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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요 8: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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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요 8:31-38)


한 조류학자가 깊은 산속에서 앵무새 둥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조류학자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앵무새 새끼를 새장에 넣어 마당 한쪽의 나무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이제는 매일 아침 앵무새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며 눈을 뜰 수 있겠군”
조류학자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부터 어미 앵무새가 나타났습니다. 어미 새는 새끼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날라다 주었습니다. 학자는 어미 새의 모정에 감동했습니다. 이제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새장의 새끼 앵무새가 죽은 채로 발견됐습니다.
조류학자는 사인(死因)을 분석하고 오싹 소름이 끼쳤습니다. 어미 새는 새끼에게 계속 독과일을 먹인 것입니다. 어미 새는 새장에 갇혀서 처량하게 울고 있는 자신의 새끼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과일을 먹여 새끼를 죽인 것입니다.
새는 자연 속에 있어야 자유롭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립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먼저 생각할 것은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에 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붙잡힌 여자 하나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를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다 그들을 떠나갑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리고는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항변합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다른 사람이 예수 당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모를까 자기 스스로 말하니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다시 반론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다.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지 않느냐?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될 뿐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신다.”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그래 그들이 다시 묻습니다.  

“네가 누구냐?”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이 긴 문답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요 처음부터 말하여 온 자 즉 메시야임을 밝히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먼저 예수님이 메시야 즉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으신 우리의 왕이시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깨우쳐 은혜 아래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구주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믿는다는 것을 요 1:12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해서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구세주로 마음에 모시어 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고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요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은 내 말이 곧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이 진리요 그 말씀이야 말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말해온 자라고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다시 요한복음 첫머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계신 분이요 처음부터 말씀하신 분이시오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나의 구세주이신 그 분을 우리가 영접하는 것이요 그 이름대로 나의 구세주라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믿기 위해서는 내 이성으로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 사(思)에 숨겨진 지혜를 생각해 보면 생각을 의미하는 한자 ‘思’는 ‘밭田+마음心’의 합성어입니다. 밭을 의미하는 ‘田’은 본래 인간의 숨골, 즉 ‘이성’을 의미합니다. 감성 心의 기초위에 이성 田이 작동되는 것이 ‘思’입니다. 생각 ‘思’를 보면 마음이 밑에 있고 그 위에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도 마음을 기반으로 작동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감성은 대상에 대한 가장 정직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가슴으로 먼저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는 되지만 가슴으로 느껴지지 않으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감동이 다가옵니다. 감동해야 행동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은 머리보다 마음을 뒤흔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임종을 앞둔 스승이 제자인 노자를 불렀습니다.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스승은 자신의 입을 벌려 노자에게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내 입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아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 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그것이 세상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이제 더 이상 네게 줄 가르침이 없구나.” 

어느 누구의 입 안에나 다 들어 있는 세상사는 지혜, 우리가 놀리는 이 짧은 세치의 혀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강하고 부드러움, 어느 누가 말한 게 정답이고 누가 정상이고 무엇이 표준입니까? 누가 어떻게 무엇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판단은 우둔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판단력이 사라질 때 거기 무엇이 있을까요? 딱딱함 보다는 부드러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부드러움으로 모든 이를 안아보면 어떨까요? 

진리는 우리들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질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자신이 진리의 차원으로 우뚝 올라서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성이 아닌 영성이 필요합니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우리의 이성 우리의 생각만으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는 영성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지혜를 얻으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지혜입니까? 참 지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동시에 그분이야 말로 참 진리가 되십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죽어 있던 영성이 다시 살아나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 마음에 머무시게 됩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은 곧 예수님을 믿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항상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요 동시에 믿는다는 것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주님께서 깨우쳐주시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자꾸만 내 이성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르십시오. 이미 우리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믿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 안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주님의 말씀에 거할 때 주어지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를 고생시키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의 길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되기는 쉽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광야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군인다운 군인이 되기 위해서 먼저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주님도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힘든 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믿는 자요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저 하나님께서 능히 하시지 못할 일이 없으시다는 것과 따라서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께만 모든 해결책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잘 알거니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심은 우리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 아브라함의 복이야 말로 바로 우리들 자신이 누려야 할 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갈 3:8~9에서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야 말로 믿음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복인 줄 믿으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 이삭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셨을 때 속으로 웃었습니다.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멸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두 눈으로 보고 또 하나님의 약속대로 기한이 되어 이삭을 사라를 통해 얻고 난 다음에는 달라졌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삭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데려다가 그곳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줄로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은 것처럼 언제 어디서건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고 하는 이 믿음에서 조금도 변치 마십시오. 아울러 예수 그분이 우리의 능력이 되십니다. 따라서 믿는 자들에게는 네게 능력 주시는 자 주님 안에서 능치 못하심이 없는 줄로 또한 믿으십시오. 그 믿음을 순종함으로 보이십시오.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믿는다면 따라야 마땅합니다. 이 순종하는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유롭게 된다는 말은 우리가 무언가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여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죄와 죽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죄가 내게서 떠나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형벌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곧 하늘로 우리의 거처를 옮기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고백하기를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더 이상 슬픈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나라로의 입성이니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일인 줄 믿으십시오. 물론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다시 볼 수 없기에 슬플 수 있지만 동시에 그러나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의 나라에 영원히 살게 된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일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공포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순간이야 말로 그들이 영원한 불못 지옥으로 떨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지옥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니 너무도 끔찍합니다. 그러니 스데반의 고백과는 정반대로 비명이 질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쳐대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은 공포입니다.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합니다. 언제 죽음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할렐루야입니다. 너무도 기쁩니다. 평안합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평온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스데반처럼 영접하시는 주님을 뵈오니 그 얼굴이 어찌 기쁜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는 모든 환경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지만 아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그 믿음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비로 오늘도 우리들 가운데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순간 이미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이제는 그 사망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심은 그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제는 저주의 땅이 아니라 복된 땅으로 바꾸시고 저주의 삶이 아니라 복된 삶으로 바꾸어주신 줄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복의 근원을 삼아 주신 것처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한 바울의 고백을 우리도 고백하는 삶이 날마다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능력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십니다. 이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능력이 되어 주시는데 그러므로 우리가 염려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다면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입니다. 염려할 시간이 있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 시간에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시비하지 말고 염려하며 머리를 쥐어뜯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이루시고 고치시고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장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염려로부터의 자유함도 주시는 줄로 믿으십시오.

