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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자유 (갈 5: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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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 (갈라디아서 5:1, 13-15)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우리가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더 이상 율법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말하는 자유가 어떤 제약도 제한도 받지 않는 무정부상태를 의미한다고 오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바울을 비방하는 좋은 구실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안에 번져가는 이런 불필요한 오해와 비방을 멈추게 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확실하게 증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무엇인가 그 정신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본문 1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사람 혹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니 이 말 속에는 이미 자유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지셨을 뿐 아니라 율법의 엄격한 통제와 요구로부터 자유를 주신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신 부르심은 쉼, 곧 이 모든 멍에와 짐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우들에게 가르쳤던 자유는 모든 통제로부터 벗어난 무정부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얻기 위해 인간적인 공력을 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런 공포와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나의 노력으로 얻어진 보상이나 댓가가 아니라 나를 부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은혜의 선물입니다.   자유에로의 부르심을 선언한 바울은 곧이어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무엇인가 그 정신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자유가 아닙니다.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육체의 탐욕을 맘껏 누리기 위한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이때 육체란 말은 우리 인생의 타락한 본성, 아집으로 뒤틀려 범죄하기 쉬운 본바탕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 자유를 주셨는데 배은망덕하게도 이 자유를 남용하여 또 다시 이런 죄를 범할 기회로 삼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유라고?  야! 신난다.  이제부터는 무엇이든 내 맘대로 해도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면 초등학교 어린이 수준이 아닌가요?
  
8.15해방 후 자유를 오해하여 일어났던 웃지못할 재밌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식당에 들어가 맘껏 먹은 다음 밥값 내라는 주인에게 ‘세상에 자유가 왔는데 무슨 돈을 내라고 하느냐?   내가 내 발로 이 식당에 와서 내 입으로 먹고 싶은 것 먹고 나가는데 왜 나의 자유를 가로막느냐’ 되레 큰소리 쳤답니다.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자유의 의미를 오해한 사람들이 초딩처럼(?) 그런 웃지못할 행동을 하였습니다.   

은혜의 선물로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은 그 자유를 육신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남용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뜻대로 살면서 ‘나는 자유하다’ 외칩니다.   용감하게 죄를 짓고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 굳게 믿으며 무슨 짓을 해도 끄덕없다고 무식하게 자신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하신다고 믿는 그 믿음은 가상한데 죄를 짓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또 진심으로 회개하는 정직한 모습이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범죄하고 형식적으로 회개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회개도 믿음도 아닙니다.

자유의 정신을 바로 알고 행동할 때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한국에서는 아파트 주민들이 층간소음과 담배 연기 때문에 이웃간 다툼이 일어나고 살인극까지 벌어집니다.   내 집에서 무슨 짓을 하든 내 자유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교통  신호등은 안전과 질서를 위해 있는 규칙입니다.  운전자가 이 규칙을 무시하고 자유를 외치며 역주행을 하거나 빨간불에도 달리면 사고를 일으켜 나도 다치고 남도 다치게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거주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치 좋고 전망 좋은 남의 땅에 내 맘대로 집을 짓고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있다고 명시되었으니 다른 사람의 명예와 권리,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는 말이나 글을 맘내키는대로 써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얼굴 없는 인터넷 대화에서 무차별 인신공격과 근거 없는 거짓말로 남을 비방하는 행동은 표현의 자유를 넘어선 방종이며 범죄행위입니다.  

철없는 초등학생들과 청소년들이 단체 문자 채팅으로 한 사람을 집중 공격하여 괴롭히는 왕따놀이를 재미로 하고 있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이 정신적 고통을 겪고 충격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는 기막힌 일들이 벌어집니다.   재미로 하는 놀이라지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고 불쾌감을 주는 나의 재미있는 놀이는 자유를 남용한 범죄행위가 되어버렸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휘두르는 혀끝과 붓끝 역시 자유를 남용하는 무책임한 행동들이며 대단히 위험한 집단들입니다.   사람들의 인기와 표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도 만들어 내고 또 정당화시키는 기막힌 재주들이 있습니다.   정치적 경쟁자를 흠집내기 위해 쏟아내는 미확인 정보들은 자유를 넘어선 유치한 행동들입니다.   진실을 알지 못한채 우르르 몰려다니는 군중들의 어리석음도 딱하지만 군중의 어리석음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의 사악함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자유로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실수를 자주 범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형제 중에 누군가 범죄한 사실이 드러나면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주고 너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갈6:1) 했습니다.   ‘짐을 진 사람을 보거든 그 짐을 서로 져줌으로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는 말씀은 바로 뒤에 나오는 자유의 세번째 정신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합니다.   

