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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 (딤후 2: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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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고 무식한 변론 (딤후 2:23-26)

정치 성향에 진보와 보수가 있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에도 보수와 진보가 있습니다. 다만 진보라는 말 대신 자유주의적이라는 말을 씁니다. 먼저 정치적으로 사람이 보수냐 진보냐를 판단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이슈에 대하여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가장 큰 것이 정부의 역할과 비중입니다. 큰 정부를 선호할수록 진보적이고 작은 정부를 선호할수록 보수적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시장경제에 대한 생각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시장의 원리에 더 맡겨야 된다고 생각할수록 보수주의자이고 시장을 규제해야 된다는 생각이 많을수록 진보적입니다. 그 이외에도 다른 기준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이 이 두 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에서도 사람이 보수적이냐 자유적이냐 하는 몇 가지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기준은 성경을 얼마만큼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보수 쪽으로 갈수록 성경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100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강하고 반대로 자유주의 쪽으로 갈수록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되 인간적인 속성도 반영되어 있다는 관점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아집니다. 

이것은 사실 신앙적인 차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차이라고 보면 됩니다. 성경을 맹목적으로 한 점 한 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본다고 반드시 사람의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고 성경에 사람의 생각이 섞여 있다고 본다고 그 사람의 신앙이 반드시 나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각 사람의 견해의 차이이고 양심의 차이이고 각 사람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면서 갖게 되는 견해의 차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견해 차이 때문에 교단이 갈라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준은 신앙을 도덕적으로 얼마만큼 적용하느냐에 좌우됩니다. 신앙을 엄격하게 적용해서 성도들의 생활을 규제할수록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신앙의 정신을 강조하되 행위 하나하나까지 규제하려 하지 않을수록 자유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예컨대 주일에는 직장에 가서도 안 되고 쇼핑을 해서도 안 되고 심지어 식당에 가서도 안 된다고 규제하는 교회들이 아직도 존재합니다. 

외국에서는 여자가 화장을 하는 것이라든가, 춤을 추러 가는 것이라든가, 그건 여자 남자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또 유행가를 듣는 것조차도 죄로 규정하고 규제하는 그런 교회들도 있습니다. 보수라는 말이 정치와 신앙에서 뜻하는 것이 반대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정치적 보수는 정부의 규제를 최소화하려고 하지만 신앙적 보수는 교회 규제를 최대화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기준은 타종교에 대한 입장입니다. 특별히 복음의 배타성, 복음의 절대성에 대한 견해에 좌우됩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신앙일수록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절대적인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고 자유주의적인 신앙일수록 타종교에 대해서 개방적이고 구원이라든가 회심이라든가 거듭남에 두는 비중이 적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사실을 실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거의 모든 교회와 교단이 복음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모든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영혼구원 받을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서양교회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교단 중에 제일 복음주의적인 대표적인 교단이 남침례교이고 남침례교가 배출한 가장 유명한 복음 전도자가 빌리 그레함 목사님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오래된 장로교라든가 감리교라든가 회중 교회라든가 성공회라든가 북침례교 같은 교단은 그렇게 복음주의적인 면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지미 카터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자기를 born again christian - 거듭난 기독교인이라고 말했지만 그렇다면 20세기의 미국의 다른 대통령 중에는 기독교인이 없었느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거듭남이라는 표현을 쓸 줄 몰랐던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조지 부시 시니어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뭐라고 자신의 신앙을 소개했느냐면 ‘born again christian -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면 나도 거듭난 기독교인이다.’이렇게 설명을 해야 될 필요가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개신교회가 가장 보수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가톨릭교회가 훨씬 더 보수적입니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는 자기들만이 사도들의 권위를 계승한 진짜 교회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좀 너그러워져서 개신교회를 형제교회라고 부르게 됐지만 그러나 아직도 개신교회를 동급의 교회로 여기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교회가 교인들의 죄 사함을 베풀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개신교회도 주장하지 않는 아주 엄격한 교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됩니다. 

몇 년 전에 김수환 추기경이 살아계실 때 어떤 TV프로에 게스트로 출연해서 그 프로를 인도하는 유명한 강사에게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질문하기를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예수를 믿을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그들은 다 지옥에 갔다는 얘기냐?’ 이것이 전형적인 함정질문입니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이 뭐라고 대답했느냐면 ‘사람마다 구원이 있다. 사람이 양심대로 산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화살을 비켜간 것입니다. 

