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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사람에게 좋은 교회 (행 4: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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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에게 좋은 교회 (행 4:23-37)

지난해에 에어컨에 붙일 안내 문구를 작성하다가 잠시 동안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안내 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에어컨 작동 지침 관계자, 즉 예배 위원이 실내 상황에 맞춰 에어컨을 작동합니다. 이 외의 분들께서는 에어컨 작동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인 ‘삼가하다’는 ‘삼가다’의 그릇된 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익숙하지만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표현도 잘못된 표기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많은 언어 가운데 잘못된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것들을 조금씩 고쳐가려는 노력은 꼭 필요합니다. 

신앙생활, 특히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을 기준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비교해 봄으로 성장하는 교회, 칭찬받는 교회, 무엇보다 각자가 마음에 만족하는 교회로 변화되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동기유발’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건, 어디를 가건… ‘동기유발’이 되지 않으면 사람은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으로 인해 기쁨을 얻는다면,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감으로 즐거움이 있다면 사람은 움직입니다.

그리고 ‘호감’이 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참 괜찮은데!’, ‘저기 참 좋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마음이 끌려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처음부터 끌리지는 않아도, 자꾸 보면 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나 장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보고 ‘별것 아니군!’ 하는 마음이 들면 끝입니다.  그러나 끌리면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알 때 참여하게 됩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지만 의미와 보람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전공을 공부하면서 혹은 직장 생활하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스티븐 코비 박사가 쓴「원칙중심의 리더십」이라는 책에서 이런 예를 듭니다.
“주 5일간 땅을 팠다가 다시 메우는 일을 하는 대가로 백만 불 연봉을 준다면 당신은 그 직업을 받아들이겠는가?”

돈이 궁한 사람은 받아들이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의미의 반복은 자신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의미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도 그렇습니다. 먼저, 신앙생활이 즐거워야 합니다.  즐거움이 없는 신앙생활은 힘이 듭니다. 늘 수동적으로 끌려 다녀야 합니다. 어떤 분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어떤 사람은 두려움에 의해, ‘오늘 교회가지 않으면 혹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정말 무슨 일을 당하게 되면 내가 교회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괴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습관에 의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이거 괴로운 일 일수 있습니다. 능동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습관에 의해서 오게 되므로 남의 눈치만을 보게 됩니다.

밥을 먹어도 즐겁게 먹어야 합니다. “입이 써서 밥맛이 없다”라고 하소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병들기 이전에 마음이 병들었기에 기쁨이 없습니다. 즐거움이 없기에 밥 먹는 것도 귀찮습니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줘도 구미가 당기지 않습니다. 수저를 달그락거리다가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생기가 돌면 입이 열립니다. 숟가락이 밥공기를 푸기 시작합니다. 얼굴에 회색이 돕니다. 신앙생활의 즐거움을 얻어야 합니다. 왜 내가 신앙 생활하는지,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호감이 가야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알고 싶고, 만나고 싶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가고 싶은 곳이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호감이 없으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특별히 교회는 일단은 가고 싶은 곳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어떤 규모나 외형적인 것에 의해 되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크고 화려한 교회를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진솔하고 순수함 그 자체에 끌릴 수도 있습니다. 어떠해야 하는지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본질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지키면서 교회의 맛을 내는 곳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음식점을 찾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외형적인 시설과 분위기입니까? 아니면 주인이, 종업원들이 친절하기 때문입니까? 이러한 것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맛입니다. 그 집만의 맛, 그 맛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부흥회강사를 초청해 놓고 저를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해서 갔는데, 조금 허름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흥회 강사를 초청해 놓고 이런 곳에서 식사 대접을 하나!’ 하고 속으로 판단했는데, 막상 음식들이 나오는데 보니 맛이 기가 막힙니다. 그리 큰 식당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꽉 차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교회의 맛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의미가 분명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의미, 교회의 목적… 이 모든 것이 명확해야 합니다. 참 중요한 것입니다. 이 의미의 발견에서 즐거움과 호감도 함께 살게 됩니다. 의미를 찾지 못하면 즐거움과 호감은 일시적으로 그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음식점을 사람들이 매일 가지 않습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돈이 없어서 그럴까요? 멀어서 그렇습니까? 맛이 있고 즐거움이 있지만 큰 의미는 없습니다. 내 인생을 걸만큼, 내 삶을 던질 만큼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매일 가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 내 인생을 걸만큼의 의미가 있다면 왜 안가겠습니까? 갑니다. 단지 즐거움과 호감으로 그치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지나갈 때 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만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깊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교회의 의미, 교회의 목적을 분명히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분명하면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이 즐거워집니다. 그리고 더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확신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한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더 의미 있게 복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람에게 좋은 교회로서 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좋은 교회’

1. 교회는 모두에게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에게만 치우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자칫 잘못하면 율법적인 교회가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의 관심, 사람들의 필요, 사람들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사람은 도외시 되어버립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범하는 실수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좋은 교회가 된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는 담을 쌓고 세상에는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끼리만 좋은 교회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안티크리스천들이 하는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자기들끼리만 좋고 우리와 무슨 상관있느냐?’