아무튼 누구든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는 그것이 자기를 스스로 속임이 됨을 명심하고 너무 쉽게 그리고 무책임하게 형제와 자매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나의 자유를 통제하기 바랍니다.  사람은 절대로 입법자나 심판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주고 살리신 형제자매를 나의 무책임한 혀로 살인하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재갈 물리지 않는 방종은 결코 자유가 아닙니다.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른 사람의 명예와 권리를 존중하고 질서를 지킬 때 비로소 개인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와 법의 정신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기적인 자유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자유입니다.   어떤 이들은 지식, 재능, 권력과 물질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약탈하며 나를 더 편안하게 만들고 나의 자유로움을 더 확보하는데 사용합니다.   세상은 이런 자유를 능력이라 불러주고 더 많은 자유를 얻으려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높은 지리에 오르려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육체를 자랑하고 그 육체를 돋보이게 하고 싶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서로 물고 먹는 것은 피차 망하는 길입니다.  서로 물고 먹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니라 정글의 법칙을 따르는 짐승의 본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나의 육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은 서로의 종이 되라 혹은 서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이웃을 섬기되 사랑으로 합니다.  사랑으로 하는 섬김은 억지로 하거나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자유의지를 따라 자발적으로 즐겁게 하는 일입니다.사도 베드로 역시 비슷한 명령을 하였습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벧전2:16)

자유를 주셨다면서 왜 종이 되라고 합니까?   종은 매인 사람이며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매여 종으로 살 때 최고의 자유를 누립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주 안에서 누리는 자유함 이것이 복음이며, 서로에게 종이 되는 자유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사랑의 포로가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종이 되어줍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사랑하는 연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를 챙겨줍니다.   이 섬김에 자존심 상함이나 굴욕을 느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낮아져 주시고 섬김의 본을 보이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사랑 외에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나를 종으로 부르심은 나의 자유를 억압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이 처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자유를 회복시켜주시는 부르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정하신 언약의 테두리 안에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게 되는 특권(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각종 짐승들의 이름을 부르면 그것이 곧 그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죄가 그들에게 찾아오기 전까지 그들은 무엇이든 마음이 원하는대로 할 수 있었던 자유인이었습니다.   네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은 먹지 말라 하신 한 가지 제한 외에 그 어떤 강제도 억압도 없이 그들의 자유는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유는 책임을 동반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는다는 하나님과의 계약은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볼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분명하게 선언하심입니다.   사람으로서 넘어서는 안될 선을 그어주셨습니다.   사람의 자유는 이처럼 일정 범위 안에서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 선을 넘었을 때는 그에 대한 책임 또한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케 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때 율법도 함께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율법이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노예문서라 부르지만 그들은 그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충분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백성의 삶을 버리고 이방민족들의 범죄에 가담할 것에 대비하여 주신 안전장치였습니다.   그들이 그 법을 따를 때 하나님의 보호가 보장되었지만 그 법을 귀찮은 것으로 여기고 벗어나려 할 때 죄를 범하였고 죄가 더할수록 율법은 무거운 족쇄와 쇠고랑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율법의 요약이라 부릅니다.   율법에 명시된 모든 조항들은 십계명을 기초하여 보다 세부적으로 나누어 가르치신 율례와 법도들입니다.   십계명을 자세히 공부한 분들은 알고 있는 것처럼 십계명은 크게 두가지 주제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하는 내용이고,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정신이 담겼습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 이방인들처럼 범죄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안전한 울타리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계명의 정신은 본래 사랑이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버거운 의무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못한 이기적인 자유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법을 저주와 심판의 법이 되게 하여 자신들을 부자유하게 묶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율법에 얽매인 사람들에게 찾아오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친히 보여주셨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워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기쁨,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에 대한 말씀을 이 다음에 나누기로 합니다.   다음 주일 오시기 전에 고린도전서 8장을 숙독하고 오시면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에 관한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다음 주일에 더 자세히 나누기로 하고 이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세번째 정신을 생각해봅시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을 무시하는 자유가 아니라 율법을 이루는 자유입니다.   마 22:35-40, 한 율법사가 시험하려고 예수께 질문하였습니다.  어떤 계명이 율법 중에 가장 큽니까?   예수님께 질문하던 율법사의 속셈을 들춰봅니다.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어떤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더 크고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알면 놓치지 않고 더 잘 지키겠다는 뜻이지만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계명을 더 잘 지킴으로 혹시라도 소홀히 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말을 들어봅시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 살인하지 말라 하셨으니 하나를 잘 지켰을지라도 다른 하나를 지키지 못하였다면 모든 것을 범한 셈이 된다’(약2:11)   율법은 모든 조항 중에 어떤 하나라도 범하면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하면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행동들을 율법의 조항처럼 세부적으로 정하고 그것들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켜 모범 성도가 되려고 한다고 합시다.   그런 선한 동기에서 시작한 일들이 어느날 나의 짐과 멍에가 되어 나를 누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조항들을 잘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것들은 잘 지키지 못했음을 발견하면 금방 죄의식을 가지고 죄책감에 빠집니다.   

