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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하나님이 되신 여호와여! : 야곱 이야기(6) (창 28: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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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이 되신 여호와여! : 야곱 이야기(6) (창 28:16-22)
 
벧엘에서 야곱은 신앙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야곱에게 벧엘은 특별한 자리였습니다. 그의 신앙과 인생이 바뀌는 전환점의 장소였습니다. 늘 무엇인가 움켜잡고 싶은 그였지만, 빈손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이라는 특권을 내려놓고 도망자의 신분으로 하늘을 천장삼아 누워있었습니다. 이것이 그곳에서의 그의 첫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을 쳤다고 탄식하는 그 순간에, 더 이상 자랑할 것이 없다고 여겼던 그 순간에,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으로 야곱에게 새로운 삶의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먼지와 흙, 돌덩어리 밖에 없었던 그 허허벌판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장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동행하실 것이라는, 그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된 자리이기도 합니다. 벧엘에서의 이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 야곱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야곱은 그동안 늘 부모의 신앙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야곱 자신의 신앙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는 나 야곱의 하나님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는 멀리서만 바라보던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여겼던 하나님께서 자신을 쭉 지켜보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정보 속에만 존재하던 하나님이 이제는 내 입과 내 가슴으로 고백되어지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경험되었습니다. 객관적인 신앙에서 주관적인 신앙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나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모두 경험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부모님의 신앙에서 우리의 신앙이 멈춰버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쁨과 감격,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즐거움을 다 놓치고 맙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렸을 적에 저는 할머니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습니다. 누군가 중얼중얼 대는 소리가 있어 눈을 떠보면 할머니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다른 기도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우리 지철이가...” 하시던 기도 소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고,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이 되면 헌금을 주시면서 저를 교회로 보내셨습니다. 찬양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저는, ‘아, 예수님은 소중한 분이시구나. 하나님도 계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 할머니의 하나님, 내 할아버지의 하나님, 내 어머니의 하나님. 그분이 정말 나의 하나님이실까에 대한 의문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가슴이 뛰지 않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도 눈만 감는 시늉을 했던 적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때로는 지겹고, 귀찮았습니다. 가끔은 삶의 불편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설렘과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떨림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바로 지금 야곱이 그랬습니다. 벧엘에서의 체험을 통해 비로소 신앙적인 성숙을 경험한 것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세기 28:16)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때로 침묵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내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는 것만 같은 하나님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일까? 아버지의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일까?’ 야곱은 늘 의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바로 내 옆에 계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멀리서가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서 그러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깁니다. 그리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야곱보다 더 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서 사람들과 대화하시고, 만지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려면 바로 그 예수님께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잠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사신 분이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수천, 수만 킬로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이 엄청난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연결해줄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내게 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해주셨던 말씀을 바로 나 자신에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고,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받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 성령께서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도움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하나님 안에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경험한 친밀한 하나님을 우리도 경험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친밀함과 함께 또 다른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은 곧 진정한 신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창세기 28:17)

두려움이란, 경이로운 것을 경험할 때 온 몸에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또한 놀람과 함께 나타나는 마음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 질적으로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이 내게 가까이 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생기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믿음의 반대 개념을 우리는 불신앙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더 깊이 들여다 보면, 그것은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서로 대항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대상이 세상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은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바른 신앙을 갖게 되는 축복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에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은 두려움에서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참된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신앙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잠언 9:10)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즉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이 시작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외경서인 집회서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인간은 방자해지고, 믿음이 사라집니다. 아니, 믿음이 생기지를 못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위로와 평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야곱의 신앙의 성숙도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으로 시작되었음을 볼 때 그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주인 되시는 삶이 축복입니다. 

야곱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는 과거에 어떻게든 움켜쥐고, 탈취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자신만의 계략과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라도 축복을 받겠다는 마음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획은 결국 인생의 주도권을 자기가 쥐어보고자 하는 욕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내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야곱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제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린 것입니다. 

이 말은, ‘나는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생각도 안하고,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겠다는 것에 대한 면죄부를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움직이고, 내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꿈을 꾸겠다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본문 20절 말씀 이하에 나타나는 야곱의 서원에는 하나님을 만난 그의 벅찬 마음이 잘 담겨 있습니다. 그 서원의 핵심은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읽어보면 행위의 주체가 모두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창세기 28:20)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내가 가는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고, 입을 옷을 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면”이라고 야곱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다시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나의 길에서 한 걸음씩 앞서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라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 인생의 결정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인생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겠다는 교만함이, 하나님께 삶의 전부를 맡기는 겸손함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사는 마음을 비우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놀랍게도 외적인 변화로 이어집니다. 야곱은 어떻게든 내 것으로 모으려던 사람이었습니다. 내 소유로 만들어야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한 다음, 그는 꽉 움켜쥐고 있던 두 손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내 것, 내 소유를 갈망하며 끊임없이 채우고자 애썼던 마음을 비우고, 움켜쥔 손을 펴서 “이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고 하나님께 드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창세기 28:22)

그동안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음을 야곱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내게 주신 것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반드시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십의 일조를 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이 십의 일조를 드리는 것일까요? 돈이 아깝지 않은 사람들일까요? 돈이 넘쳐나게 많은 사람이 십의 일조를 내는 것일까요? 아니면 30배, 60배, 100배로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을 바라보며 믿는 사람이 십의 일조를 내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십의 일조를 드리는 분들의 한결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내게 돈 벌 수 있는 재주를 주시고, 돈을 모을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가슴으로 고백하며 하나님 사랑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십의 일조를 내는 것입니다. 십의 일조를 강제로 내게 할 수도, 돈이 아깝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격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의 마음으로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봄, 우리 교단에 속한 신입생 신학생들의 수련회 자리에서 그들과 대화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소망교회는 헌금설교를 안 한다지요? 십의 일조 헌금도 이야기하지 않는다지요? 그게 사실입니까? 계속 그렇게 하실 겁니까?” 저는 아차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때까지 주일에 헌금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길인 헌금과 십의 일조에 대해서 앞으로는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헌금이 내게 강요가 되고 세금처럼 부담이 되면 그것은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내 것이다. 내가 네게 열 개를 다 주겠다. 그러나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기억하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니 그 중에 하나를 내게 달라.” 열 개 중에서 아홉 개는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도록 지혜롭게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헌금은 그래서 우리의 감사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쁨의 표현입니다. 

물질은, 나의 인격을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물질이 인격을 대체할 때 그것은 우상이 되지만, 내 인격이 물질로서 나타날 때 그 물질은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헌금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가난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몸이고, 내 삶 전체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전부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야곱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십의 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이것만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야곱처럼 움켜쥐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내 인생을 안전하게 만듭니까? 그것이 내 인생에서 영원히 동행할 친구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이제는 그렇게 꽉 움켜쥐었던 두 손을 하나님 앞에 나와 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내 인생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 감사합니다. 이제는 주님이 한걸음 앞서 가셔서 제 삶을 인도해 주세요.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영광 받아 주세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하고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고백의 자세로, 자원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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