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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먹는 것과 무엇을 구하는 것 (출 15:24-26, 마 6: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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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는 것과 무엇을 구하는 것 (출 15:24-26, 마 6:31-34)

프랑스의 문명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1986년 ‘신국부론’에서 1960년대에 저주 받은 한 나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국토는 작고, 인구는 많다. 자원은 전혀 없다. 국민 80%가 문맹이고, 외국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했다. 1961년까지만 해도 전문가들은 이 나라가 끝났다고 했다. 74개 후진국 명단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60위였으나 이 나라는 그러나 25년 뒤에 9위가 되었다”. 어느 나라일까요?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지금은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세계 5위의 스포츠강국으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나라의 1960년도 경제규모(GDP)는 20억 달러였습니다. 1인당 소득은 8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2011에는 경제규모가 1조10억 달러이고, 1인당 소득은 20,757달러입니다. 평균수명이 1971년에는 66.5세였으나 2010에는 79.5세이고 이제 80세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60년 전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은 오징어였고 수출국 순위도 100위이하였습니다. 

당시의 연간 수출액은 350만 달러였는데 지금의 10만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지금은 이미 수출액이 1조 달러 이상을 상회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인구 5천만 명에 개인소득 2만 달러 이상인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7개국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인터넷 1위, 휴대폰, 반도체, LCD모니터 생산 1위, 철강생산 5위, 고속전철 4위, 외환보유고 4위, 교육열 1위, GDP는 10위입니다. 우리나라는 종합국력에서 세계 9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자살률은 10만 명당 30명이 넘어 OECD 국가 가운데 1위입니다. 여성의 성형수술, 제왕절개, 여성흡연자, 낙태율이 각 세계 1위입니다. 남성 40대 사망률, 4,50대 여성대비 남성사망률, 자살률, 남녀 수명차가 7.5세로 각 세계 1위입니다. 이전보다 모든 면에서 잘 살게 되었는데 좋지 않는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습니다. 
  
삶의 질이란 경제, 창업기회, 통치행정, 교육, 건강, 치안안보, 개인자유, 사회 자본 등 8개 부문과 89개의 변수를 종합하여 진단하는 것입니다. 삶의 질에서 한국은 27위를 차지했습니다. 경제지수를 삶의 질과 행복지수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 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잘 살게 된 것은 경제적인 삶의 질이지, 심적인 삶의 질은 아닙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동안 우리가 추구하던 것이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마을운동 할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듣던 말이 “잘 살아보세!”였습니다. 경제적인 발전이 국가의 목표였습니다. 

이런 “잘 살아보세” 철학은 교회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도 부(富)를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으면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해진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것은 복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볼 땐 이런 논리는 신부론(信富論)입니다.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그 동안 무엇을 구했습니까? 경건과, 거룩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늘 급급하게 구한 것은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사는 집과, 돈을 구했습니다. 돈을 늘 구하다보니 돌았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이 모든 것이 늘 염려거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衣食住)를 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염려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은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과 우리가 진정 구해야 할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구해야 할 것을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가 구하는 것은 육적 생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6:31에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입는 문제는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히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도 입는 문제, 먹는 문제, 주택 문제는 가장 절실한 생존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그릇입니다. 몸이 없으면 영혼도 없습니다. 육체의 문제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우선적 과제입니다. 육적인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가지는 가장 긴급한 문제입니다. 먹는 문제는 인간의 염려의 대상이며, 유혹의 요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이 유혹을 당한 것은 먹는 문제였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의 열매를 먹은 것이 죄의 시발이었습니다. 물 문제는 항상 인간의 원망의 요인입니다.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에서 쓴 물을 만났을 때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쓴 물에 나뭇가지를 던지게 하여 단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옷도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항상 문젯거리입니다. 옷은 인간을 자장 유혹하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함락했을 때 하나님은 여리고에서 아무런 전리품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란 사람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의 금덩어리를 가져다가 자신의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아이성에서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옷은 인간에게 가장 유혹을 주는 요물입니다. 
  
‘막시무스의 지구에서 인간으로 유쾌하게 사는 법’이란 책에 보면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에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지요. 가까이에서 보면 걱정거리로 가득하지만 멀리서 보면 걱정할 일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라고 합니다. 

삶을 멀리서 보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더 크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은 우리가 그렇게 염려할 것이 못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피조물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 육적인 생존을 염려하고, 이것 때문에 투쟁하고, 이것 때문에 죽고 죽입니다. 
  
‘정글법칙’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생존경쟁, 적자생존, 약육강식, 이 모두가 먹고 살기 위한 투쟁입니다.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초원에는 건기가 되면 물을 찾기 위하여 동물들이 대이동을 합니다. 무나 얼룩말이나 영양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며 우기 때 생긴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강에 살고 있는 악어는 먹고 살려고 이동하고 있는 동물들을 자신도 먹고 살려고 잡아먹습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정글의 동물들과 비교해보면 크게 다르지 않는 그렇고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흔히 얘기할 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을 합니다. 가장 원초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인간은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들입니다. 먹고 사는 이 문제가 해결돼야 그 다음의 삶이 평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요리하는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살만 하면 더 맛있게 먹으려는 욕망을 가집니다. 그래서 식도락이니 미식가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입에 겨우 풀  칠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은 사치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생존의 문제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헬라어 부정과거형 시제로 말씀합니다. 아주 강한 명령입니다. “아주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절대금지의 강한 부정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존을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아버지가 부자이시고, 능력이 있는데 먹을 것을 염려하고, 입을 것을 염려하고, 등록금을 염려하고, 걱정하면 아버지에 대한 모독이며 부정입니다. 
  
그런 생존의 문제를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이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먹고 마시는 것만 추구하는 자를 말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 쫓기는 자를 말합니다. 
  
