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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따라 행하라! (갈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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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따라 행하라!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 : 16 - 18)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것을 언제나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2012 런던올림픽. 공기권총 남자 10m 진종오, 사격 여자 권총 25m 김장미, 펜싱 여자 사브르 김지연(익산시청소속), 남자 양궁 개인 오진혁, 유도 남자 81㎏급 김재범, 유도 남자 90kg 이하급 송대남, 남자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6kg급 김현우. 

2012 런던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66㎏급 우승자 김현우. 오른쪽 눈은 주먹만 하게, 시퍼렇게 부어 있습니다. 앞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예선전부터 계속 상대 선수와 부딪힌 것이 결승전을 앞두고 크게 부어오른 것입니다. 김현우는 “나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린 선수가 있다면 금메달을 가져가도 좋다.”고 했을 만큼 땀을 많이 흘리며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태생부터 운동선수 체질’이라지만, 오전 6시부터 아침훈련, 웨이트트레이닝, 매트 훈련, 야간 훈련으로 이어지는 하루 10시간이 넘는 운동을 버텨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 타고난 체형과 근력을 가진 데다 ‘죽기 살기로 해서 하늘을 감동시키고 싶었다.’고 할 정도로 땀을 흘린 대가이자, 훈련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훈련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는 말입니다. 영적 생활에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다섯 개로 보였다가 여섯 개로 보였다하는 오륙도처럼, 육에 속한 사람인지 영에 속한 사람인지 헛갈리는 어중간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지만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고전 3:1)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에 속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났지만 자라나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b)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의 유치한 모습을 벗고 온전한 모습을 갖추어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상대가 있는 싸움입니다. 경쟁 없이 메달을 딴 선수가 누가 있습니까? 엄청난 훈련과 치열한 경쟁을 통하여 마침내 싸움에서 이긴 것입니다. 영적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충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I. 충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그 삶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갈2:16)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갈 5:5). 그런데 성령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한 마디로 충돌입니다.

먼저, 17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7a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새번역]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거스르다[katav/카타]’는 말은 ‘화해할 수 없는 두 상대의 철저한 상호 대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소원은 육체의 욕망과 대립합니다. 

1. 서로 거스릅니다.

우가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영에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그 동안 우리의 영을 지배하고 있던 세상의 영이 저항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도 육체의 욕심은 우리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육체와 마음을 통하여 우리를 공격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실제의 삶에서 경험하는 ‘갈등’입니다. 

이것은 우리만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경험하였던 고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교회에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고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7:21)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고 절망하였습니다.

자신의 영에 성령님을 모셔 들인 사람이라도 아직 천사가 아닙니다. 여전히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충돌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한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나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을 이야기하기 전에, 오늘 말씀에서 하나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거슬리는 것을 또 무엇이라고 합니까? 또 그 결과로 어떤 일이 있습니까?

17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7b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안에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합니다. 여기에서 ‘대적하다[ajntivkeimai/안티케이마이]’는 말은 ‘반대하다’는 말입니다. 상징적으로 증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육체의 욕망과 성령은 거스르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대적합니다. 결코 어울릴 수 없습니다.


2. 서로 대적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망설이고, 고민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생각이 복잡하여 미칠 지경일 것입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잠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밥맛을 잃고 몸도 쇠약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에서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서로 거스르고 대적하게 되면 우리는 영적으로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피곤함은 자신의 몸과 맘에 그대로 영향을 끼칩니다. 이것이 질병이 되기도 하고, 이것이 인생 실패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옹기장수가 강 언덕에 옹기 지게를 받쳐놓고 한잠 늘어지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회리바람이 불어와 지게가 넘어졌습니다. 가난한 옹기장수의 전 재산이 순식간에 깨어져 버렸습니다. 억울한 옹기장수는 그 고을 원님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지요. 그러나 딱하기는 원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된 것을 어디 가서 바람을 잡아다가 족칠 수가 있겠습니까? 고민하던 원님이 사령들에게 명령을 하였다지요. 강에 가서 뱃사공을 잡아오라고. 추상같은 원님의 명령으로 죄 없는 사공들이 잡혀왔습니다. 

원님이 동쪽에서 짐을 실고 오는 사공들에게 묻습니다.
“자네들은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불기를 바라는가?”
“예, 저희들은 동풍이 불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는 서쪽에서 짐을 실고 오는 사공들에게 묻습니다.
“자네들은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불기를 바라는가?”
“예, 저희들은 서풍이 불기를 바랍니다.”

