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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사람의 변화 (엡 4: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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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의 변화 

기구한 인생을 살면서 기생으로 살아가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가문이 좋은 남자가 그녀를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며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그녀가 일하고 있는 기생집에 몸값을 지불하고 그 여인에게 자유를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여인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해 결혼했습니다. 

남자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은 여인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과거에 웃음과 몸을 팔면서 살았다면 이제는 그러한 생활을 벗어 버리고 정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가꾸어 가야 할 것입니다. 가문과 법도에 맞는 옷과 생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남편에게 그런 사랑을 받아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남자에게나 애교를 부리고 함부로 욕을 하며, 술 담배를 뿜어대고 음담패설을 하며 사람들에게 구설수에 오른다면 그 남편과 자신 그리고 가문에도 덕이 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집 안에서 가족을 대할 때에도 새로운 마음가짐과 자세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부부가 중요한 모임에 나갈 때에도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자세를 배우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옛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가기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수많은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마침내 정숙하고 현숙한 부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런 원리입니다. 사단의 종으로 살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으로 십자가을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불하신 피 값으로 사단의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사단의 종으로 살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25절에서 ‘그런즉’ 이라고 말씀하시며 새 사람이 되었으니 생활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27절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사단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부터 다시 빼앗아 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보면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단은 지금도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아 헤매는 것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 사단이 놓은 올무에 걸리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단이 헤집고 들어올 수 있는 틈을 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해 사단의 먹잇감이나 놀림감이 되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가 된다고 30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단의 종이었던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닮아가야 하는데 그런 영적인 훈련을 ‘경건 훈련’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경건 훈련의 내용으로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하나인 ‘말’의 경건 훈련에 대해 말씀을 함께 나누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말, 즉 언어에 있어서 경건 훈련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5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거짓말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9절의 말씀을 통해서도 말의 변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말의 경건 훈련을 하면서 소극적으로는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덕을 세우는 말을 하고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지체가 작은 혀입니다.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소망과 생명을 줄 수도 있고 반대로 절망과 고통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한 번은 ‘가위’와 ‘톱’과 ‘혀’가 서로 입씨름을 벌였습니다. 가위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어떤 천이라도 조금도 흠을 내지 않고 내 이 빨로 끊어 낼 수 있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톱이 ‘너는 부드러운 천을 자르지만 내 이빨은 나무를 베어내고 장작을 자를 수가 있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던 혀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빈정거리며 ‘너희들은 천과 나무를 자른다고 자랑하는데 나는 내 혀를 사용해서 너희들을 이용해 천을 자르고, 나무를 자르는 사람들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어. 사람의 명예를 한 순간에 불명예로 바꿀 수가 있고, 친구의 돈독한 우정을 불신으로 만들 수가 있고, 한 가정을 말 한마디로 파괴시킬 수도 있어. 더군다나 너희들의 입은 사용하면 할수록 닳아 무뎌지지만 내 입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날카로워져’ 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서 8절에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곳을 통해 우리에게 말에 대해 조심할 것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말은 불과 같은 양면의 속성이 있어 잘 사용하면 힘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재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잘 사용하면 생명을 만들지만 잘못 사용하면 죽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에 대해 조심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특히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보면 거짓말을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을 매우 중한 죄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에 제 구계명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것을 살인과 간음죄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로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몸은 머리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때 건강한 것입니다. 몸이 분열되고 따로 따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병든 것입니다. 거짓말은 하나가 된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다투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짓말은 자신에게 순간적으로는 이익이 있는 것 같지만 거짓말의 가장 큰 피해자는 자신입니다. 저는 거짓말을 한센병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한센병자는 손으로 뜨거운 것을 만져도,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위기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체들에게 참된 정보를 주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한센병자의 몸 전체는 더 큰 위험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거짓말은 양심을 조금씩 무뎌지게 만듭니다. 거짓말로 양심이 무뎌지면 자신이 멸망의 길로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거짓말은 가족들 속에서 불신과 아픔을 만들어 냅니다. 이웃과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 속에 분열과 절망을 만듭니다. 

거짓은 불의가 정의를 지배하는 잘못된 관계와 사회를 만듭니다. 거짓은 서로에게 불신을 만들어 냅니다. 거짓말의 가장 무서운 벌은 서로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말을 믿지 않으면 의심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거짓은 모두를 죽이는 것입니다. 불신의 관계와 가정, 사회는 밝은 미래가 없습니다. 끝없는 갈등과 분노와 고통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말하지 말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기 때문에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혜의 책이라고 하는 탈무드에 보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진실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분명히 진실인데도 거짓말보다 못한 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해치는 진실입니다. 

예를 들어 못생긴 여성 앞에서 ‘당신은 정말 못생겼어’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못생긴 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진실도 거짓말처럼 상대방을 상처와 고통, 심하면 죽음으로까지 내 몰아갈 수 있습니다. 진실은 진실인데 말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 있어 상대방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고, 가정과 공동체를 아픔으로 몰아가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거짓말 못지않게 상처를 줍니다. 아니 거짓말보다도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상대방은 그 거짓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시가 돋은 진실의 말은 그 아픔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픔의 원인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29절 말씀을 통해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옳은 말도 좋지만 옳은 말보다 더 귀한 말은 상대방을 살리는 좋은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덕을 세우는 말, 선한 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옳은 말도 좋지만 그 보다 더 좋은 말은 덕이 되는 말, 사람을 세우는 선한 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부 상담 전문가인 고트만 교수는 부부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평소에 좋은 감정을 감정 은행에 저축해 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힘든 일이 생기면 그 동안에 저축해 놓은 좋은 감정으로 그 어려움은 해결해 나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고트만 교수는 부부가 행복하게 살려면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의 비율이 5:1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좋은 감정이 다섯 개가 있어야 나쁜 감정이 하나 일어났을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평상시에 부부가 좋은 감정이 아니라 나쁜 감정이 더 많이 쌓여 있는데 그 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것입니다. 대판 싸움이 일어나고 살벌해집니다. 한 가지 좋은 감정이 있어도 그동안 쌓여 있는 나쁜 감정으로 인해 희석이 되어 좋은 감정을 누리지도 못합니다.

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서로에게 좋은 말을 다섯 번 하는 관계가 될 때 한 가지 정도 충고를 하고 지적을 해도 좋은 관계가 유지됩니다. 항상 지적하고 불평하고 공격하면서 관계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자기중심의 욕심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부부 사이에서, 자녀들과의 사이에서 평상시에 사용하는 언어가 긍정적인 좋은 감정을 담고 있는 언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가시가 돋친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감정 은행에 어떤 감정의 언어가 더 많이 쌓여 있습니까?

한 주 동안 우리의 말을 성령님 안에서 점검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단이 좋아하는 말을 하고 있는지 성령님이 좋아하는 말을 하고 있는지 말의 습관을 점검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익숙한 언어의 습관을 벗고 어색한 언어의 습관으로 다시 입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언어는 내 마음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과 감정이 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말의 변화는 내면의 세계의 변화가 일어나야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평상시에 하던 대로 해, 갑자기 달라지면 죽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맞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내가 죽어야 삽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부정적인 언어에서 자꾸 죽는 연습을 할 때 그 안에서 긍정적인 언어가 부활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나의 언어의 부활만이 아니라 나의 가족의 언어 부활이고, 공동체의 언어 부활로 이어집니다. 부정적인 말이 죽고 긍정적인 말이 부활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집니다. 우리의 말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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