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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마 19: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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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마 19:23-30)

예수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하고 말씀하신 배경은 본문 16절부터 나와있습니다. 마19:16절부터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젊은 율법사가 있었는데, 아마 굉장히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각과 뜻을 아시고,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깨닫게 하시려고, 유도적인 질문을 하심으로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네가 이러이러한 율법을 아느냐?" 

그러니까, 20절에서, "그 모든 율법을 제가 다 지켰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 모든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무슨 부족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나야말로 영생에 들어갈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라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건방진 대답입니까? 이런 것을 구제불능이라고 합니다. 누가 감히 예수님 앞에서 "내가 율법을 다 지켰다"고 뻔뻔하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그 청년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부자청년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편견이 있었던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를 특별하게 종교적 차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이 우리들 마음속에도 자리잡고 있을지 모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부자는 어쨌든지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남이 모를만한 의로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론입니다. 그 증거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걸 반대로 생각해서, 가난한 자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서 가난하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욥기서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문둥병자, 소경, 앉은뱅이를 보면, 불쌍히 여기지를 않고, 저들이 얼마나 죄가 많으면 저렇게 천벌을 받았을까, 하고 멸시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인들은 부자는 존경하고, 대우해주고, 가난한 자, 병든 자는 멸시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부자에 대해서 뿌리 깊은 잘못된 신앙적, 종교적, 시대적 편견이 있었습니다. 

마19:2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이 말씀은 네가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하지만, 너는 온전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온전하지 않다는 말일까요? 19절에 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에 걸린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무슨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느냐? 그러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하고 명확하게 영생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슬픈 사실은 22절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한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영생의 길이라면 그까짓 재물이 무슨 대단한 것입니까? 말씀대로 다 나누어주고 오겠습니다."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근심하며 돌아가니라." 다른 복음에 보면 슬픈 낮으로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그랬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 사람은 재물을 선택하고, 영생을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부자가 슬픈 얼굴로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같이 23-24절을 읽겠습니다. 23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절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얼마나 어려우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26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그렇지요. 하나님이 하시면 간단합니다. 바꾸시면 됩니다. 낙타도 실 같이 만들어서 바늘귀로 통과시키실 수 있는 겁니다. 부자를 가난뱅이로 바꾸시는 건 더 간단합니다. 그러면 성경의 부자가 다 가난뱅이가 되어서 천당갔습니까? 아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부자가 반드시 물질적 부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자는 무엇입니까? 마음이 교만한 자를 부자라고 합니다. 돈이 암만 많아도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하면 부자가 아닙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삭개오 같이 재산을 처분하여 토색한 것을 4배나 갚은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알거지가 되어야 천국에 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워 가난한 부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물질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다 부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작게 만드시는 중입니다. 얼마나 작아져야 할까요? 바늘귀로 들어갈 만큼 작아져야 합니다. 그 만큼 작아지려면 얼마나 고통이 크겠습니까? 그래도 작아져야만 합니다. 무슨 고생을 해서라도 천국 갈 길이 있다면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영생을 돈주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것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입니다. 작아지지 않으면 못 들어가요. 


어떻게 하면 작아질 수 있을까요? 

프로 골퍼들도 어쩌다가 실수를 하게되면, 슬럼프에 빠지게 된답니다. 그래서 평소 자기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아주 점수가 저조하게 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다 그만두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기본자세부터 다시 훈련을 쌓아야 회복된다고 합니다. 맨 처음 골프를 배울 때 골프채를 손에 쥐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몸과 발과 심지어는 마음까지, 다시 원점에서부터 시작해서 훈련을 쌓아올려야 슬럼프에서부터 벗어나고, 향상된 점수를 낼 수가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금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된 자세나 잘못된 방법을 그대로 두고서는, 아무리 열심을 내고, 부지런히 연습한다고 해도 되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무얼 연습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기본을 다시 연습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작아지는 훈련입니다. 작아지는 것은 뼈아픈 경험입니다. 

특히 야구에서는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9회말 2아웃부터 게임은 시작된다." 게임은 끝나보아야 압니다. 야구를 아시는 분은 9회 말에 2아웃 됐어도 거기서 역전패도 되고, 역전승도 되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졌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이겼다고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9회말, 2아웃, 그 마지막 시점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마음이 작아진 마음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실제로 약대를 작게 만들어서 바늘귀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만큼 작아지게 바꾸려면, 아마 되게 힘들 겁니다. 실제로 약대만큼 큰 부자가,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 바늘귀로 들어갈 만큼 작아지게 바꾸려면, 얼마나 심한 고통과 뼈를 깎는 아픔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엄청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때 또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정말 못 말립니다. 