바울이 언급한 ‘육신’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육신의 능력으로 많은 일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대신 행할 수는 없습니다. 육신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나, 가치 있는 일이나,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성경의 인물 가운데서 가장 호화로운 삶을 살았던 왕입니다. 육적인 영화를 모두 누린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한탄합니다. 세상에서 온갖 육적 영화를 다 얻은 왕이 하는 말이기에 그말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직장도 없고 가난하여 장가를 못간 한 남자가 오랫동안 기도하는 중에 천사 나타나서 물었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남자는 너무 기뻐서 소원을 나열했습니다. “천사님, 전원주택 하나 주시고요, 100억 원이 들어있는 통장 하나 주시고, 또 예쁜 여자에게 장가가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 주세요”. 남자는 많은 욕심으로 모든 소원을 다 아뢰었습니다. 소원을 다 듣고 메모를 끝낸 천사는 “저기 총각님, 지금까지 설문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욕심으로도 인간의 필요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누가복음 12:15에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둘째, 우리가 구할 것은 영적 생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6:33에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구하라고 하신 것은 영적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영원한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듣고 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듯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질서에 온전히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착하게 선을 행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의를 구하게 되면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의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존문제를 외면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셔서 밀밭 사이를 지나시다가 밀을 손으로 비벼서 드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러 가는 제자들에게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옷 그 자체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벌 옷은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드셨습니다. 심지어 부활 후에도 제자들과 조반을 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삶의 중요성을 인정하셨습니다. 
  
육적인 것만 구하면 이방인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사람이 구하는 것은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육체보다 영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자기중심보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의식주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이란 조건절은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영적인 것을 먼저 구하면 육적인 것을 나중에 다 덤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18세기의 영성가 윌리엄 로우는 “당신의 몸은 병약하고 썩어가며 곧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을 온전케 하는 것보다 몸을 꾸미는데 더 집착하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육체를 위해 먼저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육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생령’(네페시 하야)으로 만드셨으므로 영적 만족이 있어야 참 만족이 있습니다. 육체적 만족만 가지고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합니다. 말씀이 먼저 있었고 그 말씀으로 모든 물질의 세계를 만드신 것입니다. 말씀이 물질세계의 창조의 도구입니다. 먼저 말씀을 구해야 물질의 세계를 얻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지혜를 구했습니다.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장수와 부귀와 영화를 다 주셨습니다. 영적인 것을 먼저 구하면 육적인 것을 다 덤으로 주십니다. 
  
요한삼서 2절에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합니다. 영혼이 범사의 모든 일보다 우선입니다. 영혼이 잘 돼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법입니다. 영혼이 못되고 인간적인 기준에서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면 오히려 그것이 화가 되고 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그 가운데 제일 마지막 말씀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의 모진 육체적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내 육체를 부탁합니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육체는 죽어져 가지만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보다 영혼을 구하셨습니다. 육체보다 영혼을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33년을 입으시고 사용하시려고 계획하시고 가지신 육체입니다. 예수님께도 육체는 33년이란 제한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말할 것도 없이 육체는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숙명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제한적인 육체를 위하여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고, 하나님께 영혼을 위해 구하는 것은 참 지혜입니다. 
  
신비주의자였던 엠마누엘 스베텐보리는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영체라고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육신에는 생명이 없다고 합니다. 인간의 육신이란 영체의 그릇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진정 구해야 할 것은 영입니다. 영을 구해야 육도 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제사장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영적 삶을 구하게 해야 합니다. 자녀의 영혼을 관리하고 돌보는 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자녀의 영적 삶보다 육적 삶에 관심을 가지고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태권도를 가르치고, 피아노를 가르치고,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만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청교도 자녀교육에는 이런 법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녀는 하나님께서 의탁하신 영혼이며, 둘째는 선생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가르쳐야 하며, 셋째는 훈련은 행동으로, 본으로, 삶으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의탁하신 영혼이므로 자녀의 영혼을 위하여 구하고, 영혼을 구하게 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입니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돈을 많이 벌면 부모가 덕을 볼 줄 아십니까? 영혼이 잘 되고, 예수를 잘 믿어야 덕을 봅니다. 아무리 사람의 눈에 보기에 근사하고 잘 되었다고 하더라도 영혼이 죽고, 영적인 삶을 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는 인간적인 좋은 스펙이 패망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창끝’이란 영화로 잘 알려진 짐 엘리엇은 대학을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헌신할 것을 친구들과 약속합니다. 그는 에콰도르 아마존 유역의 아우카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그들의 창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말을 많이 남겼는데 그 가운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는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육체를 버렸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바꾸는 것, 육체를 구하지 않고 영혼을 구하는 것이 승리의 삶입니다. 
  
마태복음 10:28에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육체를 구하고, 육체를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리석은 일입니다. 
  
  
결론 

착하고, 돈도 많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행을 많이 베풀던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착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믿지 않아 지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강도는 교도소에서 예수를 믿어 천당에 갔습니다. 인간의 구원이나 삶이란 불가사의에 속합니다. 구원이란 육신적 기준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에 착하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를 많이 했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영적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삶은 우리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인 삶을 성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인 삶을 잘 살려면 하나님을 구하세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소유인 나의 삶을 잘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과 구할 것은 인격의 차이입니다. 믿음의 성숙의 차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할 것을 알지 못하고 구하기만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영적인 것이고, 구하는 것은 육적인 것입니다. 구할 것을 아는 자는 성숙한 자입니다. 
  
세상의 것, 육적인 것을 좀 놓고, 하늘의 것, 영적인 것을 좀 단단히 붙잡고, 마땅히 구할 것, 영적인 삶을 구하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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