원님이 말합니다.
“이 놈들아! 너희들이 한쪽에서는 ‘동풍아 불어라!’ 하고, 또 한쪽에서는 ‘서풍아 불어라!’ 하였으니, 동풍과 서풍이 마주쳐서 회오리바람이 되어 옹기 짐이 넘어지지 않았느냐! 너희들이 옹기 값을 물어주어라!”
지혜로운 원님의 재판이라는 옛날이야기 입니다.

한쪽에서는 ‘동풍아 불어라!’ 하고, 또 한쪽에서는 ‘서풍아 불어라!’ 하니, 동풍과 서풍이 마주쳐서 회오리바람이 되었다는 것이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꼭 그렇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록 거듭난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성령의 소원과 육체의 소욕이 충돌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지금 전쟁터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그렇다면 계속 우리의 마음이 전쟁터가 되도록 두어야 하는 것입니까?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며 탄식만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르고 대적하여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겠지만, 승리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법이 인도하는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II. 따름

요즘 정치권에서 ‘5.16’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 것 같습니다. 즉 ‘5.16이 쿠데타냐 혁명이냐’는 정의조차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후보자 토론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저는 ‘5:16’을 매우 좋아합니다. 이것은 매우 혁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에 있었던 정치군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갈516’,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갈516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떠하여야 할지를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정치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서 ‘성령을 따라’는 ‘성령 안에서(in)’ 또는 ‘성령에 의하여(by)’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행하라[peripatevw/페리파테오]’는 말은 ‘주위를 걷다’, 즉 ‘두루 다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은 ‘성령 안에서 걸어 다녀라.’(KJV. Walk in the Spirit)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육체의 욕심은 자제하기 어려운 인간의 욕망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로 가득한 존재 속에 있는 열정은 성령님과 거슬립니다. 육체의 욕심으로 인간을 충동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1.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까?

1) 먼저, 성령님을 인정하십시오.

우리가 성령님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정할 때만이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경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우리 속에 계십니다. 자신의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계신다는 말씀 그대로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191장 후렴)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을 믿는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의 따라 사는 첫걸음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신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이제 함께 계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여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2) 말씀으로 기도하십시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구약에서 부터 사용된 가장 오래된 방법입니다. 시편 19:14 말씀입니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8)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늘 묵상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습니다. 말씀은 곧 그의 기도 내용이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내용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탁월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위인들의 방법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그의 오랜 친구인 페터 베그켄도르프에게서 ‘온전히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에, 루터는 현재 그 자신이 하고 있는 기도 방법 몇 가지 소개하였습니다. 그것은 ‘주의 기도로 드리는 기도 방법’, ‘십계명으로 드리는 기도 방법’, ‘사도신경에 관한 묵상 기도 방법’ 등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나 십계명, 또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차근차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주의 기도로 드리는 기도 방법은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구절을 외우고 나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 하나님. 사랑의 아버지시여! 당신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와 온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의 내용으로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그 내용으로 기도함으로 그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님을 따라 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기 위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여기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성령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지만 그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잃어버리니 삶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을 따라가는 어중간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곤고한 영혼의 방황을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신앙의 사활이 달렸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함께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말씀의 내용으로 묵상할 때, 그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도하다[a[gw/아고]’는 ‘데리고 가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께서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느끼고 그 인도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2.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인도하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마음에 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1) 평안을 누리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로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평강을 빌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1)하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평안을 누려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평안은 제자들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두려움이나 근심이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할 때, 우리는 단호하게 “성령님! 나를 인도하시옵소서!”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선포하여야 합니다.

“성령님! 나를 인도하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평안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 조금도 근심거리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비록 근심거리가 있더라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데서 오는 평안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여러분, 자신의 평안을 기도하십시오. 가정의 평안을 기도하십시오. 교회의 평안을 기도하십시오. 사회의 평안을 기도하십시오. 나라의 평안을 기도하십시오. 세계의 평안을 기도하십시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평안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평안을 누리는 것은 자칫 소극적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는 적극적으로 행동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2) 작은 일부터 순종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의 영적 특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23a)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 성화를 이루어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메달을 따는 선수가 절제하고 훈련하는 것처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위하여 먼저 말씀을 펴시고 마음의 눈을 여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세계적인 선교학자인 하워드 스나이더는 “성령 안에서 살라. 이를 위한 최상의 방법은 매일 기도, 성경공부, 다른 신자들과의 친밀한 교제의 삶을 통한 것이다. 소그릅(=속회)은 이에 매우 유용하다.”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매우 평범한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원한다면 우리가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다른 성도들과 교제를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입에 나오는 그 말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을 통하여 기도로 찬양으로 섬김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거스르고 대적하는 세상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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