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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의롭게 판단하라 (요 7: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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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롭게 판단하라 (요 7:14-24)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바보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바보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욕심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가 있었습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설렁탕을 끓여서 팔았습니다. 뭐든지 최고급 재료를 썼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골 3:23의 태도로 장사했습니다. 하루는 뼈를 끓이는데 하얀 국물이 나오지 않고 검은 국물이 나왔습니다. 나쁜 품질의 뼈가 들어온 것입니다. 도저히 장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뼈를 판 사람에게 연락했더니, 사과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딴 집 갈 게 잘못 갔네요. 

오늘만 커피 프림 타시지요.” 아마도 커피 프림을 타면 검은 국물이 하얀 국물로 변화되는가봅니다. 재료를 다 버리고, 정문에 이렇게 붙였습니다. ‘오늘은 재료가 나빠서 장사하지 않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욕심을 이긴 지혜입니다. 바보는 절대로 이것을 못합니다. 눈 앞의 이익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토끼를 키웁니다. 종종 토끼에게 먹을 것을 주러 갑니다. 그런데 나를 무서워합니다. 어리석게도 자기를 도우러 가는데 도망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러 오시는데 나는 도망칩니다. 욕심에서 나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 것 같지만 내게 손해되는 행동입니다. 강아지를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왜? 그를 사랑해주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단지 기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보는 기뻐하지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바보는 단지 두려움 속에서만 살아갑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고 시14:1은 말씀합니다. 

바보는 선의를 가지고 남을 돕지도 못합니다. 도우려면 내 입장을 버리고 상대 입장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절도 전달됩니다. 얼굴 밑에 화상을 입은 자매가 있었습니다. 아픔과 낙담으로 괴로워할 때, 어떤 성도가 위로해주려고 했습니다. 담당 목사에게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사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는 자기가 쓴 ‘자신감’을 추천했습니다. 속으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쓴 책을 추천할 수 있는가 하며 분노했습니다. 