27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그랬는데, 이 말은 "저 청년은 못 버렸지만, 우리는 다 버렸습니다." 하고 자랑하는 투의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정말 다 버렸습니까? 베드로가 다 버렸다고 큰소리 친 것은 뭡니까? 고기잡이였습니다. 생업이지요.

그러나 베드로가 그 정도라도 물질적인 것을 버렸다고 칩시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나, 영적으로는 버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분명히 집을 버렸고, 가정을 버렸고, 직업을 버렸음으로, 다 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공명심을 버리지 못했어요. 정치적 출세욕도 버리지 못했어요. 세속적인 허영도 버리지 못했고, 자기 생명을 버리지 못했어요. 마침내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부끄러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다 버렸다고 하는 베드로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무엇을 얻을까"하는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28절: 그러나 그 베드로의 질문의 대답으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12보좌에 앉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얼마나 가슴이 부풀었겠습니까? "나도 한 자리 하겠구나." 그러나 주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이들을 12보좌에 앉히려면 바늘귀로 통과할 수 있도록 작아지게 바꾸시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늘귀를 통과하도록 작아지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얻겠습니까? 하고 엉뚱한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예수님 말씀은 너무나 희한합니다. 버리면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나의 것을 포기할 때 받는 것입니다. 부자는 물질의 애착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내세우다가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서기관은 자기 지식에 맞지 않다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신앙의 기득권을 쥐고 있다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 버리면 여러 배를 받는다는 말씀을 기억하세요. 

30절 "먼저 된 자로써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써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 당시 유대인들이나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선배가 먼저 진급하고, 후배는 나중에 해야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사회구조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배가 항상 앞서 간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특히 선배가 반드시 먼저 죽습니까? 신앙의 선배가 반드시 훌륭합니까? 그렇지 않을 수가 더 많습니다. 먼저 된 자란 과연 누구를 가리킬까요? 

첫째,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전체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민족적으로 선택하사, 전 인류의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국가를 세우시려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를 일삼았으므로 멸망하여 나중 되는 나라가 되었고, 이방나라들은 예수님 때문에 나중에 양자가 되어 천국에 먼저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부자가 바로 먼저 된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로 보면, 종교적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교법사 같은 사람들은 다 부자였으며, 종교적으로 높임을 받고, 정치적으로도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모든 면에서 앞서가는 사람들, 먼저 된 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만큼, 의로운 사람임으로 반드시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 된 자, 가난한 자들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행하게 아무렇게나 살다가, 지옥에나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부자는 마음만 먹으면 선행을 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먹고사는데 바빠서, 못된 짓도 하고, 도둑질도 하며, 죄와 타협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고, 뭐고,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으니까, 되는대로 살다가 지옥에나 가는 게 당연한 걸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먼저 된 부자는 항상 먼저 되고, 가난한 자는 나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예수님께서 당시에 앞서가는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을 앞에 놓고, 그들이 가장 천하게 여기는 세리와 창기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바로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먼저 된 종교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인들과 가난한 백성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셋째, 오늘날 우리를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먼저 믿은 우리가 현재에 안주하며 전도하지 않고 나만 편안히 예수 믿고 잘 살겠다는 데에 목적을 둔다면 우리는 나중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묵은 닭, 골동품이 되어버려서 아무 생산력이 없는 한 달란트 짜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예수닮기를 바로하여 성장하고, 전도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가난한 사람은 겸손하기 쉽고, 진실하기도 쉬워요. 교회 나오는 것도 부자가 어렵지, 가난한 사람은 쉬워요. 먼저 된 사람들은 기득권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없어요. 결국은 나중 되게 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신분 낮은 사람들은 마음을 활짝 열고, 예수를 쉽게 영접한 결과, 이들이 먼저 되더란 말이에요. 


맺는 말 :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천국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자는 무엇입니까? 마음이 교만한 자를 부자라고 합니다. 돈이 암만 많아도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하면 부자가 아닙니다. 우리도 어떤 면에서는 다 부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작게 만드시는 중입니다. 우리도 바늘귀로 들어갈 만큼 작아져야 합니다. 그 만큼 작아지려면 고통이 심합니다. 그래도 작아져야만 합니다. 작아지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가요. 

어떻게 하면 작아질 수 있을까요? 

기본자세부터 다시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성경 읽고 기도하면 성령이 전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작아지는 훈련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됩시다. 버리면 여러 배를 받습니다. 죽으면 살고, 살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나의 것을 포기할 때 받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다고 해서 신앙도 함께 있는 게 아닙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의도 함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부터 9회말 2 Out인데, 누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어떤 자세로 사느냐에 따라서 역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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