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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시 119:18-20, 막 10:4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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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시 119:18-20, 막 10:49-52)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모든 동물들은 잠을 잡니다. 동물들이 잠을 자는 시간은 조금씩 다 다릅니다. 낙타는 하루에 30분만 자면 하루 종일 사막을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코알라는 하루 종일 유칼립투스라는 나뭇잎을 먹고 잠자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이 가장 힘든 고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래로 잠이 보약이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잘 때는 눈을 감습니다. 잠이 오고 잠이 깨는 것은 멜라토닌이란 호르몬의 영향입니다. 태양빛이 눈에 들어가면 멜라토닌 호르몬의 분비가 감소되어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반면에 잠을 잘 때는 멜라토닌의 분비가 증가되어 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뇌가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을 자는 것은 신체가 휴식에 들어갔음을 말합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활동하는 것이며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잠을 자려면 맨 먼저 눈을 감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만 있어도 쉬는 것이고, 눈을 감고 있다 보면 잠이 오고, 눈을 감고 있으면 활동이 멈춰지게 되는 법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신다고 합니다. 신명기 32:10에는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동자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지으신 창조의 신비를 보세요. 겹겹이 보호 장치를 만드셨습니다. 눈썹이 있어 이마의 땀이 눈에 들어가는 것을 막습니다. 속눈썹이 있어 먼지가 눈에 들어가는 것을 걸러줍니다. 눈꺼풀이 있어 눈을 덮어주고 보호합니다. 눈물이 나서 눈동자를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한 먼지 등을 모아서 눈곱을 만들어 눈을 청결하게 합니다. 이 모두가 눈동자를 보호하는 장치들입니다. 특히 눈꺼풀은 위험한 상황에서 물체가 눈에 들어오게 되면 저절로 내려와 닫힙니다. 완전자동 개폐식 뚜껑이 눈꺼풀입니다. 눈이 닫히면 눈동자는 보호를 받습니다. 
  
눈이 닫히면 보호도 받지만 볼 수도 없습니다. 잠도 오기 시작합니다. 눈꺼풀이 내려온다는 것은 잠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누니 닫히면 볼 수 없기 때문에 상황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자면서 알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조카 롯이 떠난 후에 아브람은 헤브론에 거주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너는 눈을 들어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창 13:14). 이 말씀은 10절과 대조를 이룹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롯은 자신의 육신의 눈을 가지고 욕심으로 보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이 여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여시면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미래를 환히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미국에서 ‘That's Incredible’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12세 소년이 아빠와 낚시를 갔습니다. 차를 세워두고 작은 텐트를 치고 낚시를 하는데 갑자기 아빠가 심장에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응급대원들과도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이 소년은 한 번도 운전해 본 적이 없지만 아빠를 차에 태워 운전을 해서병원에 까지 무사히 도착하여 아빠를 응급소생술로 살렸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온 소년에게 “어떻게 운전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할 수 있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소년은 “아빠 옆자리에 앉아 아빠가 운전하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본 그대로 해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습득하고 배울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야구선수였던 요기 베라는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운동경기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기술과 전술을 배웁니다. 동영상물을 통하여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눈이 떠져서 봐야 합니다. 이것이 학습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시편 119편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이 시편에서 하나님께 “내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아룁니다. 눈이 열려 주님을 보고, 말씀을 깨닫고, 자신을 점검하고, 세상을 두루 바라보는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내 눈을 열어 주셔야 내 눈이 뜨입니다. 

시편 119:18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내가 뜨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을 열러주셔야 뜨입니다. 눈을 만드신 분이 누구십니까? 만드신 그 분이 눈을 여셔야 볼 수 있습니다. 눈이 하나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므로 내가 열지 못합니다. 만드신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셔야 내 눈이 열립니다. 
  
저는 눈을 다쳐봐서 눈이 얼마나 화려한 창조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운동하다가 눈을 다쳐 한 주간 동안 거의 보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눈이 얼마나 귀한 창조이며, 얼마나 소중한 기관인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눈을 묘하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시력을 회복하려면 120만개의 섬유조직을 눈에서 뇌까지 정확하게 순서를 맞게 붙여야 한답니다. 눈은 매초마다 10억 개의 메시지를 뇌에 보냅니다. 눈을 통하여 보내는 정보가 신체 다른 부위의 전부가 보내는 양의 두 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정보의 80퍼센트는 눈을 통하여 받아들입니다. 눈이 얼마나 묘합니까? 
  
시각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하려면 각막을 기증받아 이식하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도 안구기증을 하셨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제일 먼저 안과의사 두 분이 와서 선친의 안구의 각막을 가지고 갔습니다. 돌아가시자마자 칼을 들고 들어오니 기분이 좀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군지 알 수 없지만 그 각막으로 시력을 회복한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각막은 아주 작습니다. 12밀리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각막을 이식받으면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모릅니다. 각막이란 아주 조그마한 안구의 일  부분이지만 이것 때문에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는 아람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람왕의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가 예루살렘 성읍을 에워쌌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말과 병거와 군사를 보고 엘리사에게 달려와 알리면서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라고 두려워합니다.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기도하며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엘리사의 기도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그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라고 합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불 말과 불 병거가 가득 엘리사를 둘러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사가 또 기도하기를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라고 하였을 때 아람왕의 군대의 눈을 멀게 하셔서 그들을 혼란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눈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눈을 여시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람의 원수들의 눈을 닫기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되어진 일을 얘기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누가복음 24:31에는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라고 합니다. 떡을 떼어주신 것은 떡이 아니라 눈을 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의지를 의미합니다. 눈은 주님이 열어주셔야 비로소 열립니다. 주님이 여신 눈이 열려야 보입니다. 
  