서점에 갔더니 ‘지선아 사랑해’는 잘 팔려 품절되었고, 그 목사의 책은 쌓여 있었습니다. 기분 나쁘지만 할 수 없이 그 목사의 책을 샀습니다. 화상으로 고통당하는 자매에게 포장된 책 선물을 주었습니다. “혹시 ‘지선아 사랑해’ 아니죠?” 뜨끔했습니다. 사려던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야. 이 책은 ‘자신감’이야.” “감사해요. 나는 또 그 책인 줄 알았어요. 그 책은 이미 16권이나 받았어요.” 자기 욕심, 자기 입장에서의 선물은 오히려 짐이 될 때가 많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모든 지혜에 뛰어난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 상 4:29~3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보다도 뛰어납니다. 
그러기에 누가 슬기로운 자가 될 수 있는가 하면 세상의 지식으로 우리의 생각을 채우는 사람보다는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허락하여 주신 자입니다.
엡 1:8은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넘치게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과 명철도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배워야 하고 계속해서 지식을 쌓아나가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지혜와 총명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어 능히 맡겨진 직분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아니 사실은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 자신이 지혜와 총명의 주님이십니다.
이사야 11:2은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릴 적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2장에 나옵니다. 예수님 열두 살 되었을 때 부모와 함께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한데 돌아오는 길에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친척들과 함께 있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사람들 주에서 찾되 찾지 못합니다. 그래 놀라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증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4~15절이 기록합니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세상 해 아래에서 주고받은 것, 그것을 초월하는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천국 복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그는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성전에서 주로 지도하고 있던 랍비들이라든지 서기관들이라든지 또 제사장 혹은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서 “참 신기하도다. 저는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어떻게 성경을 아느냐?” 이들의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정규적인 신학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학을 하지 아니했는데 어떻게 성경을 아느냐? 성경을 누가 가르쳐주지 아니했는데 어떻게 아느냐? 우리들의 자녀들 우리들의 제자들은 우리의 가르침을 받아서 겨우 아는 것이니 스승을 능가할 제자가 없지 않느냐? 그런데 예수는 배우지 아니하고 어떻게 저렇게 놀라운 진리를 말할 수 있느냐?” 그것이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많은 말씀들을 예수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라고 하시면서 기록된 구약의 말씀을 착착 갖다 들이댑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두루 마리를 읽었느냐?” 우리의 생각으로는 ‘공부를 열심히 했겠지’ 머리 좋으시니까 혹은 ‘그저 한 번만 보아도 알겠지’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부해서 안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공부를 하지 아니했거늘, 글을 배우지 아니했거늘 어찌 이 모든 것을 아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이 땅에 와서 한 말은 내 자의로 한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친히 말씀했습니다. “모두 다 내 아버지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를 말을 내 아버지께서 내게 일러 주셨으니 나의 한 말은 나의 아버지의 것이니라. 내 이름도 아버지께서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요,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다”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많이 배운 사람이 찾아옵니다. 부자 청년이 찾아옵니다. 율법도 다 지킨 사람, 성경도 다 읽은 사람, “네가 이 계명들을 지켰느냐?” “예, 어려서부터 듣고 배우고 그대로 또 다 지켰나이다.” 그런 사람이 주께 찾아와서 영생을 묻는 것입니다.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 그리고 유대인의 선생이요 관원이었던 니고데모 같은 사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는 아는 것이 많았습니다.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더 배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기의 이 해 아래에서 배운 모든 실력은 무엇을 알려고 했느냐? 더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그런 길을 여는 것이 배움인 것입니다. 서푼어치 배운 것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가지고 더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살펴보십시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공부 다 했냐? 시험 치룰 준비 다 했냐?’ 그러면 ‘엄마 아직 멀었어요. 아직 진도가 반도 안 나갔어요. 큰 일이예요. 깨워주세요.’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공부하지 않고 그저 친구들하고 놀고 점수가 낮은 아이들은 ‘잘했느냐?’ 이렇게 물으면 ‘예, 공부 다 했어요’ 합니다. 시험 치고 난 다음 ‘잘 쳤느냐?’ 물으면 ‘아버지, 어머니 이것도 놓쳤어요. 이것도 놓쳤어요’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예, 잘 쳤어요!’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한데 그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공부하지 아니한 사람은 시험 칠 것이 하나도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아는 게 없으니 무엇을 모르는 줄을 모르는 것이지요. 자녀 키워보십시오. 다 나타납니다. 공부 다 했다는 놈, 그것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까? 얼마만큼 다양한 과목들이 있고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내게 도전해 온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다 했다는 겁니다. 거짓말하지 않아요. 순진합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볼 때에야 착한 것들이지요. 공부 안하는 놈들은 다 했다 합니다. 안하고도 다 했다 합니까? 하라 하면 할 것이 없으니까 뭡니까? 그저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공부는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하면 할수록 내가 부족한 줄을 아는 것입니다. 여물이 차면 찰수록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배워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인격이 쌓여지면 어찌 내가 잘났다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부끄럽지요. 
우리가 해 아래에서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하고, 또 해 아래에서 이 세상 지식을 많이 쌓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 것만 가지고는 못산다는 것을 발견하는 부자 관원과 같이 니고데모와 같은 수준에 올라가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나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 귀한 것을 배우려고 사모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배운 것으로 만족할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떡 같은 것은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물 같은 것은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들풀도 키우시고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먹고사는 것 거기에 너무 매달리지 마십시오. 적어도 하늘을 쳐다보는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으로 살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으나 동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 뒤집어쓰는 것, 들어가는 집 그것만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온 분이 있다면 좀 부끄럽게 여기시고, 영원한 내 아버지 집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떡만 아는 사람은 떡을 주고 오늘 또 다시 와서 주님께서는 재차 왔기에 생명의 말씀을 진리를 주어 보려고 하니 “그 말씀 때려치우고 어제 먹은 떡을 주소서!”라고 하니 그것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스승으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러므로 그에게서 이 세상 수준의 떡만 구하지 마시고 떡이나 마실 물을 주께서 이미 주실 것이니, 열심히 일하면 받아먹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으니 성실히 일하고 정직하게 하면 그 대가로서 얼마든지 먹을 것이니,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오해해서 '주님께서 주셨으니 가만 누워있으면 떨어지지 않겠는가, 직장가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하면서 밤낮 집에 있으면서 기도만 하고,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면 날름 받아먹으려고 입만 벌리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분도 있어요. 그런 사람을 두고 누가 이런 조언을 하대요. 이런 충고를 하대요. 감나무 밑에 가서 드러누워도 하루 종일 여름 다 지나가도록, 가을 되도록 까지 있어도 네 조그마한 입에 감 하나 톡 떨어져 들어가기는 참 어렵도다. 그러니까 “삿갓을 뒤집어서 구멍을 내서 뒤집어서 나팔을 만들어 있어라. 그러면 그 정도라도 하면 굴러 들어갈 것이다.” 그래요. 위에서 얼마든지 감이 많이 열려 있어도 내가 노력해야 받아먹는 겁니다. 손을 들어 따야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많은 물질을 깔아 놓았습니다. 여러분이 적어도 먹고 입고 마시고 사용할 집은 충분히 얻을 수 있도록 일만 하면 갖다 쓸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우리의 노력은 무엇입니까? 갖다 쓰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수준에 걱정하는 세상 사람 수준이 되지 마시고, 예수의 제자가 되신 여러분은 해 아래 선생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그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여러분의 생각과 눈높이가 높아지시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가득한 우리요 우리들의 자녀들이 다 되심으로 풍성한 은혜 가운데 허락하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모든 것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공의롭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남의 유익을 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없다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이 메말랐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줄을 압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다고 하게 마련입니다. 교회마다 사랑이 없다 소리가 가득 찼다는데, 우리 교회는 과연 어떠합니까? 

