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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요나입니다 (욘 1:1-3,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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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나입니다 (욘 1:1-3, 마 9:35-38)
  

요나((Jonah)는 BC 8세기경에 활동한 예언자 입니다. 요나서는 니느웨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열망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요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고 이방민족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보편성을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를 주셨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요나라는 사람을 통해 니느웨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니느웨성에는 12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니느웨성은 소돔성처럼 죄로 가득 찬 도시였습니다. 니느웨성은 당시 강국이었던 앗수르의 도시로 당시 니느웨성에는 BC 765년경 역병이 만연하여 국가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지금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요나에게 “가서 회개를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부름받는 요나

1장2절을 보면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그들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니느웨성이 타락된 도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니느웨성의 죄가 2절을 보면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악독이라는 말은 “교만함, 잔인함, 극도의 이기주의”가 만연하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가서 전하라, 회개를 외치라, 심판이 가까웠다고 외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요나는 그 시대에 영광스럽게도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부름 받았을 때 울었다고 했습니다(1:6). 세상이 타락하여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나까지 불러 일하라고 하시나 하는 서글픔 때문에 울었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울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주께로부터 부름 받음을 인생 최대의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서신서 첫머리마다 “주께로부터 부름 받아 사도된 나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고전15:10)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부름 받은 것을 감사하고 감격해야 합니다. 참 영광된 일입니다. 요나는 무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여로보암2세 때 궁중 예언자 아밋대의 아들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명의 사람을 불러 큰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영광입니다. 당시 니느웨성에는 12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된 도시입니다. 

소돔처럼 심판받을 운명에 처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주입니다. 모르고 있다가 멸망 받는다면 이것은 분명 비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도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은 이방세계도 사랑하고 이방인들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요나에게 “네가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주 중차대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도망가는 요나

그런데 요나는 그 즉시 도망을 갑니다. 1장3절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낮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라 하시는 니느웨는 동쪽인데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기 위하여 정반대쪽인 서쪽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왜 도망갔을까요. 여기에 두 가지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나의 편견입니다. 요나는 왜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놔두고 이방민족에게 관여하시나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그 의문은 결국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하고 도망가게 합니다. 또 하나는 만일 가서 외쳤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듣고 회개하여 심판을 면한다면 장차 이스라엘 우리민족에게 국익에 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니느웨성은 앗수르의 성입니다. 앗수르는 강국입니다. 앗수르는 그동안도 우리를 계속 위협해 왔습니다. 사사 예후가 통치할 때인 BC 841년경에는 그들에게 조공까지 바친 적이 있습니다. 고로 지금 요나는 니느웨성은 멸망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도망간 것입니다. 지금 요나의 마음에는 니느웨 백성 12만 명의 영혼의 멸망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한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제물로 삼으면서까지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9장35절부터 보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망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인간은 이해관계에 첨예합니다. 그들이 강하면 우리민족이 압제당할 수 있습니다. 왜 손해나는 짓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요나가 하나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물읍시다. 도망가면 어디로 도망을 갑니까. 숨으면 어디에 숨을 것입니까. 사람들은 감히 하나님 낮을 피하여 도망갈 생각을 합니다. 숨을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수들은 탈옥하면 숨을 곳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호송도중 탈주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서 얼마나 며칠이나 숨어 살겠습니까. 

오늘 사람들은 하나님 낮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시편 139편을 보면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늘에 가면 하나님은 거기 계시며 스올의 땅속에 숨을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바다 끝에 자리를 펴고 숨을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흑암 속에 숨을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대낮같이 밝은 빛으로 비추시나이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의 추적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오늘 이 회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가라는 도시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그곳에서 요나는 배를 타고 배 밑창 깊숙이 숨습니다. 타조가 쫒기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덤불에 속에 머리를 처박고 궁둥이는 내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다고 숨어집니까. 요나는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면서 하나님이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세상에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오늘은 cctv 시대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내 모습이 cctv에 찍힙니다. 앞으로는 범죄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핸드폰에는 내가 하루 종일 돌아다닌 행로가 그대로 기록됩니다. 자동차에 달린 블랙박스는 내가 하루 종일 돌아다닌 길목을 그대로 찍어 놓습니다. 이제는 꼼짝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제작한 cctv 눈도 속일 수 없으면서 어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생각을 합니까.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도망가는 요나의 모습을 내려다보십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기 위해 욥바 항구로 가서 배를 탑니다. 배아래 밑창에 숨어 잠자고 있습니다.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시편2편4절을 보면 “하늘에 계신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도망가는 요나의 앞에 자연을 통해 당신의 노여움을 표현하셨습니다. 1장4절을 보면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대작”이라는 말은 헤브리어로 “헤틸”입니다. “세게 던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격한 풍랑을 일으켜 파도를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배가 더 이상 전진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서로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유냐?” 그리고 각자 자기의 신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모두 안절부절 입니다. 배가 깨질 지경에 처했습니다. 배에 실은 물건들을 다 바다에 집어 던졌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진정이 안 됩니다. 시편1편5절을 보면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요나서 1장5절을 보면 “그러나 요나는 배 밑창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이 상황에서도 깊이 잠에 취해 있습니다. 요나의 잠은 무슨 잠일까요. 

