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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이 살아있는 가정 (창 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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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살아있는 가정 (창 3:5-12)

어떤 문제를 풀려면 기원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에는 인류의 모든 기원이 나옵니다. 2장에는 가정의 기원, 3장에는 죄의 기원과 함께 가정이 실패하는 사건, 실낙원, 4장에는 형제의 살인 등으로 인류의 비극이 전개됩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인간의 죄로 시작된 가정의 실패와 불행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정을 이루게 하셨는데 그 사이를 틈타고 사단이 들어옵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7절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전에는 그들이 벗었는지 몰랐지만 이때 벗은 것을 인식하고 자기 삶에 변화가 온 것을 느끼면서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불편해졌다는 것입니다. 수치심, 상실감, 박탈감, 불안감 등 이전에 없던 것들이 몰려오면서 불행이 시작됐습니다. 

여기에서 종교와 문명이 출발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 종교요 문명이지만 인간의 노력은 불완전했습니다. 나뭇잎은 곧 말라버렸고 몸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짐승을 잡아 친히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복음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가리려고 하는 그 불완전함에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피를 내어 옷을 만들어 입히십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가려주시고 의롭다 여겨주신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은 끝없는 실수와 연약함으로 계속 넘어지고 깨지는데도 그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가 나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실수를 그대로 둔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수와 연약함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곳이 가정입니다. 밖에서는 긴장하고 관계에 애를 쓰지만, 가정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고 연약함을 그대로 노출하여 가족 안에서 아픔과 상처를 겪으며 불행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복음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역사하면 회복과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이 살아있는 가정은 어떤 곳입니까? 

1.가면을 쓰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찾아온 것은 수치심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옷을 만들어 입고 수치를 가리고자 한 것처럼 죄를 지은 인간은 가리고 가면을 씁니다. 우리는 자기를 가리는 수단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거부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거짓말은 일종의 자기 가면으로, 자신의 연약과 허물을 최대한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지만 그러다 보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속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흔한 거짓말은 책임 전가입니다. “너 때문이야” 부부싸움을 보면 책임공방이 가장 흔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상대에게 돌리거나 자기합리화를 합니다. 실수를 인정하면 되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죄를 축소하거나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 나보다 더 큰 죄를 짓지 않았느냐고 따집니다. 자기 죄를 은폐하여 그것 때문에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큰소리칩니다. 자기 의나 노력을 주장합니다. 

특히 남편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가족을 위해서 죽도록 일만 해왔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남편들이 입고 있는 전형적인 ‘의의 옷’입니다. 아내들도 없는 돈에 집안 살림하고 가족들 뒷바라지로 희생해 왔다는 ‘의의 옷’이 있습니다. 나도 할 만큼 했다는 주장들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옷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만든 ‘자기 의’라는 옷으로 자기를 정당화하고 부끄러움을 숨깁니다. 

