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도 바울의 염려 (고후 12:14-21)

첨부 1


사도 바울의 염려 (고후 12:14-21)
 
1980년 3월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하던 최고의 한 지성인이 폐수종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에게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치며,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곁에 서 있는 자기 아내에게조차 묻지를 못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리치고 발악하고 괴로워했던 이 사람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며, 수많은 수필을 쓰고 또한 주옥같은 글을 남기며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입니다.

결국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불란서의 신문들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싸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썩하였습니다. 그때 한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사르트르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인간은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두려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이런 저런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 41: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고, 평안하고 즐겁고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이 근심과 두려움과 염려 속에 빠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사람이고,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믿음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로 인해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망가지게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아는 사도 바울이 “나는 두려워한다. 염려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염려와 두려움이 인간적인 것이 아님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 겪는 고난의 삶에 대하여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고후 11:23-28절에 보면 “수없이 감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돌로 맞기도 하고,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을 당하기도 하며, 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동족들로부터, 거짓 형제들로부터 위험을 당하기도 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여러 번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외부적인 어려움만 있었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인 큰 질병이 있었습니다. 한가지의 어려움도 견디기 어려울 텐데 이처럼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에 많은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보다 더 자신의 마음을 누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를 위한 염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염려와 두려움은 인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공포 때문도 아닙니다. 육신적인 문제를 인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거룩한 염려, 곧 교회를 위해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염려하며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회에 짐이 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에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세 번째로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실제로 에베소에서 고린도를 방문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육지로의 길이 아니고 뱃길로 가는 바닷길이었으니 바람과 파도의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교회의 문제점과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마무리 짓기 위해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세웁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올바른 목자로서의 열정 때문에 세 번째 방문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문계획을 하면서 사도 바울은 만일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자신과 일행으로 인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피해를 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15절에 보면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은 고린도 교회들로부터 재물을 얻으려는 마음은 전혀 없고, 다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얻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재정적으로 짐이 될까봐 몹시 조심하였으며, 특히 고린도교회가 이런 것으로 문제를 삼자 더욱 조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소 생활의 곤란함이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전히 증거되고 받아들여지기를 원함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는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늘 바라고 간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가 그들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어린아이에, 자신을 부모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재물을 준비하는 것이지, 자녀가 부모를 위해 재물을 준비하지 않는 것처럼 영적인 자녀 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영적인 부모인 자신을 향해 물질적인 부담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모로서 '내리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바울의 심중에는 자신을 위한 생활비 문제는 아무래도 좋고 다만 고린도교회와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라고 성숙되어 지기만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위해서 재물만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허비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에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영혼이 구원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장성함에 이를 수만 있다면, 나의 없는 재물을 다 내어놓고 또 자신의 시간과 삶 전체를 다 내어 놓겠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교회를 위해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또 이렇게 내가 교회를 사랑했는데, 교회가 나를 더욱 사랑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즉 교회가 나를 더욱 사랑할 줄을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성도들이 이런 금전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을 두렵게 여기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재물이 아니라, 바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자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토록 복음사역을 감당하는 원인이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생명을 구원하고 영혼을 살리는 일에 힘쓰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2.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에 대해 오해하는 것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6-17절 말씀에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거짓교사들의 유혹에 빠져 사도 바울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모함하는 거짓 교사들은 끊임없이 성도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개인적으로 자기의 생활비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는 생활비보다도 더 큰 돈을 그가 챙긴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은 겉으로는 진실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교활한 속임수로 자기의 사욕을 채우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방하는 것은 8-9장에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돕기 위하여 고린도교회가 작정한 헌금을 서둘러 마무리하되 할 수만 있으면 풍성한 연보를 드림으로 그리하라고 권면하는 바울의 말을 빌미삼은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에게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모금의 문제를 독려하고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는 것도 못 마땅하게 여깁니다. 사도 바울이 모금한 돈을 직접 다루고 있지 않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그의 수중으로 다 떨어질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이렇게 주장함은 그들이 차지할 재물이 다른 용도로 흘러나가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는 간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비방의 말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고 반문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금의 공정을 위하여 이 모금한 헌금을 취급하는 사람을 선정함에 엄격함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자신은 물론 그가 파송한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한 헌금을 잘못 다루거나 착복하는 일이 없음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절의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이 파송한 디도,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하는 일행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는 동일한 성령으로 하기에 전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거스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해야 시간이 지나면 풀리겠지만 당하는 쪽은 말할 수 없이 괴롭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오직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장성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현실을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그들의 영혼이 잘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오해들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오해는 전혀 교회에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저런 조치를 취하고 나름대로 애쓰는 것은 오직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오해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러한 오해는 거룩한 성도의 교제를 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귀는 성도들끼리, 성도와 영적인 지도자간에 오해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로 서로 상처를 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영적인 미성숙은 오늘날 많은 이 땅의 많은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에 전력을 다 하기보다는 세상의 일들로 교회 안에 비난과 중상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성숙한 교회와 성도로서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 격려하며,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협력하며 잘 해 나가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성도로서, 그리고 한 성령을 따라 행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로서 성도 간에 서로 믿고 함께 힘을 모아 교회와 성도의 신앙의 성숙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이러한 성숙한 성도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책망들을 것을 염려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사람들의 평가보다는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또 내가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신앙적으로 잘 이끌지 못해 교회 안에, 그리고 성도들 가운데 문제가 생긴 것에 대해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하고 염려한다는 말입니다.

학교에서 반의 학생들이 잘못하면 선생님은 반장을 먼저 꾸중합니다. 아이가 잘못하면 부모를 책망합니다. 성도가 잘못하면 그 책망은 목회자에게 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와 성도들의 문제가 자신의 책임이 되어 하나님께 책망을 들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21절의 말씀을 보시면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다툼,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 그리고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 등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회개해야 할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두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크게 손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세속적이지 않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모든 일들을 회개하면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로 회복될 것입니다.
 
이처럼 고린도교회와 성도들이 모든 죄들에 대하여 회개하여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회복된다면 당연히 사도 바울이 세 번째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더라도 바울이 염려하는 것들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아주 기쁘고 반가운 방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고린도교회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린도교회를 섬겼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듯이 고린도교회를 영적인 아비의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자신의 재물을 허비하고 심지어는 자신까지 교회를 위해서 허비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섬겼지만 교회와 성도들은 오히려 대적자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자신을 비난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온갖 험담을 다하며 바울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며,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호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자하는 의도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의 사도직이 변호되지 않으면 바울이 증거한 복음에 큰 송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어서 빨리 대적자들의 잘못된 유혹에서 벗어나서 바울에게로 돌아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로 회복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간절함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주님이 다시 영광을 받으시며 복음이 권세 있게 교회에 생명을 안겨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소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사랑하며 헌신하며 봉사했던 이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죄인을 위해서 아들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새 시대의 복음의 정신이며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우리의 교회 안에 이런 아름다운 복음의 정신이 불타올라야 할 것입니다. 영적지도자와 성도 사이에 이런 사랑의 관계가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와 성도들 사이에 또한 이런 복음의 위대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복음 안에는 어떤 자기주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격려하고 힘을 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 이런 교회를 통해서 주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본받고, 교회를 위해 염려하며 기도하는 성숙한 삶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