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되어라, 목마른 사람이여! (마 5:6)

첨부 1


복되어라, 목마른 사람이여! (마 5:6)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우리나라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히딩크 감독은 우리나라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지도력도 빛났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한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의 말 가운데 오랫동안 유행어처럼 쓰인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말입니다. 조별예선 3차전에서 포르투갈을 꺾고 16강에 오른 후에 축구강국 이탈리아와의 16강을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축구가 월드컵 16강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고, 어쩌면 16강에 오른 것만으로도 한국축구는 역사적인 쾌거를 이룬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은 인터뷰에서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탈리아를 뛰어넘어 더 큰 성과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가 생리적인 욕구입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Maslow)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5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이 생리적인 욕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욕구인 생리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다른 욕구가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매슬로우가 말한 두 번째 욕구가 ‘안전에 대한 욕구’입니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신체적인 위험이나 위협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말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해코지 하지 않을까? 나를 죽이려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구입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인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에만 이 두 번째 욕구인 안전에 대한 욕구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너무 배가 고프면 자신의 신변에 어떤 위험이 가해진다 할지라도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걸게 됩니다. 북한에서 탈북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좋은 예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탈북자 대부분은 굶주림에 시달리다 생명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게 됩니다. 압록강을 건너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탈북하다가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가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1차적인 욕구인 생리적인 욕구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프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고픔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배고파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복되어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여! 그대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우리가 몇 끼 밥을 먹지 못하면 허기를 느낍니다. 아니 한 끼만 굶어도 배가 고파옵니다. 요즘이야 다이어트를 한다고 일부러 굶기도 하고, 식사량을 조절하면서 배고픔을 참아냅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주린다는 것은 몇 끼 굶어서 허기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마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한 후에 땀을 흘리고 나면 갈증을 느낍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목마르다는 말은 그런 정도의 갈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린다’는 말은 너무나도 배가 고파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상태, 배가 고파 곧 죽을 것만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목마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시간 운동하고 나서 갈증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오랫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 탈진한 상태, 곧 마실 물을 찾지 못하면 탈진해서 목숨을 빼앗길 것만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배고프고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된 사람을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의’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구약성경 언어인 히브리어로 ‘쩨데크’라는 말인데, 이 말이 구약성경에 280번 이상 나오고, 신약성경 언어인 헬라어로는 ‘디카이오쉬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신약성경에 약 90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의’라는 말은 성경의 중심 되는 단어이고, 성경의 중심 사상 가운데 하나가 ‘의’입니다. 
  
이 ‘의’라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뚤어지지 않고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그것을 의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순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 복되다,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 복되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한 간절한 열망을 갖고 사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배고파하고 목말라 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굶었다 하더라도 죽어 있는 것은 배고프다고 아우성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뜨거운 태양볕 아래 있다 하더라도 죽어 있는 것은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존재만이 배고파하고, 살아 있을 때에만 목마름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바른 관계를 맺고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바른 관계를 맺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없다면 그 영혼은 죽은 영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이어 나오는 마태복음 5:20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것을 강제로 빼앗지 않았습니다. 살인이나 간음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적인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구제하는 일에도 아주 열심 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하는 시간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십일조 정확히 했습니다. 무엇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워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계십니까?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따라 하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을 칭찬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들의 그 의는 자신을 내세우는 ‘자기의 의’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하는 ‘자기 의’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1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참으로 열심히 신앙생활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의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전혀 상을 받을 수 없는 ‘자기 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자기 의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구제를 많이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회당과 큰 길거리에서 구제를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입네’하고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때에도 자신은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일부러 기도할 시간이 되면 회당이나 큰 길거리 어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기도 시간에 맞춰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잘 한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화려한 말로 오랜 시간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하라.’ 그리고 ‘오래 기도할 것 없다’ 그러시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게 짧게 기도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금식한 후에는 초췌한 얼굴 모습을 하고서 다녔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저 사람 금식했구나. 참 훌륭한 사람이야.’ 그렇게 칭찬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금식한 티를 내고 다녔습니다. 

