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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창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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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창 17:1-8)
   
지난 목요일에는 초등학교 동창 몇 명과 당진을 다녀왔습니다. 현대제철소를 비롯해서 거대한 제철소가 둘이나 있는  동네였습니다. 동창 중의 하나가 그곳에서 원룸을 짓는 사업을 하고 있는데, 하도 오라고 재촉을 해서 다녀온 것입니다. 

오늘은 그 동창을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학교를 마치고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쇠를 가공하는 조그만 공장이었습니다. 숭의동에서 그의 형과 함께 시작을 했는데, 사업이 잘 되었든지 연안부두쪽으로 공장을 넓혀서 그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연락이 뜸해지고... 한 4년 전부터 다시 만나기 시작했는데... 사람이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창들이 많지 않아서 한 다섯 명쯤이 꾸준히 만나고는 했는데, 거의 만날 때마다 그 친구는 하는 일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몽골 같은 나라에서 쇠고기를 가공 수입 해다가 파는 일이었습니다. 아마 굉장히 잘 되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봄이 되면 몽골구경을 시켜주겠노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였었는데, 정작 봄이 되도 아무 연락이 없습니다. 알고 보니 수입고기 파동을 겪으면서 손해도 좀 보고... 그만 그 사업을 접은 모양입니다. 

그 친구가 그 다음으로 한 일은 번호 열쇠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기존의 아파트 번호 키들은 큰 충격을 주기만 하면, 그냥 열리게 되어있는데, 자기가 만드는 열쇠는 그런 약점을 제거한 아주 특수한 열쇠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곧 중국에도 수출을 하게 되고... 홈 쇼핑에서도 뜰 거라고 하면서... 한 몇 억 원은 손쉽게 벌 수 있는 것처럼 말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열쇠를 판매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이 친구가 그 다음에 손을 댄 일은 중국에서 곡물이나 기름 같은 농산품을 수입하는 일이었습니다. 보따리 장사라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 주로 배를 타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허용된 만큼의 곡물을 들고 오게 하고 그것을 나중에 모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일도 그렇게 오래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TV 뉴스에 몇 번 그 일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가 나오더니 단속이 엄해져서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최근에 시작한 일이 말씀드린 것처럼 당진 근처에서 원룸을 짓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초대형 제철소가 두 곳이나 있어서, 그곳은 원룸의 수요가 굉장히 많은 것 같았는데, 한 400세대 정도의 원룸을 지어서 분양할 계획을 하고서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몇 년 동안 제가 그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 그가 하였던 일들입니다. 저는 요새 그 친구를 보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제가 참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어떻게 인생을 저렇게 사나... 저 하고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목회를 처음 시작해서 30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친구는 만날 때마다 하는 일이 바뀌고는 하니까... 사실 저로서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어떠하였는지는 몰라도, 제가 그를 만난 후에는 별로 그렇게 큰 재미를 보지는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그 친구에 대하여 생각을 하면서 깨달은 한 가지 놀라운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을 새롭게 시작할 때마다 항상 마치 그 일을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희망에 부풀어서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 했던 일이 잘 안 되고 여의치 못하니까 할 수 없이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 같은데, 그 친구를 만나면 전에 겪었던 실패에 대한 아픔이나, 혹시 새롭게 일을 시작하면서 직면하게 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원룸 한 동이 건평이 약 150평이 넘는 4층 건물을 24채나 지어서 분양을 해야 하는데... ‘건물을 잘 지어야 할 텐데... 분양이 잘 되어야 할 텐데...’ 저 같으면 이런 걱정거리가 참 많을 것 같은데... 그 친구에게서는 그런 염려나 걱정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렇게 낙천적으로 세상을 살기도 힘들 텐데... 아마 그러니까 어떤 일을 시작했다가 잘 안되면 금방 접고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일을 다시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이로구나... 낙천성이야 말로 저 친구에게 하나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아브라함이 그의 나이가 99세가 되었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를 찾아오시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바로 앞부분인 16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거기에는 아브라함의 나이가 여든 여섯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여든 여섯일 때에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고는 13년을 건너뛰어서 아흔 아홉일 때에 일어난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좀 궁금합니다. 성경에서 말하지 않고 있는 지난 13년 동안 아브라함은 어떻게 세상을 살았는지...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86세 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별로 아름답지는 못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셔서 반드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를 통해서 아들을 낳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그 증거까지 보여 주셨지만, 아브라함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기력이 없어지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고 서둘렀던 부인 사라의 권유를 받아들였습니다. 

