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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4) : 하박국의 하나님 (합 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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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4) : 하박국의 하나님 (합 3:16-19)

내일이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6.25전쟁 62주년이 됩니다. 우리가 북한을 보면 하박국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박국은 문서 예언자들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공의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통치하는데 왜 정의롭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통과 악인이 누리는 형통 사이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심각하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첫째는 ‘언제까지 유다의 죄악상을 내버려 두실 것이며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실 것인가’이고, 둘째는 ‘의인이 악인에게 심판받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세상이 모순되고 불합리하다는 것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에 살고 있는 하박국의 질문입니다. "카뮈"가 이 세상에는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질서도 구원도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존재란 부조리한 것이라고 제기했는데 하박국이 일찍이 이 부조리 철학을 제기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과 하박국 선지자의 반응을 통해 오늘 부조리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약속을 믿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박국이 산 때는 어느 때였습니까? 하박국이 산 때는 이미 북쪽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리고 남쪽 16대 유다 왕 요시아 통치 말년부터 18대 여호야김 시대까지입니다. 남쪽 유다가 신흥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와 동시대 선지자입니다. 

이때의 왕은 유다의 여호야김 왕 때입니다. 아버지가 요시야 왕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대대적이고 철저한 신앙개혁운동을 펼친 선왕이었습니다. 이때 바벨론이 신흥강국으로 부상하고 앗수르가 쇠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로부터 독립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했는데 신흥 바벨론이 강성해지는 것을 원치 않은 이집트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과 싸우기 위해 유브라데 강가의 갈그미스로 향해 진격해왔습니다. 그 때 유다를 침공하고 욕보이던 앗수르가 빨리 망하기를 바랐을 요시야는 이집트가 앗수르를 돕는 것을 막기 위해 갈그미스로 향하던 이집트의 바로 느고의 군대를 중간지점인 므깃도에서 저지하려 했습니다(대하35:20). 이 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죽었습니다(대하35:22-24). 

요시야가 죽자 유다 백성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3달만에 이집트 왕이 폐위시키고 잡아가 버렸습니다(대하36:1-3). 대상3:15에 따르면 요시야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요하난이고 둘째는 여호야김이며 셋째는 시드기야이고 넷째가 살룸이었습니다. 넷째 살룸이 곧 여호아하스입니다. 

막내아들이 형들을 제치고 요시야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반이집트-친바벨론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유다를 이긴 이집트는 반이집트 성향의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그의 둘째 형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이름을 바꾸어 유다의 새 왕을 삼은 것입니다. 이집트에 의해 폐위된 여호아하스는 붙잡혀 이집트로 끌려갔고 거기서 죽었습니다(대하36:4, 렘22:11-12). 

이렇게 국권을 상실한 치욕스런 망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위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여호야김이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대하36:5)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백성을 잘 다스려야 할 그가 아주 악정을 펼칩니다. 1장2-4절 말씀입니다. 강포(권력 있는 자의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학대) 간악, 패역(압박과 착취로 오는 수고와 곤고), 겁탈(파괴, 약탈, 살해), 변론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는 

①애굽 왕의 호의를 얻으려고 많은 은과 금을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애굽에 바침으로 권력을 유지하였습니다.(왕하23:35)

② 왕하24:4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그는 선지자 우리야가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권한다고 붙잡아다가 여호야김 자신이 직접 살해하였습니다.

③ 자신의 사치스런 생활을 위하여 궁전을 크게 짖고 이일을 위하여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였고 백성들을 압박하여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렘22:13, 14, 17) 

④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리를 화로에 던져 불태웠습니다.(렘36:20, 23) 선왕 요시야가 헐어버린 우상의 제단을 다시 수축하고 앞장서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하여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함이 아니라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칼로 갈기, 갈기 찢어서 화로 불에 던졌습니다.

⑤ 선지자 예레미야와 서기관 바룩을 잡아 없이 하려 했습니다.(렘36:26) 

최고 권력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유화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국민을 괴롭히고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악인들이 의인을 못살게 구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재판관은 바른 재판을 하지 못하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탈취하는 때였습니다.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보며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1장 2절을 보십시오. 3, 13, 14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공의의 하나님이 악인을 징벌하지 않으십니까?(2-3) "하나님 어느 때까지 이렇게 악한 사람이 잘살고 의로운 사람이 고달프게 살아야 합니까?" 

