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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하나 (눅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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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하나 (눅 1:5-7)


금년 여름 유독 덥고 열대야 현상이 심했습니다. ‘기상관측 이후로’라는 멘트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입추(立秋), 처서(處暑)가 지났건만 더위는 여전합니다. 하지만 아침저녁 바람은 분명 다릅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우리는 독일의 시인 안톤 슈나크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읊은 바로 그 가을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둘러보면 곳곳에 넘쳐나는 게 슬픈 일들이요, 우리를 낙심케 하는 일들입니다. 최근 이런 현상들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담배와 주류 관련 지출액이 7년 만에 가장 큰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복권 구입액도 늘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걱정, 근심이 깊어진 탓이랍니다. 반면 서적 구입비는 사상 최저치까지 떨어졌습니다. 이는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는 증표랍니다. 그래서인지 묻지마 살인사건이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가 등장합니다. 남편은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적자(嫡子)라는 것입니다(눅 1:9). 그의 아내 또한 아론의 자손이었습니다(눅 1:5). 이로 보건데 이 부부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커플, 더 이상 갖출 것이 없는 명문가 집안 간의 결합이었습니다. 

또 이 부부는 아론의 후예들답게 의롭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썼습니다(눅 1:6). 성경은 이 부부를 향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스토리는 당연히 해피엔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끄러움’(눅 1:25)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자신감이 결여되어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힘들어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소문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들 가슴에 ‘임신하지 못하는 부부’라는 비수(匕首)를 꽂아버립니다(눅 1:36). 

저들을 낙심, 낙담케 하는 세 요소가 있었습니다. 첫째, “저들이 잉태를 못하므로” 저들은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이 약점, 무능력은 저들에게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아킬레스건(Achilles腱)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무엇보다 사탄은 나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어서 그곳을 향해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때문에 모두들 자신의 약점, 무능력 앞에서 좌절, 낙심하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요즘 자식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젊은 커플들이 많지만, 대부분의 기성세대들, 심지어 조선시대에도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녀생산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유대사회는 아이 낳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습니다(레 20:20,21, 신 7:14, 삼하 7:23). 

그러므로 여기 ‘자식’은 꼭 있어야 할, 가져야할 결정적인 그 무엇을 상징합니다. 그게 없으니 수모, 부끄러움,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사람은 완벽하게 창조되지 않았습니다(창 2:18, 전 3:11). 누구에게나 부족함이 있습니다. 파스칼의 말대로 ‘절대공간’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게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슬퍼하게 합니다. 

셋째,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이 두 사람을 낙심시킨 것은 세월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의 나이가 많았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눅 1:7,18). 흘러가는 시간만큼 저들 마음속에 자식으로 인한 낙심과 슬픔이 점점 크게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세월만큼 우리에게 낙심과 슬픔, 좌절을 안겨주는 원수가 있습니까?(시 90:9-10). 세월을 이길 사람이 있을까요? 세월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은 낙심과 슬픔뿐입니다. 

무능력, 부족함, 세월, 이 세 가지가 우리 인생을 낙담케 합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와 쓰러뜨리는데 믿는 사람들이 더 낙담합니다.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극복해 나갔으나 이 세 가지 요인이 점점 짓누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주변 사람들까지도 함부로 입을 엽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저들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사가랴에게 아이가 있을 것이란 소식을 전해주었어도 그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눅 1:18). 불가능이라는 돌덩어리가 저들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놓치지 않고 이어가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눅 1:13). 그래도 저들은 기도만은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1) 저들은 말씀대로 거룩히 살기를 힘쓰며 기도했습니다(눅 1:6). (2) 주신 직분을 감당하며 기도했습니다(눅 1:8). (3) 예배하며 기도했습니다(눅 1:9). 이미 낙심과 슬픔, 소원이 성취될 수 없다는 확신이 온 마음과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기도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입니다(마 17:20). 그러나 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두 사람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성령 충만이었습니다(눅 1:41,67). 성령 충만은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능력입니다. 새 힘을 주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십니다. 드디어 그 성령께서 아이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것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인 세례요한을 말입니다. 저들의 부끄러움을 단번에 모두 걷어주셨습니다(눅 1: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능력, 부족함, 세월,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말들이 무척이나 나에게 상처가 됩니다. 드디어는 믿음조차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이 모든 것을 딛고 일어서는 디딤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죽음을 앞둔 스데반, 사형선고를 받은 히스기야, 물고기 뱃속의 요나, 죽음의 위협을 받던 다윗과 다니엘, 그리고 삼손이 죽음의 순간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던 기도!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인 줄 믿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렘 29:12).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던져두었던 기도의 끈을 다시 한 번 붙잡고,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 주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놀라운 일들을 예비하셨다가 허락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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