사랑이 넘치나요? 물론 보기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우리기리는 너무도 사랑하는데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그 사랑 안에 들어오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만의 사랑이 아니라 혹시 우리 가운데 소외 되는 사람이 없는가 돌아보시고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주고 말 벗이 되어 주고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모든 것은 자기 할 탓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낯선 곳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따지고 보면 우리들 가운데 힘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수고롭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냔 말입니다. 어찌됐든 우리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생각을 합니다마는 혹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가책이 되는 분이 있으면 사랑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 것입니다. 남의 약점을 덮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이 없기 때문에 누가 잘못한다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 있는 사람이 사랑을 받고, 인격 있는 사람이 인격을 받고, 감사를 배운 사람이 감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4:6에 보니 이 세상이 망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 해 아래에서 배운 사람들이 그 스승의 배운 것만으로 이 세상을 인도해 가려고 하니 이 세상이 망한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일 지식이 없더라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일 지식이 없으니 이 세상이 망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예수를 아는 지식이 없었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나다나엘을 보십시오. 빌립의 요청을 받아서 왔던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말하기를 “메시야를 만났다. 당신도 가서 메시야를 보자.” 라고 했더니 “그가 어디 사람이냐?” 묻습니다. “나사렛 예수라.” 하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그랬습니다. 그 사람은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의 실력 속에는 뭡니까? 공부를 해보니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난다라고 되어있는데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면 아니지 않느냐?” 그랬습니다. 그러나 “와 보라”해서 같이 갔습니다. 가보았더니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고 있어도 그는 베들레헴 태생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도, 진리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도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없으면 우리는 악신도 참신인지 알고 받아들이고, 성령도 악신인줄 알고 쫓아내게 됩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실 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되기 위하여 배우시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해 아래에서 열심히 배우고, 교회에서 열심히 배워야 되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해 아래에서 배우지 아니한 자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 해 아래에서 열심히 배워야 되는 것이니, 성경을 많이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가르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단순히 인간적인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학문이나 학설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권위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보면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인간 예수님의 겸손과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보내지신 이상,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높이면서 사셨습니다. 속된 인간은 좀 괜찮은 일을 해 놓으면 반드시 그 공로를 자기의 것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힘이 있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왜 힘이 있고 권위가 있었습니까? 그 까닭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교훈을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천사처럼 말하고 유창하게 설교해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교훈을 말하지 않으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교훈은 힘이 있습니다.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교훈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을 살립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조금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교훈은 진실했습니다. 권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 말씀 속에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배워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을 배워야 잘 살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뜻을 행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영광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대에만 있었던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에만 급급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면 결국 교회에 대해서나 지도자들이게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트집을 잡고 흠을 들춰내기에 정신을 못 차립니다. 남의 말과 행동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순 자신의 생각의 잣대로 남을 비판을 합니다.
어리석은 판단과 비판은 결국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하고 그것도 뜻대로 안 되면 그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려고 합니다. 

보십시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유대인들에게 주었습니다.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형제의 잘못을 보면 비판이나 했지 결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범하거나 간음죄를 지으면 가차 없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겠습니까? 그들 가운데 돌로 칠 수 있었던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미움의 극치는 살인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유대인들 마음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반박합니다.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자신들의 음모와 비리를 폭로하니까 할 말이 없지요. 그러니 결국 한다는 말이 예수님보고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교훈의 바른 정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행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믿음의 지식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손해가 오고 불편한 일이 생겨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고 판단되면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가차 없이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저와 성도 여러분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우리 중에 있습니다.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교훈을 배운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심코 연못에 던진 돌멩이 하나에 개구리가 머리통을 맞아 죽었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의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힙니다. 우연히 들은 한마디의 험담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 다니면서 결국 그 사람을 죽입니다. 비판하는 말 한마디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줍니다. 경솔한 판단이 형제의 머리통을 때리는 돌멩이가 되고,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폭발물이 되어 폭발합니다. 한마디의 비판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미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복음입니다.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교훈입니다. 결론의 말씀이 24절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형제나 자매를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여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매이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개미 집 속에 타고 있는 초를 세워 놓으면, 개미는 친구들을 돕기 위해 그 타는 불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개미는 불 속에 몸을 던집니다. 그래서 개미집도 지키고 친구들의 생명도 지켜줍니다. 그러한 희생적 행위가 개미 나라를 곤충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이 되게 한 것입니다. 
남미에서는 개미에게 숙소를 주고 개미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식물도 있다고 합니다. 희생 행위만큼 무섭고 강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온갖 자기 이기주의에 빠져 자기를 위해 남을 죽이고 심지어 가족까지 죽이는 패륜의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개미는 본능적으로 내어줌의 사랑을 실천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기에 더욱 내어줌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작은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친히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드니? 너 보라고 한 거야.”
사랑으로 가득한 가슴을 가지고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심으로 보이는 모습 이상으로 가슴이 더 따뜻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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