이런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의를 얻고 싶은 열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의만을 가지고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신앙생활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만큼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싶다는 열망도 없었습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고 싶은 갈망도 없었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칭찬해 주면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이미 그들은 의에 대해서 배부른 상태였습니다.
  
그랬기에 앞서 말씀드린 누가복음 18장에서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자랑스럽게 기도하던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겨주시기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 배불리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로 배불러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얻고 싶은 열망이 없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의로 만족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없어도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어도 그들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신앙의 마음 대신에 사람들로부터 주어지는 칭찬과 박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만나 주십니다. 잠언 8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언 8:17)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십니다. 

인도의 성자라 불리는 썬다 싱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썬다 싱은 1889년 인도 북부의 한 작은 동네에서 부유한 가정에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의 집에는 언제나 시크교의 스님들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덕망 높은 스님들과 교제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썬다 싱 역시 그런 종교적 배경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서 세운 소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성경과 기도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가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성경 한권을 사고 싶다고 말하고, 얼마 후에 성경 한 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성경을 가지고 가서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갈기갈기 찢은 후에 불태워버렸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항심이 그렇게 컸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힌두교에서 진리를 찾지 못하면서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덕망 높은 스님을 찾아가 영적인 갈급함을 해결해 보려 했지만, 어느 누구로부터도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요가나 명상을 통해서 진리를 얻어보려 했지만, 거기에서도 답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자신이 찢어버린 성경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조금씩 마음에 감동이 오긴 했지만, 영적인 갈급함을 해갈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굳게 결심하고 기도했습니다. ‘참 신을 찾지 못하면 죽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3일 동안 금식하며 골방에서 결사적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신이여! 만일 당신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저를 만나 주소서.” 

그때 라호라로 가는 밤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음 열차는 내일 아침 5시 급행 열차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신이여! 만일 다음날 아침 5시 급행열차가 지나가기 전까지 나타나 주시지 않으시면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져 죽겠습니다.” 그리고는 목욕을 하고서 다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급행열차가 지나갈 때까지는 이제 7시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밤 새워 신을 찾아 간구했습니다. 
  
새벽이 되었습니다. 그 때 방문 쪽에서 환한 빛이 비치며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져 있고 양 손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썬다야! 나는 너를 구원하러 왔다. 너는 바른 길을 찾고 있구나. 내가 곧 길이니라.” “신이여! 누구십니까?” “나는 나사렛 예수다.” 이렇게 해서 썬다 싱은 참 신이요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주님은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그걸 알기에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편 42:1)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골짜기를 뛰어다니던 사슴이 마실 물을 찾지 못해 곧 기진하여 쓰러질 것만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마실 물을 찾지 못하면 사슴은 쓰러져 죽을 것입니다. 그처럼 시인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을 것만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내 삶이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잡아 주지 않으신다면 내 영혼이 저 깊은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 것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갈망해 보셨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내 삶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내 인생을 멋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면 못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누구의 도움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내 삶은 햇빛 찬란할 것 같고, 만사형통할 것만 같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없이도 내 마음에 허전함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필요 없습니다. 아니 자기 자랑할 때에만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랑을 들어줄 양반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에 찾아와서 기도한답시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습니다. 자기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오히려 더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서랍장에 넣어둔 장식품 정도로만 인정합니다.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한 착한 행동에 박수만 쳐주면 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내 삶이 모두 무너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갈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한 것,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랑스러운 모습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면 목이 말라 죽을 것만 같은데, 집에 쌓아둔 억만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갈망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지 않으시면 내 생명이 여기서 끝날 것만 같은 절박한 마음 뿐입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우리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복되어라,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이여!’
  
여러분, 세상은 우리에게 재물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성공에 목말라 하고, 출세에 목마른 사람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재물을 얻을 수 있고,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심정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무엇에 목말라 하며 살고 계십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