그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1장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너희 나라 사람을 다 치겠다고 하셨습니다.(6) 갈대아 사람은 신흥 바벨론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의 죄악을 결코 묵과하시지 않을 것이며 때가 되면 이방 민족 바벨론을(6)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남 유다의 죄악을 징계하시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1:5-11), 얼마나 후련한 답변입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이러한 하나님의 답변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의혹은 더 깊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있어서 악한 세력이 사용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벨론을 통한 남유다의 심판은 원수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삼하 7 : 8-16)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왜 하필이면 남유다보다 더 패역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족속인 바벨론을 들어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를 심판하시는가? '라는 것입니다.(1:12-17). 

17절을 보십시오. 바벨론이 칼로 계속 여러 민족을 무자비하게 죽여도 좋다는 것이냐고 질문을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바벨론 나라가 언제 쳐들어오는가 보기위해 성루에 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자신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실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 때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2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합 2:2)"

하나님께서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불만만 제기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묵시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남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잠시 바벨론을 들어 사용하실 뿐 바벨론도 결국 그들의 죄악대로 심판받아 반드시 멸망할 것이고 결국 의인의 종국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2:1-20) 억울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화있을 진저(9,12,15,19)라고 선포합니다. 그들은 잠시 유다를 징계하는 몽둥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다섯가지의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탐욕(5-8), 불의한 이득(9-11), 피흘림(12-14), 협박(15-17), 우상숭배(18-20) 등으로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날이 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억울함을 당합니다. 불의한 일을 당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억울함을 당합니까? 거래처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습니까?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라는 말을 달고 살고 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언제나 정의로운 사회가 옵니까? 언제 좋은 세상이 옵니까? 언제 선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이 옵니까? 언제 악인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됩니까? 라고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 보았지만 그런 세상 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의혹을 품는 것입니다. 이런 하박국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다시 말씀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합 2:3)"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정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한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때입니다.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하여 의혹을 품고 회의하며 방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더디게 보일 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징계 받을 세상,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세상, 좋은 세상, 공의가 실현되는 세상,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신천신지가 이루어질 세상을 더디 온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려면 50년 100년 기다려야 합니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이 땅에 태어나려면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약속에 근거하고 믿음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약속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기다리지 못하여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줄 것을 약속했지만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첩으로 맞이하여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인류에게 비극을 던져 주었습니다. 

사울은 때를 기다리지 못해 실패했습니다. 모세도 때를 기다리지 못해 살인자가 되어 실패했습니다. 야곱도 기다리지 못하여 수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아간도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전략품을 훔치다가 실패했습니다. 기다리면 전략품을 취할 때가 오는데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노아는 비오기까지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10년을 기다렸고, 사울이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왕이 되기까지 무려 7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17년을 기다렸습니다.

눈이 그리우면 겨울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시 37:7)"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 30:18)"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애 3:25)" 

하나님은 자신을 의롭다하면서 의혹을 품고 못 견디어 하는 하박국 선지자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불의한 시대에, 부조리한 시대에 의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와 의인을 댓구로 놓고 말씀합니다. 그의 마음은 불의한 자, 정직하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교만과 믿음을 댓구로 놓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정직하지 못한 악인은 그 교만으로 인하여 망할 것이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갈대인의 악한 자들은 망할 것을 말씀하고 유다 남은 자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을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의인된 자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10:37-38)" 

불의한 권력 로마의 압제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야 했고, 화형을 당해야 했고, 칼에 찔려야 했고,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런 불의한 세상에서도 믿음으로 살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 약속을 믿는 자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근본적인 의미는 로마서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롬1:17, 갈3:11). 인간의 본질은 악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3절의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그가 반드시 오실 것이요 그는 결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누구겠습니까? 히브리서 10장 36-38절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오실 이가 누구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마3:11 요1:15,27,30 3:31 행1:25)

율법이나 도덕은 이 세상의 악을 절대로 고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과응보 원리의 노예가 아니십니다. 율법이나 도덕으로는 죽어다 깨어나도 이 세상의 악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해답니다. 오늘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교만하고 거짓된 악으로 가득 찬 바벨론과 같은 세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답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심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있어도 예수님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심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실현이 지체되는 듯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의인이 고통을 당하며 억압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잠간일 뿐이며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면 의인에게는 영원한 축복이, 악인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단12:1-3). 우리는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는 이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가 시행되는 그 날이 분명히 올 것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그들의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행사에는 꼭 "아니마밈"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나는 믿는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유대인 600만명이 무참하게 죽음 당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작사 작곡되어 불렸다고 합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간단한 가사를 계속 반복하여 부르는 찬송입니다. 

