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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청지기입니까? (눅 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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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지기입니까? (눅 16:1-13) 

저와 같이 Fuller 신학교에서 공부한 목사님들 중에 우스운 소리를 잘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장로님 아들들이 객기를 부리다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자기 아이들이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했다고 하여 장로님들이 교회를 떠나고 조금 있으니 안수집사들 중에도 직장이나 여러 사정으로 이사를 가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갑자기 벌어지니 그 목사님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때 마침 Fuller 동문 기도모임이 있어 참석했을 때 그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목사님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목회가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라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목사님들이 같이 웃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여운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서로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회복되어 교회를 잘 섬기고 있지만 살아가노라면 이런 아찔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떠합니까?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갑자기 나이를 의식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고 이제 이 나이에 자신에게 다른 일을 맡길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갑자기 직업을 잃어버리게 된 한 청지기의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난해한 구절들을 담고 있습니다. 왜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했을까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자칫하면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기에 기도하며 때로 고민하며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요즘 수요일 저녁에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공부합니다. 그 비유를 보면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과 새벽부터 와서 12시간을 일한 품꾼이 모두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받습니다. 그것을 인하여 불평하는 품꾼들을 향하여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주인이 대답합니다. 

얼핏 보면 포도원 주인은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너희들이 웬 참견이냐’ 하면서 고용인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악덕 고용주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주인이 나중에 온 품꾼들에게도 넉넉히 품삯을 주는 관대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에게 일한 만큼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품삯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고용주와 달리 품꾼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후견인으로 그려집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불의한 청지기,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 연락하는 부자 등 재물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세를 사는 성도들이 가져야할 성경적인 재물관을 가르쳐 주십니다. 

청지기가 위기에 몰립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고용된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주인이 듣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합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다시 말하면 ‘내가 왜 너에 관해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사무를 정리하게 하고 그를 해고할 뜻을 밝힙니다. 주인이 결산 장부를 반납하라고 한 것을 보면, 해고 사유가 청지기의 잘못된 재산 관리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쫓겨나는 청지기도 해고에 대하여 억울하다거나 부당하다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잘 나가던 청지기의 삶에 갑자기 위기가 닥칩니다. 청지기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빼앗으니”가 현재시제로 되어 있으니 청지기 직을 아직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런데 청지기는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이 주인이 자신의 직분을 빼앗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발단은 주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불의에 대해서는 뉘우침이 없이 자기 입장에서만 보기 때문에 억울해 하며 화를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청지기는 위기를 극복할 방도를 찾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까?” 절박한 심정의 표현입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그 당시 땅을 파는 일과 빌어먹는 일은 둘 다 천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땅을 파는 일은 보통 포로로 잡힌 종이나 아무 기술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으며, 가장 힘든 노동으로 여겼습니다. 자기는 땅을 팔 힘이 없다는 이유로 포기합니다. 

빌어먹는 일은 일종의 직업으로 많은 사람이 병으로 재난을 당했을 때 구걸을 했습니다. 거지들은 특히 예루살렘에 많았는데 성전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구걸의 대상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구걸로 버는 수입이 상당했으며, 어떤 이들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동정을 얻기 위하여 불구자인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청지기까지 한 사람이 길거리에서 구걸한다는 것도 부끄럽게 여겨 그 계획도 포기합니다.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합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8절)

무엇을 할지 계속 고민합니다. 왜 주인이 분노했을까? 어떻게 하면 주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봅니다. 위기에 처한 등장인물의 극적인 변화의 모습을 많이 사용하는 누가의 특징에 의하면, 청지기는 지금 전환점에 있습니다. 청지기의 독백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의 회심을 생각나게 합니다. 

둘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을 들고 나갈 때만 해도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가진 돈을 순식간에 탕진하고 게다가 그가 있는 곳에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돼지 치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심하다 보니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배불리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둘째는 비로소 아버지의 인자한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는 더 이상 아들로서가 아니라 그저 품꾼의 하나로 받아달라고 요청하려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옵니다. 진정한 회개자의 모습입니다. 

