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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례자 (시 8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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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시 84:1-12)
   
청교도 사상에 심취했던 미국의 작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7.4-1864.5.19)의 유명한 ‘큰 바위얼굴’이라는 단편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미국의 한적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펼쳐집니다. 마을 근처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 사람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바위가 오랜 세월을 비바람을 견디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인데, 마을 사람들은 큰 바위얼굴을 소중하게 여겨서 자기들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큰 바위 얼굴덕택이며, 머지않아서 큰 바위얼굴의 주인공이 그 마을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한 소년도 그 얼굴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정말 큰 바위얼굴을 한 위대한 사람을 만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 소년의 이름은 어니스트였습니다. 
   
어니스트는 틈만 나면 큰 바위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던 중 게더골드(황금 모으는 사람)라는 그 마을 출신의 부자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큰 바위얼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잔뜩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자기가 살 집을 지었습니다. 

드디어 그가 돌아오는 날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를 맞으러 나갔습니다. 마차를 타고 오던 그는 마을 사람을 보고서는 동전을 마구 뿌려대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열광하며, 그가 큰 바위얼굴이라고 소리쳤지만, 어니스트가 보기에는 그는 큰 바위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척 실망하였지 ‘큰 바위얼굴이 꼭 나타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어니스트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나면 반드시 큰 바위얼굴을 바라보면서 깊은 명상에 잠기고는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올드 블러드 앤 썬더(피와 천둥의 노인)라는 늙은 장군이 마을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이번에는 그에게 잔뜩 기대를 걸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수많은 전쟁에 나가서 승리를 거둔 장군은 정말 큰 바위얼굴다운 사람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가 마을로 돌아 왔을 때, 이번에도 사람들은 그가 큰 바위얼굴과 똑같이 생겼다고 열광하였지만, 어니스트가 보기에는 그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실망하지 않았고, 여전히 큰 바위얼굴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소년 어니스트도 나이가 먹어서 이제는 중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생각하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주목하여 보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마을에서 태어난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아주 유창하고 설득력 있는 연설을 하기로 유명하였고, 큰 바위얼굴이 있는 동네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여서 사람들은 그에게 이미 올드 스토니 피즈(늙은 바위얼굴)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잔뜩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큰 바위얼굴일거야... 하지만... 어니스트가 보니 그도 아니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서 큰 바위얼굴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던 어니스트는 이제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대한 깊은 지혜와 경륜은 더욱 무르익어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였습니다. 그는 저녁이 되면 마을 사람들에게 인생의 깊은 지혜를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그 마을 출신으로 아주 유명한 시인이 된 사람이 마을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의 시를 좋아하던 늙은 어니스트는 그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래... 맞아 인생의 지혜를 노래하는 시인이야 말로 큰 바위얼굴일지도 몰라...’ 시인은 마을을 향하면서 어니스트라는 노인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그를 만나고 싶어 하였습니다. 일부러 그 집을 찾아가서 하룻밤 머물기를 청하였습니다. 시인은 어니스트에게 자기는 큰 바위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 어니스트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지켜보던 시인은 바로 그에게서 큰 바위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얼굴입니다. 저 얼굴은 큰 바위얼굴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니스트를 다시 쳐다보았고, 시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큰 바위얼굴을 쳐다보고 자라났던 그 소년... 그 얼굴을 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그 얼굴을 지켜보던 바로 그 소년 어니스트가 어느새 큰 바위얼굴을 닮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다한 어니스트는 시인의 팔을 잡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직도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착한 사람이 큰 바위 얼굴 같은 용모를 가지고 빨리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는 것이었다.’ 소설 큰 바위얼굴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들은 무의식중에도 어떤 하나의 중심을 설정해 놓고 행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산이나 들에서 길을 잃어버렸다고 할 때, 우리는 길을 찾아서 이리 저리 헤매게 되는데, 이때에 사람들의 경로를 추적해 보면 일직선으로 곧바르게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으로 한 곳을 중심으로 해서 빙빙 돌게 된다고 합니다. 나는 길을 찾아서 똑바로 나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떤 반경 안에서 빙빙 도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관찰을 바탕으로 해서 한 번 나의 인생행로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한 주일이면 한 주일... 한 달이면 한 달 동안... 나의 행로를 메모해 보면서 내가 주로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어떤 것인가? 내가 주로 하는 생각들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좀 섬세하게 살피다보면 우리는 나의 삶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여 설정되어 있는지... 그것을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한 신앙인이 자기가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그 중심은 어디인지... 자기는 어디를 바라보고 지향하면서 살고 있는지... 그것을 우리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지향하는 중심은 하나님의 전과 거기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교회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일부 교회에서 십자가 등불 끄기 운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에너지 절약을 위한 것은 아니겠지요. 교회가 하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가니까 스스로 좀 반성하고 자신을 돌아보자는 뜻이 거기에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밤이면 우리나라의 어느 곳을 가든지 셀 수 없이 많은 빨간 십자가들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그것을 고추밭에 잠자리가 앉은 것처럼 보인다는 약간은 자조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오늘 이 시인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전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전에서 누리는 감동과 기쁨을 고백할 수가 있을까요? 구구절절이 하나님의 전을 향한 진한 사랑과 행복이 배어있습니다. 