자신의 동료들이, 아버지 어머니가, 아들딸이, 형제들이 가스실에 끌려갑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들은 이 찬송 뒤에 한 절을 더 넣어서 불렀답니다. '그런데 때때로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그러나 한 외과의사는 절대로 그 마지막 가사를 부르지 않았답니다. 그는 확실히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늘 단정히 행하고 죽음을 앞둔 시간이지만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해가면서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끝까지 버티고 견디고 믿음으로 섰답니다. 그는 마침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오게 되었답니다. 나오면서 그는 마지막 절을 고쳐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너무 서둘러서 믿음을 포기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하박국 선지자는 놀라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생존권이 위협받습니다. 과일나무가 시들고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 이는 그들의 양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성치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마실 것을 줌으로 그들을 기쁘게 해 주었던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기름을 버터와 같이 사용하는 감람나무도 그 소출을 내지 않아 그들이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하고 실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밀의 소산을 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밭에 소산이 없을 것입니다. 가축이 멸절 될 것입니다. 먹을 것 없어 혹은 약탈로 가축이 없을 것입니다.

생명에 위협을 받습니다. 그래서 지금 선지자의 창자는 흔들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깊은 내심의 불안과 동요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선지자의 입술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이 제대로 안 되는 고통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선지자의 뼈가 썩어지는 아픔을 느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예측되는 상황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남한이 타락했다고 북한이 쳐들어오면 좋겠습니까? 북한이 타락했다고 중국이 쳐들어오면 좋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확 전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부패했다고, 경제인들이 부조리하다고, 백성들이 향락주의와 물질주의의 노예로 전락되었다고 전쟁이 일어나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적용해 보십시오. 전쟁 같은 상황을 만났습니다. 부채 때문에 날마다 걱정합니다. 걱정하지 않고 풍요롭게 쓸 수 있는 돈도 없습니다. 가계는 열어 놓았는데 손님은 없습니다. 집은 내 놓았는데 보러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력이 우수하여 남들로 칭찬 듣고 장래가 총망하다는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뿐이겠어요. 강도가 들어와서 있는 재산 다 털어 가서 먹을 것도 없습니다. 질병이 걸려 고난을 당합니다. 자식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습니다.

성도님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아마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망하고 좌절할 것입니다. 심하면 인생을 포기해 버리고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을 당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라고 불만을 품고 탄식한 인생이 "없을지라도"라도 인생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의문을 제기하던 인생인 기뻐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합3:17-18절에서 하나님을 높여 찬양합니다.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왜 이렇게 기뻐합니까? 불만과 불평의 사람이었던 그가 갑자기 왜 이렇게 기뻐합니까?

18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비록 전쟁의 위협이 있다할 지라도, 경제 불황으로 먹을 식량이 없다 할지라도, 선한 사람이 어렵게 살고 악한 사람이 잘 살아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할지라도, 비록 나에게 건강도, 물질도, 아파트도, 실력도, 다른 사람의 호감을 받을 만한 미모도, 그럴듯한 인격도, 오늘 먹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오직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다는 고백 참으로 위대한 고백입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 여호와 안에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하박국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조국의 장래를 환경과 국제 정세, 인간에게 돌리지 않고 역사를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여호와 안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모든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을 믿지 않고, 밭에 소출이나, 가축 떼들을 믿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두 가지 가치관이 있습니다. 상대적 가치와 절대적 가치입니다.

상대적 가치란 이룸의 가치입니다. 무엇이 되고 무엇을 얻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가치관입니다. 이것은 이룸의 가치이며 일시적이고 도구적인 것입니다. 반면에 절대적 가치란 됨의 가치라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이고 영구적입니다. 하나님 아들 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상대적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무엇이 있어야만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과 미모를 아름답게 가꿈으로서 기쁨의 근원을 찾으려 고합니다. 권력, 명예, 자식, 남편, 아내로 기쁨의 근원을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자동차, 노름, 돈으로 기쁨의 근원을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교회 건물로, 목회자의 학력으로. 교회에서 사귀는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로, 교회에서 맡은 일로, 교회에서 얼마나 중심적인 인물이 되느냐로 기쁨의 근원을 삼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살이에 그것도 의미가 있고 보람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기쁨을 찾는 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입니다. 때가 되면 모두 살아집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시대와 환경에도 영원히 변하지 안으시고 참 기쁨을 주시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여야 합니다.

어떤 고난이 온다고 하더라도 여호와를 보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를 이끌어 갈 것이며 역사의 종착역에 이르도록 만들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인간을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고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보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온갖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세상 만물이 변한다하여도 늘 내 곁에 계셔서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갈대아인이 쳐들어와 모든 것을 약탈해 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입니까? 1장 12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더러운 자들을 들어 쓰십니까? 왜 이런 사람이 설치고 다니는데 가만히 놓아두고 악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 침묵하냐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2장 3절을 보십시오.

