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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일어서는 교회 (행 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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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어서는 교회 (행 1:12-14)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살아계심을 보이시고(행1:3) 하늘로 올라가신 후(행1:9-11) 남겨진 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3절에서는 예수님을 은 삽십에 팔아 넘겼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 배신자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이 거명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4절에서는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라 불린 이들은 분명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지켜보았던(마27:55) 여인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하던 약 백이십 명의 무리가 있었다고 오늘 본문을 바로 뒤따르는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 백이십 명의 무리, 이들이 다였습니다. 

한때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곳이면 온 마을, 온 도성이 떠들썩할 만큼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들으러 모이곤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까지 따라다녔습니다. 해지는 줄도 모르고 따라다니며 며칠씩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인 남자들만 오천 명 이상을 한꺼번에 먹이신 일을 생각하면 그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의 수가 실제로는 수만 명이었을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일하느라고 따라다니기 힘들었을 것이라 보면 여성들이 더 많이 따라다녔을 것이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다녔다면 그 전체 수가 수 만 명이 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입니다. 수 만 명의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이동하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장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무리는 다 어디 가고 백이십 명 정도만 남았다는 말입니까? 그 백이십 명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사십 일 간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당신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친히 보이시고 증명하시며 설득하셔서 그나마 다시 모여진 숫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그의 가까이에 남은 이들이란 제자 요한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몇 명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며칠 전만 해도 소리 높여 뜨겁게 예수님을 환영하던 예루살렘 군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다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찾던 정치적인 메시야로서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군중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거짓 소문을 내며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게 하라는 지시와 돈을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자들의 공작에 쉽게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최측근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 돈을 버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가룟인 유다가 먼저 주님을 배신하고 떠났습니다. 

절대충성을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사실 예수님 덕에 높은 자리에 오르고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를 꿈꾸다가 여의치 않자 다 주님을 부인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요한과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했던 몇 몇 여인들만 끝까지 남았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어긋나면 언제든지 무섭게 돌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흩어진 당신의 백성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시자마자 그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시작하셨습니다. 사십 일 만에 백이십여명이 모이게 된 것입니다. 비록 미미한 숫자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백이십여 명은 머지않아 일어날 성령의 역사와 함께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될 예루살렘 교회의 씨앗들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다시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의 수가 백이십여 명이 된 데도 이미 성령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그를 믿지 않았던(요7:5)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 백이십여 명의 무리 속에 들어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이던 사람들은 본문 14절에 따르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훗날의 폭발적인 교회성장의 비결이 오직 기도에 있다고 쉽게 결론을 내리는 일입니다. 물론 기도 없이 교회 성장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곧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고 성령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비롯한 백이십여 명의 무리의 기도는 주님의 분부를 따른 일입니다. 그 주님의 분부가 무엇이었습니까? 행1:4-5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또 행1:8에서 보듯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들을 비롯한 백이십여 신도가 한 일은 그 주님의 그 말씀을 기억하며 그의 분부에 순종한 것입니다. 

이에 당신의 약속대로 성령께서 오셔서 행하신 일이 복음전도의 능력 주심과 교회의 성장이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중요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함께하는 기도이어야 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저 기도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불순종에 대해 면제부가 주어질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이 임하자 사도들은 다 능력과 용기와 열심을 얻어 복음 전도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하루에도 수천 명의 새 신자들이 생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교회가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며 주의 제자들과 증인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교회가 온 세상에 세워지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잘못해서 교회를 약하게 만들고 교인들을 흩어지게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한편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주의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지구촌 사방에서 도전과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오랜 기독교 국가의 많은 교회들이 쇠약해져서 문을 닫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 다른 대륙에서 새 교회들이 계속해서 세워집니다. 

