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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잔치하시는 하나님 (사 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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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사야 25장 1-8절     
제목/잔치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 무엇인지 잘 아시지요? 조선시대 왕들의 계보입니다. 태조, 정종, 태종, 세종......학교에 다닐 때 달달 외웠던 내용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역사를 좋아해서 이런 것을 외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조선 시대 역사를 기록한 대표적 저술은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입니다. 이런 방대한 역사를 남긴 우리 선조들의 집념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나 왕조실록은 치명적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실록만으로는 진정한 조선의 역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실록에는 이름 그대로 왕조의 역사만 있을 뿐, 일반 백성들의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다 보니 당시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이 어떤지 잘 모릅니다. 세상을 개혁하기 위해 일반 백성들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역사는 힘 있는 강자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강자들이 만들고, 강자들이 기록하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960년 이후 역사학계에서는 잊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조선 시대 조폭의 역사, 기생들의 역사, 조선 농업 발전사 등을 다룬 책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역사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강한 자들의 역사요, 다른 하나는 약한 자들의 역사입니다. 강자들의 역사는 그들이 어떻게 강해졌는지, 그리고 그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약자들을 정복하고 엄하게 다스려왔는지 등을 다룹니다. 반면에 약자들의 역사는 그들이 어떻게 약자로 전락했는지, 얼마나 수탈과 억압을 당했는지, 그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등을 다룹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두 역사 중에서 어떤 쪽에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요? 언뜻 생각하면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 등은 왕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강자들의 편이 아닌가 생각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자들의 편도 아니고, 약자들의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공정하십니다. 왕들이라고 무조건 편을 들어 주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무수한 왕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강자>들은 칭찬하셨지만, <악한 강자>들은 가차 없이 내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약자 편일까요? 그렇지도 아닙니다. 일반 백성들이 권력층과 부화뇌동하여 함께 죄를 범할 때 강자와 함께 약자들도 심판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강자의 역사도 약자의 역사도 아닌, 당신의 뜻을 따른 정의의 역사를 세워 나가셨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강자들의 나라도 아니요, 약자들의 나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살고자 애쓰는 신실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강자인지, 약자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가> 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사 과정을 살펴보면 대개 강자들이 약자들 보다 더 많은 악을 자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칠 것 없이 악을 자행할 도구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 재물, 지식, 제도 등이 그들의 악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약자들은 가진 것이 분노한 가슴과 입 밖에 없었기에 그들의 죄악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악은 강한 자들이 약자들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했습니다. 힘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자들의 재산과 권리와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이러다 보니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하나님>이 되시고, 약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신 일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과 그 백성들은 강자요, 이스라엘은 약자였습니다. 그 후에도 바벨론에 포로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셨는데, 바벨론은 강자요, 끌려간 유다 백성들은 약자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약자들에게 전하신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본문은 악한 강자들을 심판하시고, 연약한 이들을 도우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위대하고 거룩하신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이 축복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찬송을 올립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약자들에게 성실하고 진실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인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 있는 이들에게는 친절하고, 힘없는 이들은 거칠게 대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자들에게도 성실하고 진실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옛적에 정하신 뜻이란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따라 악한 강자들, 악한 왕들, 악한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고통 받던 사람들을 건지셨습니다. 