4절에 보면 청지기가 “알았도다”라고 혼자서 하는 말이 나옵니다. 어차피 쫓겨나야 하는 상황에서 아직 청지기의 권리가 있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게을렀던 청지기의 움직임이 빨라집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한 사람씩 불러다가 그들의 빚을 탕감하여 줍니다. 그가 강구한 대책은 주인의 채무자들에게 문서를 조작하게 하는 일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빚의 규모를 확인합니다. 그들은 해마다 소작료를 바치는 소작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빨리 앉아 ... 쓰라” 

비밀리에 부정한 일을 하는 청지기의 불안해하는 태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비유에는 두 사람을 언급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기름과 밀은 대표적인 생필품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감람유를 가리키며 연료와 식용 또는 의료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 ‘바투스’는 약 32리터에 해당되는 양입니다. 따라서 기름 백말은 약 3200리터나 됩니다. 다 자란 올리브 나무에서 평균적으로 25리터의 기름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3,200리터는 올리브 나무 120그루에서 나오는 양으로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00데나리온 정도입니다. 

‘석’이란 헬라어 단어 ‘코루스’로 약 360리터입니다. 밀 백 석은 약 100에이커 땅에서 소출될 수 있는 양이며, 돈으로 환산하면 2500데나리온이 됩니다. 탕감한 기름 50말이나 밀 20석이나 값으로 따져보면 똑같이 500데나리온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채무자들의 빚도 줄여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주인의 이름으로 행했을 것이므로 채무자들은 하나같이 관대함을 베푼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요 이 일을 처리하고 있는 청지기에도 감시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소작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저들을 도와주었으니 저들도 내가 어려워질 때 나를 영접해주겠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청지기가 처리한 일이 주인에게도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주인은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처리하였다고 칭찬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재산을 낭비한 것도 괘씸한데 문서까지 조작하였으니 너무 기가 막혀 그렇습니까? 칭찬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인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청지기가 자신의 미래를 준비한 것을 인하여 주인이 칭찬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인을 두 번이나 속이면서까지 단지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다는 것만으로 주인이 칭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청지기는 이미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일로 해고 통지를 받았습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이름으로 각 채무자의 채무액을 줄여준 것은 분명히 주인을 기만하고 속인 행위입니다. 

여기서 청지기의 이런 행위로 인해 주인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은 길에서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빚의 액수를 줄여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갑자기 받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으나 주인은 청지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이내 알았을 것입니다. 주인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청지기가 자신의 허락 없이 채무를 줄인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취소하거나, 아니면 이미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으며 관대하고 사랑이 많은 주인이란 평가를 받음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이름으로 빚을 줄여준 청지기가 확신했던 것은 주인이 결코 자신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은혜를 취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사람들의 빚을 줄여줌으로써 비록 주인의 재산에 약간의 손해는 나지만 이 일로 인해 주인의 평판이 좋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덩달아 불의한 자라는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도 회복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포도원 주인, 탕자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엄청난 부자로 나옵니다. 그들은 돈 몇 푼에 흔들릴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주인이 소유 자체에 관심을 두었다면 청지기가 빚을 깎아준 행동을 인하여 크게 분노하며 벌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를 내기보다 칭찬하였습니다. 주인은 청지기가 소작인들에게 깎아준 액수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것은 주인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또한 주인의 것을 관리하면서 주인의 명예를 올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세상 사람들도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이같이 행하는데 왜 빛의 아들들, 즉 믿는 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물전 망신 꼴뚜기가 시킨다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게으름을 필 때 자신들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일을 주의 뜻대로 감당하며 우리 자신의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원합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9절)

여기서 ‘불의한 재물’은 세상의 재물을, 그리고 친구는 그 재물로 섬겨서 구제받은 가난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불의의 재물”이란 말은 재물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주님의 뜻과 어긋나게 잘못 사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재물이 없어질 때는 청지기의 직무가 끝나는 때, 이생을 마감하는 때, 혹은 하나님 앞에 서는 때를 말합니다. 