내가 오늘은 너무 바빠 큐티를 건너뛰었구나.   하루 세끼 밥은 꼬박꼬박 찾아먹는데 영의 양식은 소홀하게 섭취하고 있으니 내 영혼은 병들었구나 라고 자책합니다.  규칙적인 말씀묵상과 경건훈련은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생활입니다.  그러나 말씀묵상은 내 영혼의 건강과 풍성한 삶을 위해 주신 것이지 나를 억압하고 감시하기 위해 채운 족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삶이 나에게 자유로움이 아닌 강제적인 규정이 되면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즉시 죄책감에 빠지고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 역시 언제나 만족하게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다 큰 것과 작은 것,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하여 큰 것은 가능하면 꼭 지키려 하고 작고 덜 중요하다 생각되는 것은 가끔 빠뜨려도 괜찮을 것이라 여기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주일예배 한 번도 안 빠지고 매일 성경읽기를 하며 헌금생활 열심히 하면 다른 조그마한 허물들은 혹시 덮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낸다고 합시다.  교회 안에서의 행동과 밖에서의 행동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자유를 상실한 모습입니다.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하던 의도와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사의 질문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외친 하나님의 뜻이 이 말씀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도 단순한 사랑의 계명을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은 쪼개고 또 세분화하였고 더 복잡하고 어렵게 해석하여 어지간한 사람은 아예 지킬 엄두가 나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물론 자기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고 사람들 눈에 잘 보이는 큰 계명만 골라 잘 지키는 척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며 비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대답을 주실까요?   율법사에게 하신 말씀처럼 또 사랑의 계명을 주실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이루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이 있으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하신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먼저 하고,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며 사랑의 법입니다.  

바울의 시대에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율법과 할례를 강요하여 교인들을 혼란에 몰아넣었던 율법주의자들에게도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율법사들을 호되게 꾸중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을 모르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인 사랑,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버리고 율법의 겉모양만 흉내내며 자기들이 가장 의롭고 선한 사람인양 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율법의 조항들을 어기고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참 정신을 알려주셨고 그 정신을 따라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깨우쳐주셨습니다.   

본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이 사랑을 은혜로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매여 살던 청년 사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 변하여 예수님이 몸으로 보여주신 이 자유의 복음을 전파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사는 영혼들이 이 복음으로 자유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사슬에 매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깨닫고 누린 그 자유가 우리 모두의 자유함이 되기 바랍니다.   자유에 이르는 오직 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으로 사는 새로운 한 주간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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