눈이 열리면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주님도 보이고, 말씀도 보이고, 세상도 보이고, 사명도 보이고, 섬길 자도 보입니다. 흔히 어떤 일에 익숙하게 되면 “눈이 열리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술, 운동, 기술, 학문 등 모든 분야에서 눈이 열리면 길이 보이소, 진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달인’의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오랫동안 어떤 일을 한다고 모두가 달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영감이 있어야 달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면 양궁도 바람이 부는 방향과 세기에 따라 오조준을 해야 화살이 날아 과녁 중앙에 꽂히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51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시각장애인에게 왜 “보기를 원하느냐?”라고 합니까? 왜 시각장애인은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합니까? 내가 보면 돼지, 왜 눈을 감고 있습니까? 내가 뜨면 돼지 왜 뜨지 않고 있습니까? 그런데 보는 것도, 눈을 뜨는 것도 다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열어주셔야 열리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실 메시야인지 확인하게 하였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라고 하시면서 마태복음 11:5에는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맹인이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을 보게 하신 기적도 메시야적 기적이라고 합니다. 
  
본회퍼는 “눈을 불순한 도구로 삼는 자는 그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눈을 불순하게 만드는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까닭은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의 눈을 여셔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내 눈이 열려야 주의 말씀의 놀라운 것을 봅니다. 

시편 119:18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눈이 열려 무엇을 합니까? 말씀의 놀라운 것을 보기 위하여 눈을 열어달라고 합니다. 다른 것에 눈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눈이 열리게 해달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사람들이 눈이 열리면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엉뚱한 데 눈을 뜹니다. 눈이 열려 오히려 죄를 짓게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사는 게 죄를 짓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추한 것들을 아예 보지 않는 것이 편할 때가 많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을 보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고난도 아닙니다. 욥은 그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믿음은 위대합니다. 욥기 42:5에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합니다. 그가 고난 가운데 눈이 열려 주님을 보았습니다. 욥은 정말 눈이 열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눈이 열릴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가르치심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까? 누가복음 8:10에는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열려야 말씀의 놀라운 가치를 알게 됩니다. 눈이 열리지 않으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1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한의 눈을 열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게 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계시를 보이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요한계시록 21:1에는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한의 눈을 열어 하나님 나라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밝은 빛을 보고 눈이 멀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눈이 멀어진 것입니다.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아를 만나므로 감겼던 눈이 떠졌습니다. 그후 바울은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준비하면서 율법에서 복음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찾은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선교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말씀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떠진 그 눈으로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세안식’(洗眼式)을 합니다. ‘세안식’은 문자 그대로 눈을 씻는 예식입니다. 사울의 눈이 열렸듯이 눈을 뜨는 의식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저명한 잡지의 편집장을 지냈고, 유엔 대사를 지냈던 헨리 그룬왈드는 황반변성이란 병으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시력을 상실한 다음에 그는 ‘나는 마음으로 봅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의 이 책에서 “보지 않아 감사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보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육적인 눈이 보이지 않아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봐야 할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일전 어느 신문에 ‘특파원 코너’라는 란에 특파원이 쓴 글이 실렸습니다. 어느 미국 교포가 7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오랜 만에 한국을 방문한 교포는 너무나 변한 한국사회의 모습에 놀란 듯합니다. 그는 “여성들 옷차림 너무 야해지고 대중매체에서도 음란물 넘쳐나서 놀랐다”고 하더랍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인터넷신문을 보면 성인사이트 음란물을 방불케 하는 영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청소년들도 얼마든지 보는 사이트인데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즐비합니다. 눈만 뜨면 죄악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이 성인물에 무방비노출 된 것뿐만 아니라 아이 같은 어른도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유치한 어른들이 많이 몰래카메라로 여성을 촬영하고, 동네 노인들이 같은 동네 지적장애 소녀를 성폭행하였다고도 합니다. 눈이 엉뚱한 데에 열려 엉뚱한 데 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볼 수 없었더라면 얼마나 더 착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키엘케고르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악한데 눈이 열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열릴 데에 열려서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을 데에 열리지 말아서 세상의 추한 것들을 볼 수 없어야 합니다. 
  
신명기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준 모세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하셨습니다. 눈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지금도 말씀 가운데 살아 우리에게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찬송 366장에는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밝히시고 여시면 진리가 보입니다. 참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진리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는 하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구하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 1:1에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큰일을 미래에도 보고 살게 될 것입니다. 
  
  
결론 
  
기원전 5세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란 비극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고 하는 예언으로 태어난 테베의 왕자는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원하던 어머니를 얻어 결혼을 하였지만 그는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는 “즐겁게 볼 수 없는데 눈으로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라고 하면서 결국 자신 눈을 뽑고 테베를 떠납니다. 즐겁게 볼 수 없고, 좋은 것을 볼 수 없다면 눈이 필요 없습니다. 눈이 열릴 가치도 없습니다. 눈이 열리면 좋은 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 좋은 것을 보게 하시고, 놀라운 말씀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눈이 열려 세상의 추한 것이 아니라 신비한 주님의 세계를 발견하고 늘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눈이 맑고 좋은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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