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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한 몸이다 (고전 1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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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한 몸이다 (고전 12:12-28)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폴 투르니에는 “혼자 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이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교회의 공동체성은 결혼에 비견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무교회주의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교회라는 한 공동체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실상 그들 또한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갖습니다. 그것 또한 교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산 속으로 광야로 들어간 수도사들 또한 함께 예배를 드리며 모임을 갖습니다. 

혼자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 신앙생활하고 혼자 예배드리겠다고 하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결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홀로 떨어진 고고한 영혼은 홀로 타는 석탄과 같다. 그 불길은 이제 식는 일만 남았다.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능력과 영광의 근원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를 향하여 닮아가고 자라가는 것이 신앙인들의 목표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는 이런 의미뿐만 아니라 성도 간의 하나 된 교제라는 차원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한 몸이 되어 기쁨도 사랑도 아픔도 함께 나눕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27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한 몸의 신비

교회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입니다. 13절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을 여기서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한 성령을 마시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시작할 때 똑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성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동일합니다. 말씀을 읽거나 기도하거나 예배드릴 때 우리에게 임하시는 성령은 흑인이나 백인이나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다 동일하게 임합니다. 성만찬을 통해서 먹는 빵과 포도주는 모두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세상은 민족과 언어를 좇아서, 이념과 목적을 좇아서, 자기 신분과 취향을 좇아서 따로따로 모이고 서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하나로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 한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민족적으로 서로 상극입니다. 종과 주인은 그 신분 때문에 한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모두를 형제자매라 부릅니다. 민족도 신분도 학식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매우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는 모습과 출신은 달라도 모두가 하나의 공통점 곧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남 교회, 부자 교회, 민중 교회, 개혁 교회 등은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수직적인 차원, 곧 기도와 예배뿐만 아니라 수평적 차원 곧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너희 안에’는 우리 마음속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바로 너희 가운데(amon you)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작은 소자의 모습으로 계시고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곁에 있는 형제와 자매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가 있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다른 성도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기쁨과 감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관심과 정죄로 다른 지체를 만나고 있다면 그는 신앙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한 축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 가운데서만 계신 것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 가운데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몸의 공동체

우리는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 자기 혼자 누리고 자기 혼자 책임지려 합니다. 자기 생각이 빠르고 자기 감정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나입니다. 우리는 이제 함께 사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에게서 먼저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죄는 그리스도께서 대신 가져가셨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이 내 것이 되었고, 내 것은 다른 분이 가져가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라는 존재를 잊는 자기부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임한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설명하지만 또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줍니다. 바로 성도 간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유기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한 몸의 지체인 손과 귀와 눈을 들어서 예를 보여줍니다. 손은 무엇을 집고 던지고 쓰고 하는 일을 하지만 보거나 들을 수는 없습니다. 눈은 볼 수 있지만 어떤 사물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각자는 각각의 역할을 함으로써 몸이 온전히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귀로 들리는 방향으로 우리 눈과 몸이 향합니다, 눈으로 본 것을 손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갑니다. 그것을 입이 씹고, 소화기관이 소화를 시켜서 우리 몸에 영양분 있는 피가 돌게 만듭니다. 그래서 온 몸이 삽니다.

우리는 함께 엮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 혼자 잘 산다고 하여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살아야 진정 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주기도문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분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입니다. 주님은 ‘나의’ 일용할 양식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배부르지만 형제가 배를 곯고 있다면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 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기도하라 명하셨습니다. 내 죄를 다른 사람이 짊어지고 갑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아파하거나 중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 몸 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사도 요한이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도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22) 하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고 행복하신 이유는 하나 됨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하나됨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하나 될 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가 된 세계입니다.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이 이런 공동체성입니다.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모두가 행복합니다. 현재의 복지 논쟁이나 경제민주화 논쟁은 바로 함께 사는 법을 이루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함께 사는 법은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자연계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이호우 시인의 ‘개화(開花)’는 온 우주가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자연이 행복하면 인간도 행복합니다. 더 이상 인간의 탐욕과 무지로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일들은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도 함께 가야 하는 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성은 어느 때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내가 다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일을 다 할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통일하시는 그런 계획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인류를 모든 죄에서 구원시켜야 될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 오셔서는 최후의 발악을 하는 악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셨기에 그 인생이 매우 무거웠을 거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사명이 주어진다고 생각하십시오. 요즘 안철수 씨가 그럴 거라 생각되는데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책임하다시피 할 정도로 공생애 또한 갈릴리와 그 주변 지역을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과 먹고 마시며 평안함과 기쁨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쉴 새 없이 만나도 쪼개기 아까운 3년의 공생애인데 사마리아 지역을 지날 때는 한가하게 한 여인과 오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기도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때에 그분의 일을 하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사람들을 믿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이 지금은 부족하지만 내 일을 나누어서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유하시길 바랍니다.