사라의 몸종인 이집트 여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그들 부부에게 기쁨이 되기보다는 화근이 되었습니다. 사라와 하갈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학대를 견디다 못한 하갈은 이스마엘을 데리고 집을 뛰쳐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일이 바로 아브라함이 나이 여든 여섯일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후에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해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좀 짐작할 수가 있지 않을까요? 사라와 하갈 두 여성이 화해를 이루고...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정당한 아들로 받아들이고... 이런 일은 도저히 그 집안에서 는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항상 팽팽한 긴장감과 갈등이 두 여성을 중심으로 집안에 감돌지 않았을까요? 이스마엘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지는 못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 자신이 아니었을까요? ‘내가 이렇게 되려고 고향을 떠난 것은 아니었는데...’ 자기 아내 사라를 보아도 그렇고, 자기에게 아들을 낳아준 하갈을 보아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바라 볼 때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자기가 고향을 떠나 올 때, 기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세계가 이런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이렇게 시작되는 오늘의 말씀을 대할 때... 아브라함 자신도 그렇고 우리가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너무 늦었구나... 나이가 너무 많아. 너무 늙었어... 아브라함이 직면한 오늘이 그가 처음에 꿈꾸었던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는 그는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 할 수 없어...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모든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그나마 얻게 된 이스마엘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며 사는 일밖에는 없어(v.18)... 이제 아브라함은 무엇을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는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나이가 아흔 아홉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요? 아브라함이 직면한 현실... 어쩌면 그것은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가정사나... 자녀들의 삶... 또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 그 가운데서 정말 내 마음을 시원하게하고 흡족하게 하는 일들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지난 13년의 시간이... 나름대로는 애를 쓰고 수고한 시간이었는데... 사실은 좀 더 잘해보려고 하갈을 통해서 자식도 낳고... 그렇게 했던 것인데... 그러한 모든 노력과 시도들이 오히려 삶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고, 갈등의 한가운데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처음에 내가 꿈꾸었던 세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에게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용기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실 저는 소개해드렸던 그 친구가 아슬아슬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부럽기도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모든 것을 쉽게 접기도 하고, 또 쉽게 다시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인지... 아브라함은 이제 나이가 99세가 되어서... 모든 것이 너무 늦었고 늙었다고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막상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도한다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게 아닌데... 내가 이렇게 살려고 그동안 애쓰고 수고한 것은 아닌데... 이런 안타까움이 있지만... 그러면서도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도하기에는 너무 막연하기도 하고 자신이 없습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에게 찾아온 삶의 위기를 벗어 날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야할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의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 주신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면서 그에게 처음 그가 꿈꾸었던 희망을 다시 찾게 되고, 삶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을 깊이 살피고 계시고, 정말 필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이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무엇이든 자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13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오늘 99세가 될 때까지의 시간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침묵하시기 시작한 시간은 오히려 더 길다고 보는 것이 좋겠지요. 최소한 14년 이상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라에게 구박을 당하고 하갈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집을 뛰쳐나왔을 때, 하나님은 하갈을 찾아가서 그녀를 달래시기도 하고, 위로하시면서 다시금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신 일은 있어도, 정작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어떤 징조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4년 이상이라는 긴 침묵을 깨뜨리시고는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찾아와 주시고... 날마다... 순간마다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시고... 내가 무엇인가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나의 갈 길을 일일이 지시해 주시고...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면...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 우리는 모두가 항상 뜨거운 신앙을 잃지 않을 수가 있겠지요? 그럴까요? 

어떤 목사님은 그런 재밌는 이야기를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찾아오시고, 날마다. 살아계신 증거들을 직접 보여주신다면... 우리는 모두 심장이 터져서 죽고 말았을 거다...’ 그런 엄청난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것은 어쩌면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을 껴안으려고 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난 14년 이상의 시간을 아브라함에 대하여 침묵하고 계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잊어 버렸다거나... 포기하거나 그러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121:4)라고 어떤 시인은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이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침묵하고 계실 분이지... 결코 우리를 포기하거나 외면하지는 않으신다는 것...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기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소개하시는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v.1)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른 바 ‘엘 샤다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참 드물게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도 이번이 처음 있는 일입니다. 