그 지체되지 안고라는 말은 정확히 번역하면 그가 지체되지 안고라는 말씀이고, 정녕 응하리라는 정확히 번역하면 "그가 정녕 오시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만족과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살게 만들 것을 이미 하박국 선지자를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바벨론은 결국 망할 것을 선포합니다.(합2:9,,12,15,19) 

선지자는 하나님 손에 바벨론이라고 하는 채찍의 몽둥이를 들고 유다를 향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겁이 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이 왜 바벨론을 몽둥이로 들어 유다를 치려하시는가를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 유다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남은 자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뜻이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 바벨론 다음에 페르시아 그리고 헬라 그다음 로마가 역사의 패권을 잡고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메시야가 와서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신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역사는 왕이 누구냐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이 전정 역사의 왕이십니다. 역사의 겉만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역사를 쥐고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 어려운 환란으로 그를 죽이지 않고 그것을 통하여 구원의 빛을 비춰 주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고난과 어려움, 시련과 환란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기 위한 계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면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알고 있는 마게도니야 교회를 보십시오. 고후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 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시련과 환란이 있었습니다. 극한 가난이 있었습니다. 보통 가난이 아닙니다. 발바닥까지 내려앉은 가난입니다. 그런데도 넘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많은 환란, 극한 가난 속에 기대되는 것은 원망과 저주, 불평과 슬픔 탄식 뿐일 터인데 그들은 기뻐하였습니다. 그것도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후 8:1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심이니라"

바울은 환란 가운데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7장4절을 보십시오.
"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 도다."

우리는 일이 잘 되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응답되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가 잘되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질병에서 낳아 기뻐할 있습니다. 우리는 승진하여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돈을 벌어서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무엇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까? 눅 10: 2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나가 귀신들이 항복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이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오스트리아의 대 작곡가인 하이든(Haydn, Franz Joseph)에게 한 사람이 "당신의 미사곡은 어떻게 그렇듯 즐거운 감을 줍니까?"고 묻자, 하이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운 기분이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기쁨이 있습니까?


3. 하나님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의문과 의혹 불평으로 시작한 하박국 선지자의 마지막 고백을 보십시오. 1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누가 왕이냐가 중요합니다. 바벨론은 자신의 힘을 하나님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1장 11절을 보십시오. 이게 제국의 역사이며 믿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가인문화의 종착역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여호와를 힘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하박국은 침략자 바벨론 군대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그 결과 그 땅이 황폐되어 생존의 여건이 끝나고 말 죽음의 비극을 보면서도, 반면에 '힘'이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힘이 되신 여호와가 궁극적으로 저들에게 승리를 안겨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은 권력이 어떤 사람은 명예가,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힘입니다. 능력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농작물이나 가축 떼처럼 없어질 무능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게 침략 당할 정도로 무능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란을 당할 때 끝까지 침묵하고 등 돌리는 무능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에 전혀 손을 쓰시지 못하는 무능력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개인이나 역사의 키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문제 해결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한나를 보십시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번민하였습니다.(삼상1:6 구약 408장) 울었습니다.(7) 마음이 괴롭고(10) 슬펐습니다.(15) 그 때 그는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더를 보십시오. 에스더 9장 22절 유대인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어떻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높은 곳에 다닌"다는 말은 승리자가 서는 위치를 말합니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위치입니다. 세속을 떠나서 모든 고통과 슬픔을 내려다보며 객관화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역사 속에 살면서도 역사를 초월하여 내려다보는 차원 높은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의 직접적인 뜻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을 받아, 다시 시온의 땅,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구원의 승리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나의 높은 곳'이란 낮은 바벨론 포로에서 되돌아 온 '시온' '예루살렘' '가나안 선민의 땅'을 가리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얼굴이 비추는 곳이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극복하는 신앙의 높은 차원을 말합니다. ‘나의 높은 곳 위에 걷게 하시리라’는 표현은 세상을 완전히 승리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로마서 8:31-39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등반과 같습니다. 죽음의 계속도 만나고 거친 암반과 산소 부족으로 고통당하는 죽음의 사각지대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정상에 이르도록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확장한다면 새로운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환란이 닥쳐와도 고난과 환란 그 자체만 보지 않습니다.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역사의 종국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다다를 천국의 기쁨, 영광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약속을 믿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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