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 10:30-37)

첨부 1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 10:30-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장 30∼37절)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 사랑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1. 강도 만난 사람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까지는 약 35km의 내리막길로, 도중에 골짜기가 많아 상인들을 노리는 강도의 출몰이 잦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들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일을 당하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은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우리 인간이 죄 짓고 타락하여 마귀라는 강도를 만나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와 질병, 가난과 저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음을 맞이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롬 5:8), 우리가 아직 주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롬 5:10),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온 인류의 참된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강도 만난 사람의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2. 참된 이웃 

강도를 만난 사람이 거의 죽어가고 있을 때, 그때 마침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강도 만난 그를 보고 피해 지나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1∼32)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죽은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된다는 율법 때문에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도 피해갔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망각하고, 종교의식에만 얽매어 죽어가는 사람을 내버려두고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형식적인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우리는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한때는 우리도 바로 ‘그 강도 만난 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강도 만나 죽어가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자신이 부정해지는 것도 마다않고,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상처를 친히 만지시고 싸매시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들의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이웃은 바로 사랑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눅 10:36∼37)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가 이제 그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이웃이 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마지막 만찬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 박사는 4대째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 후손입니다. 그는 최초로 본인의 공로에 의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귀화자입니다. 그는 ‘한국형 119구급차’를 개발하여 보급하였고, 결핵으로 고통 받고 있는 북녘의 동포를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낮은 사람, 소외된 사람들 곁에 같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붕 꼭대기에 걸고 있는 교회가 못 사는 사람, 못 먹는 사람과 분리된다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없어집니다. 저는 한국에 은혜 입은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직 10%도 못 갚았다고 생각합니다. 전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합니다” 

주님은 형식적인 제사보다 우리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으로 참된 이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평생 사랑을 실천한 슈바이처는 말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는 이 땅의 세입자로서 우리가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임대료다. 인간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이며 이 세상에서의 목적은 ‘소유하고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베풀고 봉사하는 것’이다. 그 외의 다른 의미란 있을 수 없다”

교회는 이 땅의 나그네들을 위해 사랑을 베푸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성전 삼고 계시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된 우리 모두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3. 사랑의 표현

사랑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피하여 지나쳤지만 그곳을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이 그 강도당한 자를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눅 10:33∼34)

뿐만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두 데나리온을 주며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눅 10:35).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내어줌의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쪽방 촌의 대부로 불리는 김흥용 목사는 서울역 일대에서 쪽방 주민과 노숙인을 돌봐오고 있습니다. 그는 20년간 은행에서 근무하고 받은 퇴직금으로 ‘나사로의 집’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쪽방 주민들에게 가장 힘든 계절은 여름입니다. 말 그대로 ‘찜질방’이죠.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쪽방 주민들이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곳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체력단련도 하고 샤워도 할 수 있는 쉼터가 절실했습니다” 그는 뇌졸중 후유증과 위암 등으로 4차례 대수술을 받고도 쉬지 않고 소외된 자들을 보듬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쪽방동네 거지왕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만 행복해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이웃이 행복해야 합니다. 참 행복을 원한다면 이웃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목회 일선에선 은퇴했지만 쪽방 주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여생을 그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사랑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인종적, 종교적 혼합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사람 이하로 취급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러한 멸시를 당하며 서로가 원수지간임에도 불구하고,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전직 워싱턴포스트 기자였던 로라 블루멘펠트는 아버지와 함께 이스라엘을 관광을 하던 중 아버지가 머리에 팔레스타인 테러범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끔직한 일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의 생명은 건졌지만, 그녀는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마음먹고 이스라엘 근무를 자원했습니다. 12년 만에 테러범을 찾아낸 그녀는 피해자의 딸임을 숨긴 채 범인과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막상 범인을 만나 얘기를 듣다 보니 기자로서 범행 동기에도 관심이 갔지만, 복수에 대한 충동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녀가 내린 결론은 진정한 복수는 물리적인 복수보다는 범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범인의 가석방을 위해 법원에 청원서까지 제출했고 아버지와 함께 테러범의 집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그의 가족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복수는 용서와 화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 6:27) 

소외되고 상처 입은 자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는 구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굶주린 자를 더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말로만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도와줌으로써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도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사랑은 ‘혀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끝’에 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기독교 신앙은 사랑의 실천으로 증명됩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아무리 예배, 헌금, 교회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형식적인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처럼, 실천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7)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 되어 온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 앞에 결단하고 순종하고 헌신하게 하여주시고 우리 일생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와 같은 귀한 일생이 되도록 주님 함께하시고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영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