15장에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창15:1)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가 나이가 99세가 되었을 때에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실 때... 이번에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소개하시는 것이지요. 
   
지금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떤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지요. 의기소침해 있고, 현실 생활에 짓눌려서 처음 그가 고향을 떠날 때에 가졌던 꿈이나 희망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냥 될 대로 되라... 바로 이것이 오늘 아브라함이 가진 마음이라는 것... 그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 믿음과 희망을 다시금 불러일으키시려는 것이지요.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동안의 긴 침묵의 시간을 스스로 깨뜨리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서 희망을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이야기의 시작이 ‘아브람의 나이 아흔 아홉이 되었을 때에...’ 이럴 때는 우리는 어떤 희망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너무 늦었어... 나이가 99세가 된 노인에게서 무슨 새로운 일이 일어나겠어...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대해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이제는 틀렸어... 나의 삶에 무엇인가 새롭고 소중한 일이 일어나기엔 나는 너무 늦었어... 나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없어... 그런 기회는 결코 내게 오지 않을 거야...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더 나가면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우리에게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들에게는 희망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지요. 맞아... 하나님이시라면... 게다가 스스로를 전능하다고 소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 정말 내가 바라고 꿈꾸는 일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마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설혹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셔서 무슨 일이든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그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희망을 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이런 믿음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 다시금 생겨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하나님... 하나님께는 어떤 거리낌이나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v.2)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지난날에 그와 맺었던 약속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뒷부분에서 다시 설명하고 계신 것처럼... 아브라함을 번성하게 하시고, 여러 민족들이며 그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해서 세상에 오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v.6) 

특별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단지 아브라함 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대로 오고 오는 그의 후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효력을 가지는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v.7a) 이 언약을 따라서 하나님은 단지 아브라함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까지도 보살펴주시고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언약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 거기에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의 행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낳았던 것... 이것은 믿음의 조상답지 못한 행위이고 그것을 지켜보시던 하나님도 무척이나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저렇게 나를 믿지 못하다니... 저렇게 참고 기다리지를 못하다니...’ 이런 마음이 하나님께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고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스마엘로 인해서 집안에 불화가 생기게 되니까 정말 후회스런 마음은 뿐이고... 하나님을 볼 낯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아브라함에게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우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그 언약이 시대를 넘어서는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나님께서 밝히셨을 때... 여기에서 우리는 여전히 아브라함을 믿어주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삶을 생각해 보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서기가 참 부끄럽고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을 소중히 여겨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잘못과 허물을 저질렀더라도 말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후손에 세상에서 번성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마음속에 새기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참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v.5) 

이제 비로소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름을 새롭게 붙여주신 다는 것...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할 수가 있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읽게 되는 하나님의 마음이란 그가 살아왔던 부끄럽고 답답했던 과거는 아브람이라는 옛 이름과 함께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니 다시 한 번 인생을 시작해 보아라... 그가 과거의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새로운 출발을 축하 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여기에서 읽게 됩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도 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참 많은 실패를 했고, 참으로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 그런 것도 그렇게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깊이 믿어주시고 소중히 여기시니까요. 너의 삶은 이제부터가 중요한 거야... 너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가 있어... 이제부터의 삶은 정말로 네가 꿈꾸고 바라던 바로 그런 멋진 삶이 될 거야... ‘이제부터 너는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봐’ 이렇게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고 그것을 축하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 가운데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일로부터 다시금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이렇게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을 때... 아브라함은 특이한 행동을 합니다. ‘아브람이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있는데...’(v.3) 

성경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땅에 엎드려 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서 그런 행동은 참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여러 번 찾아오셨지만, 이렇게 아브라함이 땅에 엎드렸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무엇인가 확실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단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땅에 대고는 엎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기를 온전히 내어 맡길 뿐입니다. 어떻게 해달라고... 언제까지 무엇을 해 달라고 자기의 생각을 밝히거나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내 사정이 이러하니 좀 알아주십시오... 구구하게 자기를 설명하거나 변명할 생각도 하지를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 앞에 바싹 엎드림으로써 자기의 부끄러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저를 당신의 손길에 맡겨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는 여전한 자기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을 보여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다시 찾고 새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비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처럼 엎드리는 것...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길에 맡겨 드리는 것... 여기에 진정한 삶의 비결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엎드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모든 아픔과 상처를 치유 하여 주십니다.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나를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 계절을 기다리는 우리들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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