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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 젖은 빵, 생명의 밥 (요 6: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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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빵, 생명의 밥 (요 6:24-35)


갈릴리 바다 건너 산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푸짐한 식사를 했던 사람들이 가버나움으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물론 함께 식사를 했던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이동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열의가 넘치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갔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그런 열성적인 태도는 칭찬할 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심으로써 그들을 서운하게 만드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배불리 먹고 흩어져 버린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열심히 주님을 찾아왔는데 왜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요한복음 기자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요한복음 기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미 공관복음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서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굶주린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은 사건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주신 떡은 하늘 양식이요 그 떡은 메시야의 신분을 밝히는 생명의 떡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떡을 먹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영적인 의미를 그들은 깨달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주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을 삼으려고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피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또한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떡이나 빵, 또는 밥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 끼 식사를 가볍게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그 한 끼 식사에 담겨진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 본 일이 없는 자와 더불어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시인 괴테의 시 가운데 한 구절을 인용한 말인데 시련이나 역경이 오히려 성숙한 인격을 갖게 해 준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미국 일부 지방에서는 추수 감사절이 되면 식탁에 다섯 개의 옥수수를 올려놓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땅을 처음 밟은 청교도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할 때 하루에 한 사람이 옥수수 다섯 개씩 배급받았던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상 17장 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악한 임금 아합을 피하여 사르밧으로 도망갔습니다. 그가 거기서 한 과부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과부에게 떡 한 조각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의 집은 지극히 가난했기 때문에 남은 것이라고는 가루 한 움큼뿐이었습니다. 그 과부는 아들과 함께 그 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눈물 젖은 떡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떡을 선지자가 달라고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 때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과연 선지자의 말처럼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과부는 끼니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떡은 먹고 죽을 떡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떡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았습니까?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원리에 따른 방식이었다는 말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하여 길을 걷는 동안 계속해서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먹었던 떡이 바로 만나가 아닙니까? “내일 이게 없으면 어찌 할까?” 걱정하면서 많이 거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거둔 만나는 아침이 되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욕심을 부리고 많은 것을 끌어모아도 소용이 없게 만드셨습니다. 오직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만 하늘로부터 생명의 떡인 만나를 내려 주셨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스스로 뭐라고 말했습니까? 누가복음 12장 18절, 19절 말씀입니다.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예나 지금이나 이런 생각, 이런 가치관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인 생명에 대해서 주님은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믿음의 사람들이 받을 하나님의 떡은 환난 중에 그 가치를 더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 21장의 말씀을 보면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놉이라는 곳으로 도망쳤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 나라에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숨을 곳도 없고 먹을 음식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극심한 고통을 겪던 중에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떡을 좀 달라고 제사장에게 간청했습니다. 다윗을 불쌍히 여긴 제사장은 다윗에게 거룩한 떡을 주었습니다. 

그 떡은 보통 떡이 아니었습니다. 제단에 바쳤던 거룩한 떡이었습니다.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떡이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주님도 그 사실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마 12:3~4)) 그렇습니다! 환난 중에 더욱 귀한 떡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또한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은 친히 마련하신 밥의 궁극적인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은 손수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주님이 친히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친히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을 때에 제자들이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 후 제자들은 떡을 대할 때마다 그 주님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의에 빠진 상태로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도 식탁에서 주님이 친히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에 비로소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실 때에도 주님은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채 기진맥진해 있던 제자들을 위하여 식탁을 마련하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다만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주님은 친히 가셔서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다양한 형태의 식사는 모두 다 현실적인 육신의 양식입니다. 결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영혼의 양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눈앞에 있는 썩을 양식에 대한 미련 때문에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한 아이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을 수 있었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떡 한 조각을 선지자를 위하여 포기했기 때문에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생각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생명의 밥으로 내어놓지 않으셨을 것 같으면 우리에게는 아무 소망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주시는 양식은 썩을 양식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주님은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겸손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생명의 밥으로 오신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가 그 밥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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