아울러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도 누리십시오.
나는 이래서 안 되고 나는 이래서 힘들고 나는 이런 것이 없고 이런 것이 모자라고 등등 항상 안 돼요 안 돼요 힘들어요 죽겠어요 못해요 없어요 하는 말들이 내 입에서 떠나지를 않는 그런 나를 이제는 벗어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궁극적으로 나를 먼저 바꾸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ㅋ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미 저와 여러분은 새 것이 되었습니다. 돌 감람나무였던 우리를 참 감람나무가 되시는 주님께 접붙임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참 감람나무 열매를 맺게 되었음을 믿으십시오. 내게 남아 있는 쓴 뿌리가 있다고 해도 그 까짓것 무시해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를 사로잡아가는 것을 보았던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주님이 능력으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는 순간 우리는 모든 은혜 위에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여전히 어둠 속으로 숨으려고 하십니까? 내 모습이 부끄럽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따라 나를 단장하십시오. 하나님의 주시는 모든 은혜로 나를 채우십시오. 

세상이 나를 왕따 시킨다고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님이 오시는 날 왕따 당할 사람들은 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나는 못난 자가 아니라 내 안에 진리 되신 주님을 모시고 있는 보물단지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겉모습이 후줄그래하면 어떻습니까? 내 안에 보물이 있지 않습니까? 내 안에 영생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멘 하고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도록 살아가게 될 것이요 또한   따르는 상급이 항상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기쁨과 평안과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삶을 나날이 살아가시며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모든 것을 이기고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민족은 아직도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습니다. 과거 35년간 일본으로부터 자유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잃은 민족일수록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줄 잘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자유 독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요즘은 거꾸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 일본 문화가 한국에 들어올 때는 금방 한국이 전부 일본풍으로 바뀔 줄 알았습니다. 일제 하면 고급 제품으로 인식하던 시절도 있었고 일제는 누구도 당할 수 없다는 생각들을 많이 할 때였기에 일본 만화라든가 일본 문화에 우리가 금방 다 무너져 내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히려 한류에 그들이 시달리고 있습니다. K-POP이라든가 한국 드리마와 같은 것에 김치에 불고기에 아주 한국 것에 미쳐 돌아가고 있습니다. 공산품들은 어떻습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한국은 일본을 따라올 수 없다 그것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가 다 그렇다고 하는데 중국이야 워낙 땅 덩어리가 크고 사람도 많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조그만 나라 한국이 일본을 따라 잡고 오히려 앞서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다 일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마치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이스라엘 민족들처럼 그들 앞에 우리는 메뚜기와 같을 뿐이라고 하는데 한국만이 일본을 밥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많은 부분에서 세계 탑을 달리던 일본이 한국에 꼬리를 잡혀 역전된 부분이 한 둘이 아닙니다. 축구만 하더라도 랭킹도 한국보다 높고 사실 실력도 나은데 실제로 한국과만 붙었다 하면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경우가 더 많으니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들의 방식대로 김치도 기무치라 해서 자기들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독도도 일본 땅이라고 그토록 아우성을 치는 이유가 바로 한국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정치적 자유보다 죄와 사탄으로부터의 자유요 모든 환경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모든 염려로부터의 자유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곧 예수님 안에서 진리로 말미암은 자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군대 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좌절 등의 감정에 대해서 이런 재미있는 글을 썼습니다. 
“잠들만하면 기상, 먹을 만하면 식사 끝, 외박할만하면 외박금지, 놀만하면 휴식 끝, 볼 만하면 동작 그만 그리고 정들만하면 전출, 휴가 갈만하면 비상, 편지 볼만하면 소등, 그리고 놀려고 하면 개인활동 금지, 편안할만하니까 전역.”

군대에 가면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모든 것을 책임져주는 아주 편한 곳 같은데도 사람들이 매우 불편한 곳으로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곳에서는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교제하며 그 분의 도우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날마다 살아갈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자족하며 평안하고 넉넉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족함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고백하는 바울 사도처럼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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