교회의 지도원리와 질서

교회가 유기체적인 몸이란 것은 교회는 곧 가족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가장 연약한 지체가 더 존중을 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습니다. 2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교회에 유일한 지도원리로서 주신 것은 작은 소자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교회의 지도원리요, 경영원리입니다. 가족이 그렇지 않습니까? 가족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무기력한 아기이지 않습니까? 그 아기 한 사람 때문에 직장도 심지어 자기 인생의 일부도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가족 중 누가 지체 장애를 겪거나 병이 있거나 문제가 있으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족이 아닙니까? 

여행 가는 것도 힘들고 우리 모든 기쁨을 반납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의 말은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산나에게는 열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사랑스런 자녀는 누구냐고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수산나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 자식 중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요? 아픈 자식이 나을 때까지는 그 자식을, 집나간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는 또 그 자식을 나는 사랑합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작은 소자, 길 잃어버린 양이 중심이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 교회처럼 대형화되고, 교회에 경영기법이 들어오고, 교회의 수를 묻고 자랑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며, 반그리스도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이는 모임도 아니요,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주인이 되고 맘몬과 권력이 하나님이 된 교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은사를 주시는 까닭은 교회가 한 몸으로서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모두가 손의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발의 역할을 할 수도 없고, 머리의 역할을 할 수도 없습니다. 직분과 은사는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질서입니다. 다양한 은사는 질서 있게 주어지고 질서 있게 활용되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목회자라는 직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회자라는 은사가 다른 무엇보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너무나 많은 목회자가 세워져 교회 난립과 목회자 자질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현재 목사의 수만 1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한 해 각종 신학교에서 4천에서 6천 명의 목회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추정됩니다. 신도수 5백여 만 명의 가톨릭의 경우 신부의 수가 4천 4백여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1천만 명을 헤아린다는 불교의 대표적 종단인 조계종의 경우 승려수는 1만 3천여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신학교로 몰려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세우심이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은사를 확인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신비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고, 어떤 강력한 책임감과 결단에 의해서도 가능합니다. 

둘째는 자신의 은사입니다. 목회가 은사라면 목회적인 인격이나 능력이 필요합니다. 가르침의 은사가 없거나 헌신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거나 독선적이거나 탐욕적이거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좀 고려를 해보아야 합니다. 교회 전통은 목회자의 은사 개발을 위해서 신학교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교육을 시키고 있으며, 신학교를 나온 사람을 목회자로 인정합니다. 성경에서는 아모스와 같은 평신도 예언자가 있고, 교회사에서는 칼빈이나 무디나 이현필 선생과 같이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탁월하게 목회자의 사역을 감당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강권적으로 쓰신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교회가 질서를 잡은 연후에는 신학교라는 교회 전통과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신학교도 아무 신학교 말고 교육부 인가를 받은 정식 신학교를 나오기를 바랍니다. 어렵다고 쉬운 데 들어가서 목사라는 타이틀만 따겠다는 자세부터 잘못 되었습니다.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면서 배우게 될 것이고, 어려워 통과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목회자의 임무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는 교회 성도들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청빙과 위임이라고 합니다. 현대교회에서는 전체 교인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그것은 교회의 허락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글에서 목회자의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그리스도임을 아는 모든 사람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제사장들이며 우리 모두는 말씀과 성례와 관련하여 동일한 권세를 갖고 있음을 온전히 확신하여야 한다. 물론 아무도 자기 교회의 지체들의 동의나 다수의 부름이 없이는 그것들을 집행할 권리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 서품의 성례는 그것이 어떤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을 교회의 사역으로 부르는 의식일 따름이다 ... 그는 자신의 교역(ministry)에 의해서만 평신도와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여러 은사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특권이 아닙니다. 은퇴하는 순간, 강단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는 다시 평신도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로 세웠으면 목회자에게 합당한 존경과 예우를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나 세워 설교나 목회자의 역할을 하라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모든 것은 질서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영광과 능력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곳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 된 교회에 다른 형제나 자매의 모습으로 임재 해 계십니다. 성도 간의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질 때 우리 신앙이 깊어지고 인생의 기쁨도 커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도 간의 온전한 교제를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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