그 시작부터가 새삼스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v.1) 그가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그곳을 생각할 때마다 사랑의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것은 바로 그곳이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2절은 마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담아 보내는 연애편지처럼 느껴집니다.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v.2) 아마도 그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시민이라면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성전을 지나치기도 하면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안타깝게도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살고 있는 사람일 텐데... 그렇기에 성전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정도가 더한 것이지요. 이러한 자기의 내면을 그는 아주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영혼과 마음과 몸으로 구분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생각할 때, 자기의 영혼은 온통 그곳을 그리워하고 사모할 뿐입니다. 영혼은 아마도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는 가장 깊은 내면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목말라하고 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런 깊은 내면의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은 그다지 길지는 않습니다. 곧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신비한 기쁨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곧 이런 노래로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v.2b) 여기에서 마음은 그래도 그 변화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몸도 기뻐하고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요즘 대세가 힐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럴 수밖에는 없는 것이 그동안 우리는 너무 성공위주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나보다 앞선 사람들을 따라잡느라고 무리하다보니 정작 내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도 모르고 달려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자살률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자식도 낳으려 하지 않고... 범죄가 점점 더 흉학해지고... 이런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와중에서 우리가 힐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자체가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바로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중에... 문득 힐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치유되고... 마음도 밝고 건강해지고, 몸도 회복되는 그야말로 전인적인 치유와 회복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만 있어도... 우리를 감싸주시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v.3)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맞아 주시는 하나님의 품은 얼마나 넓은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어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은 너무도 거룩하시고 높이 계셔서 나 같은 죄인은 다가가기에 거리낌이 있고, 주저하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참새와 제비라니... 거룩하고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하늘의 보좌와는 잘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간 곳에서 참새가 날아다닌다면... 거룩한 하나님의 제단에 제비가 날아들어서 제 집을 지어 놓았다면... 그것은 참 불경스럽게 보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지요. 우연히 날아든 참새 한 마리조차도... 그곳이 거룩한 성전인줄도 모르고 집을 지어 놓고 새끼 칠 생각을 하는 제비들조차도... 하나님은 다 소중히 여기시고... 따스한 사랑으로 맞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전을 그리워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은 정말 기쁨으로 우리를 맞이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품안에 머물러 있게 될 때에,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마음을 거쳐서 온 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힐링을 경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v.4) 이렇게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집에 사는 사람일까요? 물론 것으로 보기에는 제사장이나 성전의 봉사자들처럼 항상 성전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만일 우리가 어디서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만 있다면... 바로 그 마음이 주님이 머무르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성전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행복한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비록 아주 험하고 어려운 현실 가운데 둘러싸여 있더라도... 주님을 바라보고 사모함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시23:5) 주어진 현실 속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 이미 그들은 주님의 집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살핌 가운데 머무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시인이 가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은 마침내 그를 하나님의 전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게 합니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신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 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v.5)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 길에 오른 사람들...’ 우리가 좀 생각해야할 부분이 아닐까요?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 길에 오른 사람들... 한 번 이 표현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제대로 된 순서가 아닐까... 합니다. 여기서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요? 정말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몸은 성전에 들어왔지만, 마음은 아직도 다른 곳을 헤매고 있는 이들을 신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주님을 찾아라.’(아모스5:6) 마음이 주님을 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들도 이 대목에서는 좀 마음이 뜨끔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오늘이 주일이라서 교회에 나오기는 하였지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 길에 오른 사람...’ 아마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이런 이들을 찾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그가 누군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왔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인이 고백하는 것처럼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르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음이 이렇게 순례의 길에 올랐다고 하여도, 그 마음을 따라가야 하는 몸은 힘들고 고달플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지요. 어떤 좋은 것을 생각한다든지 결심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은 결코 쉬울 수가 없습니다. 요즘 SK프로야구 팀이 다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데... 투수 중에 채병용 선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공익근무를 하느라고 한동안 야구를 쉬었지만, 아주 멋진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그 재활의 과정이라는 것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한 트레이너를 고용해서 몸을 다듬었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재활 훈련이 끝난 후에는 그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완전히 지워 버렸다고 합니다. 
   