이런 모습에서 오는 치명적인 결함은 자기를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동안에는 자기의 존재, 가정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짜 문제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가면을 벗어야 문제가 해결되는데 가면을 벗으면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고 벗지 않습니다. 진정한 교제가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친히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신 것입니다. 내가 나를 가리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만든 의의 옷을 벗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의, 곧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면 더이상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나는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방어하거나 위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자신에 대해 정직해야 합니다. 아빠들이 먼저 정직한 고백을 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과 잘못을 인정하고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미안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복음을 붙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누군가 공격을 하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자기방어를 하기보다 자신의 연약함과 어려움,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아빠가 부족한 것이 많다고, 남편으로서 잘못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내들 역시 자기 가면을 벗고 엄마로서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자기 고백을 할 수 있을 때 그 가족의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가족관계의 핵심은 친밀함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 인류 최초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관계는 이처럼 친밀했습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깊은 친밀함의 관계 속에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행복은 친밀함입니다. 친밀함 속에 행복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만족함이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에너지는 어마어마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제했더라도 친밀함이 없다면 그 안에서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많은 아픔을 겪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 안에 친밀함이 없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면서도 정신적 이혼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친밀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사는데도 외롭습니다. 외로움은 무서운 병입니다. 오늘날 급속도로 늘어가고 있는 정신적 질병, 우울증은 친밀감의 상실로부터 온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는 관계에서는 친밀함이 생길 수 없습니다. 숨기는 관계는 시간이 흘러도 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붙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신 은혜를 믿음으로, 더이상 감추거나 가면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정직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가족관계 안에서도 남편들이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서 거짓말을 많이 만듭니다. 거짓말은 또 거짓말을 만듭니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술을 먹거나 담배를 피울 수 있지만,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숨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숨기는 순간부터 그 인생에 죄와 어두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계 안에 연약함이 드러날 때 연약함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문제를 터놓고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 안에서 함께 하는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녀 안에도 어떤 것이라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숨기기거나 비밀이 있다면 문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비밀에 사탄이 틈을 탑니다. 어두움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숨기는 행위는 고립감에 빠지게 하고 심하면 정신분열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싫어지고 관계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가정 안에서 그런 문제가 생긴다면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가족관계 안에 숨기는 것이 있는지, 기꺼이 드러내려고 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이 있는 가정은 무엇이든지 드러냅니다. 연약과 실수, 문제를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혹여 내 안에 연약함이 있을 때에는 도움을 요청하고 함께 기도로 풀어간다면 어떤 것도 그 가정에 틈탈 수 없습니다. 정직함이 가정을 살리고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인정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가면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역사할 때입니다. 오늘날 모든 인간관계 안에서도 솔직하게 고백하고 나눌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건강한 가정으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2. 허물을 덮어줍니다. 

여기에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눈이 어두워지고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보는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서로를 바라볼 때 수치심이 생겨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기분 나쁘고 거북해졌습니다. 이전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과 사랑으로 보았지만, 판단과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수치심은 심하면 자살로 갈 정도로 무서운 감정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짐승의 가죽옷을 입혀주셔서 단번에 우리의 수치를 영원히 가려주신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의 의로 우리를 덮어주실 때, 더이상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십자가의 은혜는 덮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가 없는 것도 아니고 더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우리를 죄 없다고 여겨주십니다. 칭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시는 은혜입니다. 반대로 율법은 들추어냅니다. 율법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 됩니다. 율법적 가정의 분위기는 살벌합니다. 정죄하고 모두 자기 방어적입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때로는 분노를 느끼는 것은 기준 혹은 기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그 기준에 들지 않으면 주눅이 들게 합니다. 아이들의 범죄기록부를 줄줄 외어 대며 잔소리를 합니다. 결혼한 지 이삼십 년이 지났는데도 부부가 싸울 때에는 결혼 초기의 실수, 결혼 예단 문제 등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끄집어냅니다. 대홍수 이후 노아는 술에 취해 대낮에 누드로 누워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추태를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들추어낸 죄는 함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까지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을 하여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었습니다. 이것이 가정 안에서 복음의 모습입니다. 

죄는 남의 허물을 자꾸 들추어내지만, 복음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받은 우리가 또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내린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가정은 다른 어떤 곳보다 실수와 허물과 약점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가정 안에서는 인간성의 적나라한 것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만큼 덮어줌의 은혜가 필요한 곳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하나님은 끊임없이 눈감아주셨습니다.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지었을 때 수치감을 심어주는 것은 문제 해결에서 옳은 방식이 아닙니다. 실수는 그 일에 실수한 것입니다. 그런데 싸울 때 상대에게 모욕이나 수치를 준다면 복음적 태도가 아닙니다. 배우자나 자녀가 실수했을 때가 바로 복음을 보여줄 기회입니다. 상대의 약점과 실수를 공격하지 말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용납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복음이 아니면 나는 죽었는데 아빠가 엄마가 나를 살려주는구나.’ ‘남편이 아내가 참아주는구나. 이것이 복음이구나’를 느끼게 해야 합니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율법을 붙잡으면 모두가 죽고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살아있는 가정은 덮어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습니다.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수치심을 가지지 않도록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는 장면은 완벽한 복음의 모습입니다. 가족관계 안에서 허물과 약점을 드러내지 말고 덮어주기 바랍니다. 상대의 허물과 약점을 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체 해줄 때, 상대가 감동합니다. 복음 외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3.건강한 자아상을 가집니다.

