으므로 큰 집입니다. 큰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이 있을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다고 했습니다. 금 그릇과 은 그릇은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상에 올립니다. 그리고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은 귀한 상에 올릴 수 없고 천한 일에만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큰 집인 교회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섬기고, 또한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에 쓰임 받으려면 귀한 그릇이라야 합니다. 출애굽기 25장을 보면, 성막에서 사용하는 대접과 숟가락과 잔, 촛대는 물론이고 불집게와 불똥 그릇조차도 다 정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된 금 그릇과 금 기구들은 곧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진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신자들은 지금 상태가 어떠하던지 간에 금 그릇이 되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그릇의 재질은 바꿀 수 없습니다. 질그릇은 언제나 질그릇일 뿐이지 금 그릇이나 은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금 그릇과 은 그릇이 질그릇이나 나무 그릇이 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질적인 변화가 가능합니다. 나무 그릇과 질그릇에 불과한 신자가 은 그릇과 금 그릇으로 뱐화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 반대로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21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로,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곧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 영적 신분은 우리의 실수로 취소되어 다시 지옥 백성이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정작 할 일은 영혼의 구원을 받은 이후에 가능합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부탁하기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강도는 단지 주님께 자기의 운명을 부탁한 것밖에 없지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은 이 강도를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강도는 구원을 받았지만 비유하자면 건물이 불타는 가운데서 겨우 구출 받은 사람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귀한 세월을 허탄한 일로 허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임 받지 못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 살았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금 그릇과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귀하게 사용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분들이 자기를 깨끗하게 준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릇에 음식을 담으려면 일단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므로 그 심령이 정결하지 못하면 쓰임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을까요? 먼저,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탐심은 우리의 마음을 더럽힙니다. 성경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빈 손으로 왔듯이, 이 땅을 떠날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지 말아서 그릇을 더럽히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베다니 마을에서 유숙하셨습니다. 그 날 저녁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 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자 참석한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를 알아차리고는 노한 음성으로 말하기를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합당한 말을 한 것 같지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고 하였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가득찬 가룟 유다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돈이 들어오면 그것을 훔쳐갈 수 있었는데, 그만 무산되고 말았으니 화가 났던 것입니다.

한편,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고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마리아는 주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거룩한 일에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집에서 귀한 그릇이 되려면 명예욕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무슨 선행을 할 때는 반드시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만 했습니다. 구제할 때나 기도할 때에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많은 사람들에게서 신앙심이 좋고 선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슨 선을 행하든, 교회에서 봉사를 하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명예욕으로 마음의 그릇을 더럽히는 일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의식해서 봉사하면 봉사한 후에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고 봉사하면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상관없이 마음이 기쁘고 봉사를 할수록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성도들을 깨끗한 그릇으로 보시고 더욱 귀하게 사용해 주십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으려면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6)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오물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거스틴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세상 정욕에 사로잡혀 살적에는 더러운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회개하고 모든 정욕을 버리고 정결한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위해 금 그릇처럼 귀히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귀히 사용하신 사람들은 하나같이 겸손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모세를 보세요. 그는 히브리인이었으나 애굽 왕 바로의 공주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모세를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모세는 자기의 수완으로 동족 히브리인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보려고 하다가 살인을 하고 광야로 도피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40년 동안 목자가 되어서 미디안 광야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습니다. 야망에 불타던 젊은 모세는 어느덧 팔십 노인이 되었고, 그 동안 모든 교만이 깨어졌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겸손해 졌든지 하나님께서 호렙 산의 떨기나무 불 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를 불러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킬 사명을 주셨을 때 사양하기를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는가 하면,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모습은 지난날 자기 능력을 믿고 동족을 구출해 보겠다고 나섰던 때와는 너무도 판이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능력이 부족해도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사람에게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인간들에게 신세를 지실 리가 만무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손이 없으시니 우리의 손이 필요하시다. 

하나님은 발이 없으시니 우리의 발이 필요하다. 또 하나님은 입이 없으시니 우리의 입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 조금도 필요치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운행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의 말은 능이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손은 힘이 없으나 하나님의 손은 전능하십니다. 우리의 귀는 너무 크거나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생각조차도 다 살피십니다. 우리의 눈은 너무 작은 것을 볼 수 없으나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폐부를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릇으로 사용하실 때 감당할 힘을 더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직분을 주실 때 “저는 너무나 부족해서요.”라고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고 나아갈 때 모든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제비를 뽑아 사울을 왕으로 선출하였는데 사울은 너무 황공해서 짐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울을 귀히 보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 그만 교만해졌습니다. 아말렉 족속을 쳐서 모든 것을 다 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아각 왕을 살려두고, 살진 소와 양들을 살렸습니다. 사무엘이 이 사실을 알고 책망하자 회개하지 않고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3)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교만해 지면 쓰임 받다가도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 18장 12절에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집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실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건성으로 하지 않고 정성을 다합니다. 반면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눈가림으로만 합니다. 남이 볼 때에는 열심히 일하는 척하고, 혼자 있을 때에는 태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불꽃같으신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겼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을 불러 회계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주인이 말하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종도 와서 말하기를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말하기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와서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주인이 노하여 말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각자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받은 달란트의 분량이 다를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부지런히 장사해서 이를 남겨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는 저마다 맡은 직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교회학교 교사로서, 또는 성가대원으로서, 또는 남녀선교회 임원으로서, 또는 구역장으로서, 또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권사로서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 같은 직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입니다.

그러므로 성실한 마음으로 직분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겨우 이런 직분을 주다니” 하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에서는 모든 직분이 하나같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직분의 경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 직분에 성실한가를 보십니다. 

비록 작은 일을 맡았을지라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십시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주님께서 더 큰 일을 맡겨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성실하고 충성을 다할 때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실 것입니다.

네 번째로,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덕을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화목한 분위기를 위해서 서로 양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인정받고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덕을 세우려면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 우리 교회는 주님을 모신 천국이 될 것입니다. 또 사랑의 눈으로 상대방을 보면 인간적인 약점과 허물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어느 것 하나 약점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권하기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에서 덕을 세우려면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실수할 수도 있고, 혹은 상대방이 잘못 알아듣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덕이 되지 않는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덕을 세우는 말, 은혜로운 말을 하기에 힘쓸 때 하나님께서 귀한 그릇으로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큰 집 곧 하나님의 집에 있는 그릇들입니다. 그릇은 인간관계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의 역할에 중점을 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에서 어떻게 쓰임 받느냐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집에서 사용하는 그릇은 한 번 금 그릇이면 영원히 금 그릇이고, 한 번 질그릇이면 영원히 질그릇이지, 질그릇이 금 그릇으로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 있는 그릇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성도들의 신앙 상태에 따라서 금 그릇도 되고 은 그릇도 되고 나무 그릇도 되고 질 그릇도 됩니다.

어제는 나무 그릇이었지만 오늘은 금 그릇이 되기도 하고, 어제는 금 그릇이었지만 오늘 와서는 질그릇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다 성도님들이 저마다 자신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은 먼저 자신을 깨끗이 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며, 작은 일에나 큰일에나 성실하며, 화목하고 덕을 세우심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하나님께 귀히 쓰이는 금 그릇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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