이때가 개인의 종말이든, 역사의 종말이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로 사람을 사귀어 앞날을 예비한 것과 같이,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제자들도 세상의 모든 재물로 사람들을 섬겨서 장차 올 세상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그 친구들이 도움을 제공한 사람들을 거기서 영접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재물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영적인 일에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면 그들이 고마워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또 복을 주십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때를 생각하며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또한 나에게 맡겨진 직분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는 방법 가운데 돈과 소유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습니다. 세상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를 묻지만,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물으십니다. 세상의 관심은 받는데 있지만, 주님의 관심은 주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관심은 양에 있지만, 주님의 관심은 동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손에 쥔 것이 얼마인지를 묻지만, 주님은 남에게 나눠준 것이 얼마인지를 묻습니다. 돈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수단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는 ‘불의의 재물’ 곧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중에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때 거기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줄 친구들이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모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선교사님들을 통하여 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는 로버트박의 섬김으로 도움을 얻은 탈북자들, 김용진 선교사의 말라위 clinic을 통하여 치료받은 사람들, 최남영 선교사가 섬기는 티화나 지역의 멕시코 성도들, 유타지역에서 이교성 목사팀이 만든 김밥전도를 통하여 주님을 알게 된 유학생들, 에스더 박선교사의 Faith Walk를 통하여 구원받은 필리핀 대학생들, C국에서 K 선교사님의 전도를 통하여 주님의 제자가 된 소수민족 형제자매들, Food Bank에서 음식을 타던 저소득층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땅의 돈을 하늘의 은행에 송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그 돈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과 예수님의 주 되심을 믿는 자가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신 자는 주인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합니다. 참된 믿음은 이 악한 시대에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시는 가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을 경험한 신자들은 재물 사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반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인정받는 청지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혜란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약삭빠른 지혜가 아닙니다.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의 처신을 높이 산 이유는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미래만을 준비하였다면 결코 주인이 칭찬하지 않았을 것이요 도리어 사기죄로 더 큰 징계를 받았을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로 불린 것은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주인의 의도대로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을 주님 뜻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주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자입니다. 주인의 의도는 사람을 사귀는 용도로 재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선용할 때 잃어버린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많이 맺어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것을 사용하는 ‘의로운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2) 충성스럽게 행해야 합니다.

청지기란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주인이 맡긴 것을 관리하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청지기에게 필요한 덕목이 충성입니다. 맡은 일의 크기나 중요도에 상관없이 주어진 일을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충성이란 단어를 네 번이나 사용하시면서 세 가지 대조를 언급하십니다. 

첫째로 적은 것과 많은 것의 대조입니다. 작은 것을 하는 것을 보면 큰일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작은 일을 하는 자세는 큰일에 대한 자세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충성된 자는 무엇에든지 충성되고, 불의한 자는 무엇에든지 불의합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맡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이 맡기신 작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시시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겨우 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복을 받는 비결은 지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불의한 재물과 참된 재물의 대조입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1). 이 땅에 주어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가에 따라 종말에 참된 것을 받는 것이 결정됩니다. 셋째로 충성과 관련하여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을 대조시킵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12) 

우리가 세상에서 소유한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것에 불과합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만이 진정한 우리 것이며 영원하고 참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원하시면 언제든지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잘 드러납니다. 비록 부자는 자기의 재물을 쌓아놓고 즐기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부자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여기서 ‘작은 것’, ‘불의한 재물’, ‘남의 것’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다 세상의 재물을 가리킵니다. 물질의 주인이시고 물질을 맡겨주신 하나님이 쓰기 원하시는 대로 내어 드리는 것이 바로 청지기적 물질관입니다. 이 원리는 재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 능력, 시간 등도 해당됩니다. 


3) 두 주인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충성심이란 몸과 마음이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가운데 서서 두 주인을 섬기면 언젠가 두 주인으로부터 다 버림받을 때가 옵니다. 그러나 한 주인만을 섬기면 그 주인이 책임을 져 줍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거나 의지하게 되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해도 한쪽이 우위에 있으면 다른 한 쪽은 경히 여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재물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드러나게 합니다. 돈 문제가 흐릿한 사람에게 높은 신용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들, 특히 영적인 것들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재물 자체에 인격은 없지만 거기에 사람의 욕심이 개입되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많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은 것이 재물입니다. 만약 이 세상의 재물을 자기 것으로 여겨서 자기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자는 재물을 섬기는 자입니다. 재물에 마음이 빼앗겨 충성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마지막 때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재물의 복을 풍성히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재물보다 더욱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곧 재물을 다루는 능력입니다. 재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재물의 우상인 맘몬이 나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로 재물을 내려놓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는 불의하고 악한 시대입니다. 부와 지위와 능력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끊임없이 교만하고 낙심하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기준은 충성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맡기신 일임을 인정하는 자는 감사와 충성으로 반응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충성되게 사용함으로 참된 것, 곧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들을 받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그것이 재물이든, 시간이든, 달란트든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통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믿는 자들을 두신 것은 사랑을 베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인께 인정받는 청지기가 되려면 주인의 뜻을 헤아릴 줄 아닌 지혜가 있어야 하며 주인이 무엇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는 신뢰감을 겸비해야 합니다. 또한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훗날 우리를 결산하시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 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하면서 선한 청지기라는 칭찬과 그에 합당한 상급을 받는 의로운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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