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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성태(成胎)치 못하게 하시니 (삼상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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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성태(成胎)치 못하게 하시니 (삼상 1:1-8)

하나님께서 새로운 신정국가 건설을 위해 사무엘을 출생시키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출생할 당시의 시대상황은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불안한 정국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경제상황 또한 매우 핍절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사사시대 말기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각자가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사시대를 마감하고 한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신정국가 건설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준비 과정에서 엘가나의 아내 한나를 통하여 태어날 사무엘로 하여금 이 일을 전개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사무엘이 태어날 가정으로 레위지파에 속한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의 가정이 선택되었습니다. 당시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여자의 이름은 한나였고 또 한 여자의 이름은 브닌나였습니다. 한나는 자식이 없고 브닌나는 여러 자식이 있었습니다(삼상 1:4). 
여자가 자식이 없을 경우에 그것이 충분히 흠이 되는 것은 비단非但 이스라엘 사회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편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자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문제는 브닌나가 한나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했습니다. 이 말의 원문의 뜻은 괴롭히고 약을 올리고 슬프게 하고 충동질 하므로 한나가 자극을 받아 분노했다는 말입니다. 

한나는 울고 먹지도 아니했습니다. 남편 엘가나는 한나에게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느냐고 위로했습니다. 

사실 한나가 임신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태胎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남편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습니다. 

Ⅰ. 한나의 고통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임한 고통이었습니다. 

본문 1장 5-6절에 『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고 했습니다. 

『 그로 성태成胎치 못하게 하시니 』라는 말을 직역하면 그녀의 태胎를 하나님께서 붙들어 매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태를 닫고 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분명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나의 고통은 하나님이 제공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한나의 고통을 브닌나가 제공한 것 같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고통의 원인은 한나 자신의 무능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고통의 원인은 자기 자신도, 브닌나도 아닙니다. 한나 자신을 끔찍이 사랑하므로 오히려 자신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남편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한나의 태를 막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일어난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에게 고통을 주어서라도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태어날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내 한나는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본문 1장 11절에 『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여러 경우에 하나님께 서원하는 약속을 할 때가 많습니다. 

야곱이 에서의 낯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해 갈 때 돌베개를 하고 노숙을 했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닥다리 계시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조부 아브라함과 부친 이삭에게 한 언약을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때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베개 했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창세기 28장 20-22절에 『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로 나갈 때 서원했습니다. 사사기 11장 30-31절에 『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고 했습니다.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했습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공교롭게도 그의 무남독녀가 영접했습니다. 

시편 61편 5절에 『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71편 18절에 『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지키라고 했습니다(레 27:2; 전 5:2,4; 시 15:4; 76:11; 욘 2:9).


Ⅱ. 한나의 통곡하는 서원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본문 1장 10절에 『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라고 했습니다.
11절에도 『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라는 한나의 애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6절에도 『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한나가 이렇게 기도한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성태치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브닌나가 그를 격동하게 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적 현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한나의 기도를 계획하시고 주권적으로 섭리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 엘리는 그녀가 취한 줄로 생각하고 포도주를 끊으라고 했습니다. 이때 한나는 나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1:14-15). 하나는 자신에게 임한 환경을 수용하여 소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처지를 토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소화하지 못하는 음식물이 입으로 토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 원하지만 특별히 기도를 통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시대에 역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시대를 마감하고 새롭게 도래하는 사무엘시대로 말미암아 새로운 신정국가를 도모하고 계셨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한나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매를 맞을 때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에 도망가는 것은 하나님의 택자가 아닙니다. 세계 2차 대전 때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가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하나님께 아들을 꿈속에서라도 한번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녀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어떤 모습의 아들을 보여주랴? 사관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아들의 임관모습을 보여주랴? 화려한 결혼식장에 신부와 같이 걸어가는 아들을 보여주랴? 전쟁에 용감히 싸우는 아들을 보여주랴?"고 했을 때 그 어머니는 "아닙니다. 주님. 내 아들이 어린 시절, 아들에게 매를 댈 때 잘못했다고 울면서 엄마 치마폭에 매달리는 그 아들을 보여주십시오."라고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결혼한 엘림이의 화려했던 학창시절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명일동 지하실에 살 때 그렇게 하면 경찰서에 보낸다고 했을 때 엘림이가 울면서 "아빠~ 경찰서 보내지마~"하면서 울던 어린 엘림이가 보고 싶습니다. 

