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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자 (엡 4: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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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자 (엡 4:7-16)
   
여러분, 혹시 ‘이석증’이라는 병에 대해 아십니까? 우리 귀 안에 몸의 균형을 담당하는 평행 기관인 전정기관이 있습니다. 그 전정기관 안에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쇳가루 같은 것이 공중에 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들이 균형 감각을 유지한답니다. 그 쇳가루 같은 것을 의사들은 그냥 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의 몸이 지치고 피곤해 몸이 약해지면 그 돌이 제 위치를 이탈하게 된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균형 감각을 잃게 되고 어지럼증과 구토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집니다. 이석증이 오면 어지럼증으로 인해 고개를 조금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듭니다. 이때는 문제가 있는 귀의 반대 방향으로 누워서 약 이틀 정도를 무조건 쉬어야 합니다. 휴식을 취하고 몸에 힘이 회복되면 그 쇳가루 같은 조그만 돌이 제 위치를 찾아오게 되고 다시 균형 감각이 생기게 됩니다. 

‘이석증’이라는 뜻은 귀 안의 돌이  이탈해서 생기는 증세를 말합니다. 저는 이 단어 그대로 이해해서 우리 귀 안에 조그만 돌이 있고 그 돌이 자리를 이탈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의사의 말을 들어보니 돌이 아니라 현미경으로 보아야 보이는 쇳가루 같은 성분이랍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 현미경으로 봐야 볼 수 있는 조그만 것이 자리를 이탈하면 사람들은 생활 전체가 불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에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우리의 몸이야말로 신비 그 자체입니다. 건강한 상태도 오래 있다 보면 그저 모든 것이 당연하게 생각됩니다. 하지만 건강을 잃었다가 회복되는 과정을 겪어 보면 몸이 얼마나 신기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저녁이 되어 깊은 잠에 드는 것도 기적입니다. 아침이 되어 눈이 떠지는 것도 기적입니다. 인간이란 때로 우주를 날아다니며 우주를 정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교만을 떨지만 사실은 우리의 몸 하나도 내 맘대로 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사지백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은 백 개가 넘는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기관들은 서로 생김새도 다르고 하는 역할도 다릅니다. 그렇게 다양한 기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몸은 모두가 하나의 일을 이루는데 집중합니다. 그것은 뇌의 신호에 따라 하나같이 움직입니다. 뇌가 신호를 주고, 명령을 하면 모든 기관은 보이는 곳에 있든, 보이지 않는 곳에 있든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만약 뇌가 신호를 주었는데 기관이 그 신호에 따라 움직이지 않거나 따로 움직이면 그 몸은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설교를 하는 이 순간에도 제 몸의 모든 기관들은 뇌의 신호에 따라 말씀을 전하는 목적에 집중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설교는 입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짓과 표정, 그리고 눈빛과 억양 등이 합하여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데 손이 뇌의 지시를 받지 않고 설교 내용과 관계없이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면 설교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눈을 똑바로 뜨고 집중해서 설교를 듣자’는 뇌의 지시를 무시하고 소리를 지르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 설교를 제대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뇌의 신호와 몸이 하나가 되어 제대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우리 몸과 같이 신비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몸의 머리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은 몸의 모든 지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5-16절을 통해 이러한 교회의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리라’ 

우리 각 자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그 분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지체들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그 신호와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예수님의 뜻과 생각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반면에 건강하지 않은 교회는 예수님의 뜻과 생각을 알면서도 그 뜻대로 따르지 않고 각자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입니다. 중풍을 앓는 사람들을 보면 뇌와 사지가 따로 놉니다. 뇌는 팔을 올리라고, 발을 움직이라고 신호를 하는데 손과 발은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생각은 하는데 몸이 따라 움직여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의 하나로서 우리가 그 지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보지 말고 나를 한 번 살펴보기 바랍니다. 내가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과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 분의 명령과 보내 주시는 신호에 따라 내가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점검해 봅시다. 

내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나는 마치 뇌로부터 신호 전달이 차단된 팔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팔은 제 기능을 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전체 몸에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되거나 아픔이 됩니다. 예수님과 든든히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교회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활동하면 도리어 그로 인해 교회는 힘들어 하고 고통을 받습니다. 자신은 하고 싶은 대로 봉사한다고 하는데 도리어 교회가 예수님의 몸으로 기능을 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고 아픔이 됩니다. 

우리 귓속에 현미경으로 봐야 볼 수 있는 조그만 조각이 제 자리를 이탈했을 때 온 몸이 고통을 겪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조그만 말 한 마디와 거친 행동이 교회를 아프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항상 나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일꾼들은 말과 행동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16절의 말씀을 보면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두 개의 동사‘ 연결되다’와 ‘결합되다’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예수님에게 내가 연결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는 것은 과거의 것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렇게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건강한 믿음,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 굳게 붙어 있지 못한 신앙의 상태를 어린 아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유혹에 참으로 약합니다. 맛있는 과자를 사 준다고 하면 아이들을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아이들은 지금 맛있고 좋으면 상황에 대한 판단력이 약해집니다. 지금이 좋은 것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14절에 보면 이렇게 어린 아이와 같은 약한 믿음은 사람의 속임수나, 간사한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이런 저런 잘못된 가르침과 분위기에 쉽게 흔들리며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성장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성장한다는 개념은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에 우리의 삶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만약에 믿는 것은 되는데 아는 것이 부족하면 그 믿음은 기복신앙의 믿음이 됩니다. 아는 것은 되는데 믿는 것이 부족하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철학이 됩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는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즉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내가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여러분의 가정을 가장 사랑합니까?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할 때, 그리고 자녀들을 사랑할 때 어떤 마음을 가질 때 사랑하고 품게 됩니까?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가장 깊이 연결되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가장 사랑하게 됩니다. 저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제가 제 아내를 가장 사랑할 때는 제가 예수님의 마음에 가장 깊이 연결되어 있을 때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가장 너그러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예수님에게 가장 깊이 연결되어 있을 때입니다. 제가 가장 욕심 없이 살아갈 때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있을 때입니다. 반면에 제가 신경질적이 되고, 화를 내고, 미워하고, 편협할 때는 제가 예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기도를 소홀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할 때입니다.   

우리들이 가정에서 가족들과 불화가 있고, 교회에서 다툼과 미움이 있고, 일상생활에서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기 원합니다. 기도를 하며 내가 예수님에게 깊이 연결이 되어져 있는지를 먼저 점검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다시 깊이 연결하고 결합하면 내 삶이 자리에 가지고 있는 갈등과 아픔의 많은 부분들이 풀려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충만하게 이르기 위해서는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신호를 정확하게 일고 반응을 보이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온전하고 성숙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무던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피아니스트들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처음부터 악보를 보고 능수능란하게 피아노를 친 것은 아닙니다. 뇌가 악보를 보고 손가락에 보내는 신호에 따라 건반을 하나하나 두드리는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뇌의 신호에 두 팔과 열 손가락을 움직이며 반복된 훈련 속에서 뇌의 신호와 두 팔과 손이 그리고 발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수만 개의 음표를 읽고 정확하게 터치하며 감동스러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믿음도 같은 원리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더 온전하고 성숙한 믿음으로 성숙한 신앙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의 지도를 받아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각과 뜻을 말씀하시는데 손과 발이 되는 우리가 제 때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장하려면 매일 같이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생각에 나는 맞추어 그 생각에 반응을 보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는 미숙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라면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좋은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성숙한 모습으로 자랍니다. 믿음도 내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고 그 후에 말씀과 기도로 지속적으로 훈련 받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뜻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생각과 뜻을 담는 삶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주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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