2절은 악한 강자들을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2절을 다같이 읽읍시다.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아멘. 여기서 <성읍>이란 성곽으로 둘러싸인 고대 도시들을 말합니다. 강한 자들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쌓아올린 성들은 당시 문명과 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무너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외인의 궁성이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는데, <외인>이란 악한 이방인,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땅을 침략했던 주변의 강한 나라들, 앗수르, 바벨론 등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라들의 성읍이 무너질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들의 성읍이 무너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하던 교만한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 할렐루야! 강하다고 교만하던 이들이 이제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항복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을 전하는 <이사야 선지자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강자로 여겼을까요? 아니면 약자로 여겼을까요?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왕족으로서 웃시야 왕의 사촌이었습니다. 그는 웃시야 측근에서 권력을 함께 누렸습니다. 그는 약자의 고통을 모르는 강자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게 된 것은 권력을 누리면서 세상에 부러운 게 없이 살 때가 아닙니다. 그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었다>는 것은 그의 모든 권력의 기반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더 이상 강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그 해 그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위엄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그는 그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 대목에 대해 이사야서 6장 1-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 때 이사야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6장 5절을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높은 이들과 함께 하면서 정치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나니, 자신이 누렸던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궁궐에서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들은 더러운 음모일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자신도 입술이 부정한 죄인일 따름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월의 권력과 영광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권력 때문에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죽게 되었다고 탄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권력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낮아진 모습으로 엎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보잘것없는 권력 때문에 으스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더 이상 강한 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약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오면서, 엎드려 기도하면서, 그 마음이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맞장을 떠도 될 정도로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옆 자리의 동료 교우들에 비해 자신을 강자로 여기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한 약자로 하나님 앞에 나오셨습니까?  저는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약자가 되길 원합니다. 이사야가 제단 위의 숯불로 입술이 정결하게 된 것, 선지자의 소명을 받은 것은 자신의 추함과 연약함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이사야의 인생이 꽃을 피우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을 약자로 여겼을 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원리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약자로 여기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본문 4-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 아멘.  
 
여기 <빈궁한 자>와 <가난한 자>란 약자들을 의미합니다. 특히 빈궁한 자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는 <어떤 강한 존재에게 매달려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를 말합니다. 약자들은 비굴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강자들에게 의지해서 그들의 자비를 구걸하면서 삽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세상의 강자들에게 매달려 살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포학자의 기세가 폭풍 같을 때 빈궁한 자의 요새>가 되십니다. 
 폭풍 중의 피난처이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십니다. 

여기서 <폭풍>과 <폭양>은 정반대 개념입니다. <폭풍>은 갑자기 솟아나는 물, 쏟아지는 소나기, 갑자기 불어난 홍수를 의미합니다. 지반이 약한 사막 토양에서 갑자기 불어난 홍수는 치명적입니다. 반면에 <폭양>은 뜨겁게 내리쪼이는 햇빛을 말합니다. 한 방울의 물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말라버린 가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홍수에서도, 가뭄에서도 약자들에게 피난처요, 그늘이 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약자들에게 힘이 되십니다. 
 
성경은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사르밧 땅의 과부의 집에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신 하나님, 앗수르 군대로부터 예루살렘을 구원하신 하나님, 혈루증 여인의 질병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이야기, 굶주린 무리를 먹이신 예수님.....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약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본문은 하나님께서 약자들을 위해 잔치를 여신다고 말씀함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파티, 연회, 잔치는 가난하고 빈궁한 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강자들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6-8절은 하나님의 잔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도 천국을 혼인 잔칫집에 비유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메뉴로 상을 차리실 것입니다.그리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 즉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게 방해하던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약한 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강자들이 약자를 위협할 때 많이 쓰던 <죽음의 위협>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사망이 멸망되어 사라집니다. 더 이상 <너 죽인다!>는 위협이 통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 잔치는 생명의 잔치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나누고 있는 말씀은 당자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6절은 잔치가 <이 산에서> 열릴 것이라고 했는데, 이 산은 지난 주일에 생각한 <시온산>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온산은 주님의 교회입니다. 땅끝교회가 잔칫집이 되길 원합니다. 모여올 때마다 영적으로 배부르길 기원합니다. 이곳에서 세상의 약자들인 우리들의 눈물이 닦아지고, 새 힘을 얻게 되고, 우리를 도우시는 여호와께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되길 원합니다. 그 감격으로 세상을 이기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잔치는 천국의 잔치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잔치에 참여하고, 마지막에는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그 천국의 식탁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연약합니다. 힘들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못나고 연약하다고 여기면서 깊은 열등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편입니다. 허덕이면서, 때론 울면서, 때론 쓰러져 고통 받는 우리 편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피하십시오. 그 그늘에서 쉬십시오. 그 능력으로 치유 받으십시오. 그 공급하심으로 윤택하게 되십시오. 하나님 앞에 눈물로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 약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시고, 잔치를 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면서 기쁨으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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