죄는 수치심, 서로에 대한 정죄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자기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을 몰고 오는 원인이 됩니다. 눈이 너무 밝아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서로를 바라볼 때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는 것은 자아상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본래는 자신을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영광스러운 창조의 걸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꾸밀 필요가 없고 있는 그대로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수치심이 일어났고 우리의 몸과 영혼에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자아상이 깨어져 부정적인 자아상이 생겼습니다. 서로 비교하며 평가하게 되고 열등감과 우월감이 찾아왔습니다. 가족관계 안에서도 형제끼리 비교하게 되어 가인은 열등감으로 인한 분노로 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가족관계 안에 열등감이 찾아오면 불행해집니다.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비교하는 것입니다. 언니에 비해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늘 비교를 당합니다. 언니가 미워지고, 열등감은 분노를 낳고 자존감을 훼손합니다. 

여자아이들은 외모로 인한 열등감이 많습니다. 딸이 예쁜 엄마를 닮지 않고 아빠를 닮아 못생겼을 때 무의식중에 아빠가 싫어집니다. 어떤 아이가 예쁘다는 것 하나로 특별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 분노가 치밀고 아빠의 얼굴이 괜히 보기 싫어집니다. 성형수술을 해달라고 조르지만, 성형수술이 결코 자아상을 바꾸어 놓지 못합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성형수술을 한 사람이 안 한 사람보다 상처가 더 많다고 합니다. 사랑방 모임에 갔다 와서 그 집의 아내나 남편과 비교하면 갑자기 우울해지고, 자존심이 상해서 말은 안 해도 나중에 보면 다른 핑계를 대고 사랑방에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랑방을 바꾸어 달라고 교구 목사님을 조르기도 하지만 사랑방을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두운 자아상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신분 상승이나 성공을 통해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학력에 목을 매고, 외모에 목숨을 걸지만, 더 불안하고 두려워집니다. 이 자아상의 상처는 결국 내면에 깊은 상처를 만들고, 부모가 이런 상처를 가지고 자녀를 대하면 자녀는 상처를 많이 받게 됩니다. 부모가 상처가 많으면 자녀도 상처가 많다고 합니다. 자존감이 높고 원만한 성격의 자녀들은 좋은 자아상을 가진 건강한 부모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입니다. 건강한 가정은 공부를 못하는 아이도 존중합니다. 공부만 못하는 것이지 잘하는 것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수와 문제를 가지고 그 영혼과 관계를 파괴하고 무시하는 언어가 얼마나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돈을 많이 벌어 와야 남편을 사랑합니까? 아내가 늘 건강하고 멋져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런 조건들을 가지고 사랑한다면 사랑받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아가서에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너는 검으나 아름다우니” 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이 말은 상대의 단점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안에 건강한 자아상이 있을 때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주는 축복은 자아상의 회복입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완벽함 자체입니다. 창조의 절정이었습니다. 인간은 꽃보다 아름다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최상, 최고 완벽한 상태였습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영광스러웠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는 순간 인류 최초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로다” 

새 번역에서는 “이제 나타났구나, 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타락하는 순간 영혼만 타락한 것이 아니고 몸도 타락합니다. 죽지도 늙지도 않게 만들어졌던 인간의 육체에 있던 영광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우리를 다시 회복시킬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광의 회복, 자존감의 회복입니다. 비교하지도, 비교당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될 때 그것이 삶에 안정감이 됩니다. 내가 무엇을 더 갖추거나 외적인 조건이 좋아야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시고 이 땅에 유일한 한 사람처럼 사랑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더이상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거나 낮은 자존감, 열등감에 시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 안에서 회복된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매우 긍정적입니다. 내가 나를 바라볼 때도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회복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이 있고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자아상을 통해 다른 사람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귀하게 대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렇게 보아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의 가족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과 딸로 존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가정 안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 관계가 회복되고, 깨어진 부분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으로 서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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