한편으로 사람에게만 좋은 교회가 되어도 문제가 많습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세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사람 중심이 되다보면 인본주의적인 교회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교제 중심적이거나 영적인 것은 도외시하고 인간적인 것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통해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먼저,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모여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저들은 모이기를 좋아했습니다. 모이면 예배드렸습니다.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교회의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며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있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가 있기에 또한 역사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훈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도들은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 훈련을 받았듯이 자신들이 가르침 받은 그 진리의 복음을 저들에게 가르치며 훈련시킨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온전한 교제가 있었습니다. 교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네 번째는, 봉사하며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진 사람은 자기의 것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나바가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두었습니다.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러한 섬김과 봉사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다섯 번째는, 복음증거가 있었고 이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믿든 사람들이 더해 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비록 스데반의 순교 이후, 핍박으로 인해 사라미아로, 이방으로 흩어지는 계기가 되었지만 열방을 향한 선교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으로 갈 때 저들 안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비록 핍박이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저들은 모이기를 즐거워했고, 예배했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저들은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저 교회의 모습을 자신들이 볼 때 너무나 좋습니다. 사랑이 충만하고 기쁨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합니다. 초대 교회 구성원들  뿐만 아닙니다. 외부에서 볼 때에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유대교와는 다릅니다.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전통과 장로의 유전, 율법의 올가미 속에 자신들을 옭아매어 놓은 유대교와 달리 생명이 느껴집니다. 사랑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보입니다.
이러니 저들에게도 좋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에게 칭송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끼리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도 좋을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보기에 좋은 교회입니다. 칭찬하고 칭찬 듣는 교회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끼리 좋은 교회라는 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칭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호감을 가질 만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가 그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자신들만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고,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지만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더 좋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안티크리스천들이 생겨나고, 전도를 해도 전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사람에게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는 이웃을 향해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어야 합니다. 사랑을 주어야 하고 희망과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함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성전 지어놓고 사람들 오라고 하셨습니까?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이르기까지 다니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시며 섬기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복음이 복음 되게 하기 위해서 이 주님의 사랑을 안고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제는 교회가 사회봉사도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믿음과 행동과 삶의 조화가 잘 이루어질 때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께 사람에게 좋은 교회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2.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합니다.

교회는 어느 개인의 교회가 아닙니다. 혼자 생각이 있고 방법이 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입니다. 

한 제자훈련 교제에 보면 이러한 글이 나옵니다.
“평신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평신도가 교회 안에 있다는 말은 성경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평신도가 교회를 위해 일한다는 말도 성경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평신도가 교회에서 일한다는 말 역시 성경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평신도들 자신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입니다.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것을 깨닫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초 위에 우리는 ‘하나님께 사람에게 좋은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내가 평신도라면 어떠한 교회에서 섬길 것인가?’
목사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의미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교회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대형 교회는 아닙니다. 대형 교회는 이 교회의 목적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작은 교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교회의 목적을 잘 이해하고 하나님께 사람에게 좋은 교회로 서가기 위해 균형을 이루고 힘을 모으는 교회에서 섬기고 복음 전하며 살 것입니다. 건물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많지 않은 성도들이라도 괜찮습니다. 이 교회의 본질과 진실함이 있는 교회라면 저는 행복할 것 같습니다. 헌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통하여, 지금 이 시간 이 말씀에 감동하며 결단하는 여러분들을 통하여 이러한 교회를 함께 세워가길 원하고 계십니다. 신앙생활하는 동기, 호감, 의미가 넘쳐나는 교회, 그래서 늘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여 자원하여 헌신하는 성도들이 늘어나는 교회를 원하고 계십니다.
큰 교회를 세우면 목회자는 대접을 받습니다. 세상적인 논리가 똑같이 교회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건축과 성장에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목적을 가지셨다면 얼마나 많은 건축과 사람들을 모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오로지 제자들과 영혼구원에 관심을 두셨을 뿐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마음과 관심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목적을 분명히 하고 이 목적 안에 설 때 내가, 그리고 이 공동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대로 움직이면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 사람에게 좋은 교회’로 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우리가 이 교회를 통해서 이룰 복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여기에 함께 동참해서 새 해의 새 일을 이루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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