만일 게스트로 가톨릭 추기경이 아니고 개신교 목사가 초청을 받았더라면 이런 답변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답변해도 욕을 먹었을 것이고 저렇게 답변해도 욕을 먹었을 것입니다. 만일 ‘조상님들 죄송하지만 다 지옥 갔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모든 국민에게 욕을 먹었을 것이고 그게 아니고 ‘조상님들이 양심대로 살았다면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면 기독교인들에게 욕을 먹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답변해도 욕을 먹었을 것이고 저렇게 답변해도 욕을 먹는 득보다 실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함정질문입니다. 질문한 사람이 정말로 조상의 운명에 대해서 염려가 돼서 이 질문을 한 게 아니에요. 조상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어요. 만난 적도 없어요. 이 질문을 한 이유는 기독교의 배타적인 복음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개적인 자리에서 기독교 지도자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이런 자리에 초청했다면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김 아무개야, 너나 잘해. 네가 조상을 염려해서 이 질문을 하는 게 아니고 내 복음을 반박하기 위하여 이 질문을 하는도다. 너의 많은 배움이 너의 구원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도다.’ 아마 이런 식으로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미국 CNN 방송의 래리 킹이 조엘 오스틴 목사를 초청해서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질문을 받고 조엘 오스틴 목사가 뭐라고 대답했느냐면 ‘사람이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실 문제이지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그걸 보고 미국의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조엘 오스틴 목사를 비난했습니다. 베니 힌 목사 같은 사람은 설교하는 도중에 조엘 오스틴을 비방한 적도 있습니다. 아마 반발한 목사들은 래리 킹이 자기를 초청하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란이야말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금하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 이런 변론을 듣고 은혜 받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러한 변론의 결과로 예수 믿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바울의 말 그대로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사람들이 싸우는 것뿐입니다. 말다툼을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것뿐만이 아니고 무익합니다. 아무 소득이 없습니다. 

이런 질문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진리를 얻기 위하여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빌립보 간수 그가 신학적인 질문을 한 것이 아니고 ‘선생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선생이여 내게도 생수를 주어 이 우물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익한 논란. 친구끼리 정치에 대해서 얘기하다 보면 말싸움을 하는 것처럼 종교에 대한 논쟁이 사람을 신앙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고 분노를 갖게 만들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를 느끼게 만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가 사람과 사람의 차이뿐만이 아니고 하나님과 나와의 차이로 연결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처남을 만나기만 하면 늘 방언에 대해서 말다툼을 한다고 합니다. 그 처남은 예수 믿는 사람은 다 방언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목사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만나면 어떤 대화를 시작하든지간에 결국은 방언에 대해서 말다툼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둘 다 방언을 한다는 사실이에요. 이것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자처하는 사람 중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육성으로 외치면 그나마 좋겠는데 녹음을 해놓고 그걸 틀어놓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또 명동, 지하철 이런 데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런 식으로 전도하는 분들을 접할 때 여러분 첫 느낌이 무엇입니까. 불편하지요.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내가 저렇게 전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불편함을 억누릅니다. ‘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나도 전도해야 되는데….’ 그래서 불편한 감정을 억누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불편함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옳지 못하다고 우리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저 방법으로 과연 몇 명이나 믿을까.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이 아닐까. 저런 식으로 전도해서 몇 명이나 믿을까.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뿐만이 아니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당연하고 불편하게 생각하고 거부감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역효과를 냅니다. 기독교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고 고집스럽고 적대적인 종교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마저도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역효과입니다. 오늘날 정보가 부족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안 믿는 게 아니에요. 한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 가까이에 적어도 한 사람의 훌륭한 신앙인이 있어주어야 됩니다. 

만약 그 주변에 있는 기독교인이 인색한 사람이라면 불신자는 예수님도 인색한 분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기독교인이 너그럽다면 불신자는 예수님도 너그러운 분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가까이에 있는 기독교인이 예수님이 돼 줄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느끼게 해 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이 인색하고 완고하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시대착오적인 생각입니다. 옛날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방법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취하는 방법은 예수님이 취했던 방법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의 방법을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첫째로 일단 무엇을 요구하지 않고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한 번도 고쳐주는 대가로 신앙을 요구하지 않았어요. ‘내가 너를 고쳐 줄 테니 너는 나를 따르라.’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것이요 베푸는 것이요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반응은 그 사람의 몫입니다. 한 명의 문둥병자처럼 예수님을 따라오는 사람도 있지만 아홉 명처럼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푸는 사랑이 없이 요구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방법은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믿는다는 이유로 안전을 보장하고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다는 이유로 위협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나는 믿으니까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각성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에게 경고하신 것보다 자기가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이 더 많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사람의 행위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에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사람의 행위가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신앙이 자기의 행위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었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받고 너는 안 믿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 

이런 식으로 나의 믿음이 나의 공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뿐입니다. 만일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이 죽은 우리 조상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이렇게 하신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지옥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이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뭔가 방법을 강구하실 것입니다. 

그럼 마가복음 16장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는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예수께서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지 지옥가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여기에는 차이가 있어요.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지 지옥에 가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차이점이 무엇이냐? 저한테 물어보지 마세요. 다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데까지만 가지 마세요. 

그 이상을 가려고 하지 마세요. 섣부른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 말씀에서 예수님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한 상황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민이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는 상황에서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당연하지요. 믿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기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가 그에게 유효하지 못하다는 얘기에요. 조엘 오스틴 목사의 말대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믿는 것이지 누구는 천국에 가고 누구는 지옥에 갔다는 판단을 할 권위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권위는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우리는 어느 신학자의 말대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어디에 가면 떡을 얻을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뿐입니다. 이 시대에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이 존중을 받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놀림을 받는다면 그건 우리의 잘못이 큰 것입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게 아니고 편협한 기독교인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게 아니고 편협한 기독교인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충분히 알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가도 마땅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아멘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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