진정한 순례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 마음먹은 것...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을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생각한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좋게 생각하는 것들... 내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생각하지도 못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v.6) 이렇게 시인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는 자기가 거쳐 온 길을 ‘눈물 골짜기’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해설자는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고비와 시련의 무대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아마 그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 좋아 보입니다. 향기가 좋은 발삼나무가 우거진 숲길인 모양이지요? 하지만.. 막상 그 길을 걷는 사람은 눈물 없이는 갈 수가 없는 길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눈물 골짜기라고 부르는 것이겠지요. 원래 예루살렘은 높은 산지에 자리하고 있어서... 그들이 향하는 순례의 마지막은 결국 가파른 산지를 오르는 것입니다. 이 고비를 넘어야만 그들은 하나님의 전에 다다를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며칠씩 먼 거리를 걸어서 여기까지 왔으니... 순례자들에게는 그 언덕이 결코 쉬울 수는 없는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 갈 때에... 하나님도 그들의 어려움과 피곤함을 아시고 샘물을 통해서 가을비를 통해서 그들을 도우시고 힘을 주십니다. 그런 신비한 경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뵐 것입니다.’(v.7)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동안에... 제게는 제가 걸어왔던 눈물 골짜기... 우리 교회가 걸어왔던 눈물 골짜기들이 생각났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저마다의 눈물골짜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눈물골짜기를 마다하지 않고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례자인 것이지요.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 모두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어려움을 거쳐서 순례자는 그가 그리던 하나님의 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순례자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v.10) 

하나님의 집에 머무르는 것이 얼마나 좋으면 이렇게 고백을 하겠습니까?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집에서 단 하루를 사는 것과, 세상에서 천 날을 보내는 것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요? 세상에서 큰소리치면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것과 하나님의 집의 가장 누추한 곳에서 문이나 지키면서 사는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좋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여기서도 기쁨을 찾지 못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기쁠 일을 찾기란 정말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맞아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에서부터 느끼는 기쁨입니다. 오늘 순례자가 하나님의 전에 올라왔을 때 느끼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참된 평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방패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v.9) 이라고 고백하고 있고, 11절에서는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v.11) 이렇게 여호와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셔서 우리를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켜주십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 참 좋은 것을 경험합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을 태양이라고 고백하는 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마치 태양과 같아서 참으로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태양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늘 하나님을 목말라 사모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전을 찾는 사람들... 하나님은 그러한 이들의 갈증과 목마름을 아십니다. 그리고 정말 좋은 것을 주시는데,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순례자가 하나님 앞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방패가 되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안전하게 머무르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평안함을 누를 수가 있습니다. 또한 태양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며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순간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의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사도 요한은 그것을 가리켜서 영생이라고 말하였습니다.(요한17:3) 

하나님과 그가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삶... 그렇게 보내는 하루의 삶이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천 날의 삶을 준다하여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마치 순례자처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서 오늘 하나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하늘의 평화와 풍성함이 우리들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v.12) 마침내 순례자가 도달한 가장 중요한 삶의 원리입니다. 이 불확실하고 어수선한 세상 가운데서... 정말로 덧없이 흘러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순례의 여정을 걸어간 그가 깨달은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를 우리는 순례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똑바로 가는 것 같지만, 사람은 누구나 어떤 것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맴돌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물질이고, 권력이며, 세상의 즐거움이고, 지식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중에서 진정한 순례자란 그 희망을 하나님께 두고 항상 하나님을 목말라하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길은 남다르게 눈물을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 길이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해와 방패가 되셔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풍성히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룩한 순례에 초대받은 것을 감사하며,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며 주어진 길을 힘차고 기쁘게 걸어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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