깊은 잠은 때로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같이 불면증이 괴롭히는 시대에 깊은 잠은 분명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깊은 잠은 때로 멸망이 주는 잠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배가 뒤집힐 지경인데도 깊은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저주의 잠입니다. 지금 12만 명의 생명이 멸망당할 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는데 그리고 그들을 깨워야 할 사명이 주어진 요나는 지금 도망 중에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무책임한 잠입니다. 그때 선장이 와서 깨웠습니다. 

“너는 누구냐, 어찌된 일이냐(6)” 그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요나는 잠이 깼습니다. 순간 영적 잠도 깼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였습니다. 눈이 뜨이고 보니까 내가 처한 지금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길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풍랑이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라는 점을 순간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을 뜨게 되면 내가 지금 가는 이 길이 길인지 아닌지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3장을 보면 라오디기아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계3:18)고 했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잠자고 있는 라오디기아 교회에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약을 사서 바르라” 그 말은 눈을 뜨라는 말입니다. 을을 뜨고 지금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보고 알라는 말씀입니다. 요나가 눈을 뜨고 보니까 이 모든 일은 나 자신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선장에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던졌더니 바다가 잠잠해 졌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갔어야 합니다. 그곳에 12만 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12만 명의 운명이 요나 입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길을 피하여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요나를 그냥 놔두셨더라면 그것이 형통입니까, 저주입니까. 요나가 다시스로 가도록 바다를 평안하게 하셨더라면 그것이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앞길을 무섭게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왜 막으시겠습니까. 눈을 뜨게 되면 알게 됩니다. 눈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을 뜹시다. 눈을 뜨고 바라봅시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당한 길인가 아닌가를 보십시다.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턴하는 요나

요나는 가던 길을 돌아 유턴을 합니다. 서쪽으로 가던 길을 돌아 다시 동쪽으로 향하였습니다. 유턴해 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때를 위하여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켜버렸습니다. 요나는 3일 동안 72시간을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가던 길을 돌아 유턴하는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헤매어야 했습니다. 그곳은 회개하는 자리입니다. 자기 위치를 찾는 자리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되찾는 자리입니다. 

가던 길을 수정하는 자리입니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길을 유턴하려면 한창 유턴지점까지 가야 가능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다가 예수를 만나고 유턴하게 됩니다. 3년간 광야에 들어가 몸부림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 자성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유턴하여 사도가 되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몸부림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였습니다. 뼈아프게 성찰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기 큰 물고기에 대해서 논쟁이 많습니다. 어떻게 물고기가 얼마나 크기에 사람을 삼키고 그 뱃속에서 살아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래나 상어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물고기가 상어일지라도 고래일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큰 물고기라서 사람을 삼킬 정도였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삼켰는데 어떻게 뱃속서 3일간이나 있을 수 있느냐, 3일 만에 토해져 나왔는데 여상했다고 하는데 과연 합리적인 이야기인가라고 의문을 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반석에서 어떻게 물이 나왔으며 마른하늘에서 어떻게 만나가 내렸는가? 라는 질문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간단히 풀 수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3야 72시간을 있으면서 뼈저리게 회개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 3일간은 예수님의 무덤 속 3일과 일치하는 시간입니다. 요나가 3일간 물고기 뱃속에 있은 것은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을 것을 미리 보여준 예표적 사건입니다. 2장을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했다는 기도문이 나옵니다. 

“내가 물고기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 지라도 나는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물이 내 영혼까지 둘렀고... 내 영혼이 피곤할 때에 여호와를 생각하게 되었나이다.(2~17)” 얼마나 뼈저린 기도입니까. 이 기도는 항복의 기도입니다. 침대에 내 던져진 사람이 하는 기도는 항복의 기도뿐입니다. 태풍속의 바다에 던져진 요나가 항복의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랬더니 2장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를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해냈다”고 하였습니다. 

요나의 고난

요나는 왜 이렇게 고난과 수난과 영적 침체를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주신 사명을 회피한데서 주어졌습니다. 회피하려니까 길이 아닌 길을 가게 되었고 그 결과 고래 뱃속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이고 구원이고 복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통로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 은혜가 이 세상에 나누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은혜의 통로가 되라, 너를 통해 니느웨성 사람 12만 명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도망하고 회피하였습니다. 얼마나 괘씸합니까. 하나님이 그냥 놓아두시겠습니까. 그냥 놔두시면 그것이 은혜입니까 저주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디 전기를 보면 아주 뼈아픈 기억을 써 놓고 있습니다. 시카고 대 전도 집회 때 계획대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설교할 때마다 오늘 밤에 회개설교를 하라는 암시가 왔습니다. 그 설교는 내일 밤에 설교하기로 계획이 되어 있습니다. 암시를 미루고 그냥 계획대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시카고 대 화재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때 수많 영혼들이 죽었습니다. 무디는 그것을 평생 뼈아픈 기억으로 남았다고 술회합니다. 

요나는 그 길로 니느웨로 가서 외쳤습니다. 그냥 외친 것이 아니고 피를 토하며 외쳤을 것입니다. 요나가 외친 말 한마디가 12만 명의 영혼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의 전도와 간증과 말 한마디가 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내 말 한마디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비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축복의 통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요나가 누구입니까. 요나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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