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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믿음의 실제는? (눅 8: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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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믿음의 실제는? (눅 8:22-25)


남아메리카에 가면 해안을 따라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갈라파고스군도> 가 있습니다.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동물들이 오고 갈수 없는 곳이어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동식물들이 많이 자라 생물학 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으로 보호 되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사는 새들 중에 [코르모란츠] 라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희한하게도 충분히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 날지를 못하는 새입니다. 조류학자들이 그 이유를 연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가 <갈라파고스군도> 에는 이 새와 대적하거나 경쟁할만한 새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목숨을 걸고 피하거나 잡으려고 쫓아가야할 일이 없기 때문에 날개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고, 또 하나 굳이 날아다니지 않고 걷기만 해도 얼마든지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날개를 사용하지 않다보니 날개가 있어도 날수가 없는 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환경이 어떠하냐에 따라 멋진 날개를 가지고도 날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입니다.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도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적도의 무더운 날씨에 살던 사람을 알래스카의 추운 지방에 데려다 놓으면 처음엔 못살 것 같고 얼어 죽을 것만 같아도 어느 정도의 적응기간만 지나면 금방 적응해 나갑니다. 이렇게 환경에 잘 적응해 간다는 말은 그 만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환경이 사람을 만들어 내는 일들도 흔히 보게 됩니다. 

유명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를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맹자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공동묘지 근처에 살았더니 어린맹자가 장례식 하는 것만 흉내 내며 놉니다. 그래서 시장으로 이사했더니 이번에는 매일 장사꾼 흉내만 냅니다. 그래서 학교근처로 집을 옮겼더니 공부를 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에 사느냐? 어떤 환경에서 자라느냐가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대변하기 위한 하나의 대표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 사람이 어디에 살며, 어디에 머물러야 하느냐가 중요하다면 이제 생각해 봅니다. 신앙인들이 살아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물어보나마나 믿음의 땅에 살아야합니다. 믿음의 땅에서 신앙이 살아 움직여야하고, 그 곳에서 신앙이 자라야하고, 신앙의 땅에서 언제든지 믿음의 날개 짓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자신들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지금 내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고 그 믿음이 서 있는 자리를 수시로 점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왜 주님께서 당신을 곁에서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겠습니까? 이미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선 사람들 아닙니까? 그 정도면 정말 대단한 믿음이라고 생각 되는데 느닷없이 제자들에게 다시 묻고 계시는 질문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라는 것은 분명히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던져주는 바가 큽니다. 

내 별명이 크리스천이라고, 교회를 열심히 오간다고해서 그것만으로 내가 믿음의 땅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몸은 언제나 시간 시간마다 예배당에 있고, 또한 비록 몸은 와있지 못할 때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교회에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내가 믿음의 땅에 살고 있다고 자만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그 믿음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 어디더냐는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더니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십니다. 호수를 건너는 중에 예수님은 잠드셨고 갑자기 광풍이 일기 시작하는데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배는 순식간에 물로 가득 차 버렸고 이제 할일이라고는 죽음을 기다리는 일만 남은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얼마나 피곤하셨기에 배를 타자마자 예수님은 주무시는 것입니까? 제자들은 숨넘어가는 소리로 주님을 깨웁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자,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합니다. 이 말속에서 “죽게 된 우리” 는 누구를 말합니까?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도 포함 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침착하게 생각했더라면 이게 얼마나 불신앙의 말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아주 불신앙적인 자세로 결국은 “예수님 우리같이 죽읍시다.” 라는 의미와 같은 말을 하고 맙니다. 이게 제자들의 믿음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 없습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나셔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순식간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 이후의 제자들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5절하반절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단서입니다. 적어도 그 배에는 배를 타기 전에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것과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을 본 몇 몇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은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고, 나인성에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지금 이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 보십시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표현대로 죽을 지경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죽음에서 자신들을 구하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깨운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말하자면 거저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깨워 본 것이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 제자들의 가지고 있는 믿음의 실제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은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태를 진정시키신 후에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호통을 치신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능력을 발휘하다가 마지막으로 피치 못해서 매달리는 천덕꾸러기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경험의 자랑과 자기인생철학 뒤에 숨겨놓고 체면치레를 하기위해 내보이는 신앙적 모퉁이가 아닙니다. 믿음의 중심이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믿음이 있다고는 합니다만 그 믿음의 중심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중심은 다른데 있고 예수님은 한 모퉁이에 두고 살지는 않습니까? 마음도 생각도 삶의 우선순위도 자기계획에다가 두고 살면서 일주일에 한번 구색이나 맞추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보는 그런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냉철하게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길 수 없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라고 핑계하기 이전에 나를 돌이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준 고통이 큰 것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만한 믿음이 없어서 스스로 상처받고 좌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면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그 말씀이면 된 것입니다. ‘아, 이 배는 분명히 호수 저편으로 건너간다.’ 이 믿음을 가져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들었더라면 “호수 저편으로 갈 때까지 내가 너희를 책임지겠다.” 는 말로 들었어야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찮게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다 한 가운데서 만난 풍랑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여러분,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말아야 됩니다. 말씀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주 나쁜 습관입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풍랑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유혹하는 사람들의 말들, 중상 모략하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거세게 내 생각과 마음을 흔들어 놓는지 모릅니다. 정신 차리고 보면 ‘내 신앙이 어디 갔었나!’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되는 풍랑들을 만납니다. 그때 생각해 보면 말씀을 우습게 여겼던 내 잘못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바다에 나가지 않는 사람은 풍랑을 만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인생은 갈릴리바다를 건너야만 하는 삶입니다. 진리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내 입맛에 맞고, 불신앙적일지라도 안전한 곳만 찾아다니는 사람에게는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 풍랑이 어떻게 내리치는지 따위는 알바가 아닙니다. 내 편한 대로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사람은 정말 중요한 예수님의 능력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야만 하고 오늘도 그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 위급한 때에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실제는 무엇입니까? 혹시 체면입니까? 명예를 지키는 것입니까? 권력과 돈에 있습니까? 아니면 남을 비판이나 하고 있는 한심한 곳입니까?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내 이기심입니까? 도대체 내 신앙의 실제는 무엇입니까? 혹시라도 배와 바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도통했기에 주님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제자들과 같은 우리들의 낡아빠진 경험들이요, 교만이라면 큰일입니다.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길을 걸어가던 사람을 차가 부딪친 사고였습니다. 가해자인 운전수와 피해자가 법정에 섰습니다. 운전수가 하는 말 “판사님, 저 사람이 잘못 걸어가다가 차에 부딪쳐서 부상을 당한 것입니다. 저는 모범운전 경력30년을 가진 사람입니다. 억울합니다.” 이 말을 들은 피해자가 되받아서 말합니다. “판사님 저 사람이 운전경력 30년이라면 저는 보행경력 50년입니다.” 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자랑거리는 “예수를 얼마나 믿었느냐!” 는 것과 “직분이 무엇이냐!” 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그 믿음을 어디에다 두고 살았느냐!” 믿음의 실제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던지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는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과연 내 믿음의 실제는 어디에 있으며, 어떤 믿음이냐!” 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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