백화점에서 초록색 점퍼를 샀는데 난로에 부딪쳐서 그만 흠집이 났습니다. 그때 제가 화가 나서 엄마하고 같이 집으로 가!라고 했을 때 울면서 돌아갔습니다. 엘림이가 성내역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잠실 전철역 이 편에 제가 있고 건너편에는 울면서 서 있던 엘림이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캐나다에서 사촌이 왔는데 개척교회를 하던 제가 조카들에게 선물로 신발 한 켤레씩을 사주었습니다. 이때 엘림이가 강남 고속버스 전철역에서 울면서 "아빠∼ 나도 하나 사 줘∼"라고 했을 때 저는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빨리 못 타겠나! 안타면 그냥 두고 간다!!"고 하니 급히 탔습니다. 
저는 그 일이 있은 후로 엘림이가 신발 사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길 가다가도 어린 자매를 보면 몇 살인가를 물어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히브리서 12장 7-8절에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고 했습니다.

계시록 3장 19절에 『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고 했습니다.
징계에 대한 교훈은 신명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전全 성경에 풍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 제사장의 무능한 모습이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기도하는 자신에게 독주에 취한 줄 알고 있는 엘리 제사장을 폄하하거나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의 인간적인 약점이나 자녀들의 비윤리적인 삶에 대해서도 아랑곳하지 아니했습니다. 한나는 타락하고 무능한 엘리이지만 개의치 아니하고 끝가지 주主로 호칭했습니다.

본문 1장 9절에 보면 『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고 했습니다.

『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엘리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엘리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그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백성이 잘되도록 기도는 하지 아니하고 그저 앉아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4장 13절에도 역시 의자에 앉았더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4장 18절에도 보면 전쟁 때에도 역시 기도는 안하고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의자에 앉아있던 엘리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법궤를 빼앗겼다는 비보를 듣고 그 앉았던 의자에서 뒤로 자빠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성경이 엘리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고 말한 것은 이미 제사장으로서의 엘리의 무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엘리 제사장과는 달리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첫 머리에서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부르짖습니다. 한나는 지도자의 무능과 타락을 외면했다기보다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 바라볼 시간도 없는데 사람 상대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러한 한나의 영적 자질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한나의 소원이 성취되게 했습니다. 

본문 1장 27-28절에 『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고 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전적으로 자신의 기도에 의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기도를 하게 된 동인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무자한 한나에게 기도로 얻은 자식을 여호와의 전에 바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성전에는 타락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원했기 때문에 한나는 자신의 서원을 변치 않고 그 아들을 여호와께 바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해 주었습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사무엘을 드린 것은 일시적인 드림이 아니라 사무엘의 평생을 드렸습니다. 

사무엘을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바쳤다는 뜻입니다. 그 후 엘가나의 가족들은 여호와의 성소를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한나에게 소원이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적용의 결과 그 소원이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소원의 성취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선택된 한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픔과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고통과 아픔은 필요악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한나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따라 기도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를 필요로 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의존적 존재가 아닙니다. 한나가 하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에게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한나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의지였습니다. 사무엘을 잉태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한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사무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언약성취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자신의 사랑표현을 주권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나로 말미암아 기도하게 하고 한나를 통하여 사무엘이 출생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태치 못하게 하신 것도,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한 것도, 한나의 고통스러운 기도도, 사무엘의 출생도, 어렵게 얻은 사무엘을 인적 환경과 종교적 환경과 도덕적 환경과 윤리적 환경이 좋지 아니한 하나님의 성전에 보내는 것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무엘상 2장 1절에 『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을 성전에 드린 후에 한나의 기도는 후일 마리아의 찬가의 예표가 되었습니다(눅 1:46-55). 사가랴 예언의 배경이 되었습니다(눅 1:67-79).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출 15:1-31)와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삿 5:1-31)가 있습니다. 

한나에게서 사무엘이 탄생한 것은 일차적으로 무자한 자의 고통에서 자유롭게 된 구원이며 역사적으로 엘리시대가 끝나고 사무엘을 통한 이스라엘의 타락한 종교적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이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류의 구원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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