예상치 못한 데서 하나님의 백성이 왕성하게 일어납니다. 서구 교회가 침체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 눈부신 교회성장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를 통해 전 세계에 많은 복음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한국교회가 침체기에 들어섰다지만 그 선교의 열매로 중국과 아프리카와 남미 등에서 놀라운 교회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이슬람이 기독교를 밀어내고 있을 때 내부에서는 오히려 복음의 확산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이슬람 국가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한국의 개신교도 한때는 기독교의 이천 년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욕, 권력욕, 명예욕에 빠지고 싸우며 나뉘다가 세상으로부터 등 돌림을 당하는 가운데 한때 천이백만 명이라 호언하던 교세가 지금은 팔백만 명대라고 말하는 정도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수가 줄었다고 크게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려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수 만 명에서 백이십 명으로 줄었다가 다시 하루에도 신자가 수천 명씩 늘어나는 교회가 되었던 예루살렘 교회처럼 한국교회도 반드시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수만 명이라는 거품이 한 번 빠지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단지 병 고치기 위해서, 귀신 쫓아내기 위해서, 배고픔 해결하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교회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떠나가도 상관없습니다.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진실하며 충성되게 변화된 제자 열한 명과 백여 명의 신자들만 있어도 참된 교회로 튼튼히 설 수 있습니다. 비대해서 누워있는 교회는 필요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어나야 합니다. 작아졌어도 일어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잘 받들면서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쓰면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 부흥의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문안교회가 창립된 지 125주년을 맞았습니다. 125년 동안 이 교회와 함께하시며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신교의 교세가 전체적으로 사분의 일 정도 줄어드는 동안 완만하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전도하기를 힘쓴 데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교세가 줄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자화자찬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계속해서 달라지고 앞으로 더욱 나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더 힘쓸 일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 교회 전도부 기획팀이 지난 9월 15일에 있었던 2012년도 상반기 정책당회에 우리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한 보고자료를 제출했습니다. 교회창립 제125주년을 맞아 앞으로의 교회의 발전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기초자료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설문 중에 첫 번째가 새문안교회의 장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모든 연령대에서 단연 첫 손 꼽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어머니 교회로서의 오래된 역사와 전통”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새문안교회의 약점으로 지적된 것은 41.6%가 “교인들의 배타성”, 31.3%가 “오래된 교회로서의 경직성”을 지적했습니다. 그 두 가지 점만 합하여 거의 73%에 달하는 것입니다. 이와 무관할 수 없는 설문의 하나는 새 교우들이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으로서 모든 연령대에 걸쳐서 단연 가장 많이 지적된 것이 “신도들의 적극적 포용력 부족”(40.2%)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교회의 새 성전 설계안은 그 외관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의 눈에 이미 익숙해진 그 외형은 다른 어는 교회 성전건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곡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곡선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두 팔을 벌리시고 모든 사람을 맞으시기 위하여 벌리신 두 팔의 옷자락의 곡선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 교회>로서의 부드러움과 푸근함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의 새문안교회의 자화상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설문조사 결과 현재 우리 자신의 가장 잘못된 모습으로 지적된 “배타성”과 “경직성”과 “포용력 부족”의 대척점에 서있는 것들입니다. 즉 우리가 변해야 할 점이 무엇이며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새 성전 건물은 부드럽고 포용성이 풍부한데 그 안의 교인들은 그 반대라는 말이 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최대의 장점인 “오래된 역사와 전통”이 부드러움과 포용력을 함께 갖추도록 우리 모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설계안에서 새 성전을 정면에서 보면 왼쪽에는 일자로 곧게 높이 종탑이 서있습니다. 

거기에 이어서 부드러운 곡선면을 지닌 건물 본체가 서게 됩니다. 곧고 높은 종탑은 일자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땅의 첫 번째 교회라는 뜻입니다. 가장 오래된 역사와 전통의 교회이지만 경직되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으며 포용력 있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포용력 부족”은 달리 말하면 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래 된 교회들이 빠지기 쉬운 공통된 함정의 하나가 교만입니다. 우리는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결코 교만하지 않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온유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찾아와 편하게 머물며 쉼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당의 층을 3층 이상으로 높이면서까지 지상층을 높고 열린 광장으로 조성하여 교인이든 아니든 누구든지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고 편히 쉴 수 있는 주님의 품,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공간으로 제공하고자 한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드러내는 성전건물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설계가 더 까다로워지고 공사비가 더 들며 우리 교인들은 조금 더 불편해질 수 있음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설계를 고집한 것은 바로 미래를 향한 우리 교회의 지향성을 선언한 것입니다. 성전 건물 자체가 우리의 신앙고백을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새 성전 설계에 임하는 우리의 기본지침의 한 면을 실현한 것입니다. 

새문안교회는 그저 하나의 개교회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늘 이 땅의 “어머니교회”라는 의식이 잠재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우리를 보다 진지하고 겸허하게 만드는 책임감인 것입니다. 이 땅의 “어머니교회”로서의 새문안교회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너그러움과 푸근함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과 헌신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시 일어서며 바로 서서 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잃어버린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이 사회로부터 되찾는 일에 새문안교회는 앞장설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선한 꿈을 꾸며 원대한 비전을 품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며,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개인의 꿈이 아니고 교회가 갖는 꿈과 비전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한국교회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데 쓰임 받는 교회, 이것이 교회창립 125주년을 맞는 새문안교회의 모든 교우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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