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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로운 분노 (행 17: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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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분노 (행 17:16-31)

종교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종교 간의 갈등이 세계평화를 위협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종교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종교를 염려해 주어야 되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종교가 사람을 화합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발생하는 분노는 달랠 길이 없습니다. 절대적이기 때문에 타협할 길이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무슬림의 분노를 말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없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분노로 말미암은 파괴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남의 종교시설에 들어가서 불상을 훼손시킨다든가 벽에 낙서를 한다든가 스프레이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려 놓는다든가 땅밟기운동을 해서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감정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저도 그런 것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런 모든 분노의 행위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상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마음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 분노가 분노로 끝나버린다면 그것은 죄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지 못하고 오로지 미움과 정죄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고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고 나의 감정만 표출시키는 꼴이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것으로 족했을지 모릅니다마는 신약시대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 대하여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아가 물맷돌을 던져 죽였습니다. 아주 심플합니다. 또 비느하스가 가나안 여자들과 행음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도 진노를 느끼실 때가 있었지만 진노를 생명을 구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식사하시는데 그 앞자리에 고창병을 앓는 환자가 앉아있었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실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에 예수님이 진노를 느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예수님이 그들을 때렸다든가 상을 뒤집어엎은 것이 아니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의로운 분노가 폭력이나 다툼을 낳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면 하나님 나라에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누가 이득을 얻습니까.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죽였을 때 예수님이 이 소식을 들으시고 빈들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애통하기 위하여.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촌뻘이고 의로운 선지자인데 악한 자에게 희생을 당했으니 예수님 마음이 얼마나 분하고 괴롭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빈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화를 내지 않고 그들 중의 병자를 고쳐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노라는 에너지를 사람을 구원하는 힘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분노라는 것은 신앙적으로 유익할 수 있습니다. 분노를 느낀다는 말은 내 양심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불의함을 보고도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것입니다. 그건 우리 양심이 죽었다는 것이고 무관심하다는 것이고 무력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분노를 느끼기 때문에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교회에서 어린이 부흥회를 하는데 부흥회를 앞두고 선생님들이 초청지를 들고 동네 초등학교에 갔는데 저의 아이가 하굣길에 반 친구들과 교문을 나서다가 초청지를 나눠주는 선생님들과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같이 나오던 반의 친구가 초청지를 받자마자 땅바닥에 던져버리더랍니다. 그래서 저의 아이가 화가 나서 그걸 왜 버리느냐고 항의했더니 저의 아이를 때리더랍니다. 둘 다 화를 낸 건 맞는데 이런 상황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화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것입니다. 

의로운 분노는 내가 믿는 것과 내가 확신하는 것을 더 굳게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분노는 세상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 세상은 바른말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의로운 분노는 내가 더 이상 소극적으로 신앙생활해서는 안되겠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의로운 분노는 올바른 에너지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설교자 스펄전이 말하기를 ‘나는 화가 나면 설교를 더 잘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됩니다. 

화가 나면 에너지가 분출한다는 얘기입니다.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분노 자체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이 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분을 내되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분노가 죄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불의한 일을 보고도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오늘은 분노 그 자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게 아니고 신앙적인 분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아덴에서 구경을 하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 아덴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매일같이 우상을 보지만 무관심했어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어요. 아무 생각 안했어요. 바울만이 온 성에 가득한 우상을 보고 마음에 분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얘기에요. 그 도성의 영적인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는 얘기에요. 사람들의 영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분을 내느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이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 설명한들 사람들이 알아듣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분노를 느낄 때 그 사실 자체로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럴까. 내가 오버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면 안되는 게 아닐까. 성령 충만하다면 마음이 편해야지 내가 왜 마음에 분노를 느낄까. 그게 아닙니다. 적어도 바울의 경우에는 그가 마음에 분을 느낀다는 말은 하나님의 메시지에요. 하나님이 느끼시는 분노를 바울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에요. 

이 세상에 살면서 만일 우리의 마음이 늘 편안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롯이 소돔에 살면서 그들의 불법한 행위로 말미암아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이 느끼게 하시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게 뭔지 몰라요. 그래서 무시하거나 억눌러 버립니다. 그러다보니까 영적인 분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그냥 싫을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 변태 같다, 저 사람 사기꾼 같다, 저 사람 진실하지 못하다, 그러고는 죄의식을 느낍니다. 내가 왜 저 사람한테 이런 생각을 할까. 그게 내 편견일수도 있지만 내 영적인 분별일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참모습을 내가 느끼는 것입니다. 다만 그게 뭔지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불편하게 생각하고 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애가 어떤 어른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할 때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어른의 입장에서 민망하게 생각하고 어른에게 사과하라고 야단을 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부모가 무식한 것입니다. 부모가 내막을 모르는 것입니다. 누가 압니까. 부모가 보지 않는 동안 그 어른이 아이를 학대하는지, 그 어른이 그 아이를 성추행하는지 부모가 모르는 거예요. 아이가 더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어른은 그 감각을 상실했지만 아이는 그것을 느끼는 것인데 부모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억누르고 무시하고 위험을 자초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피해의식을 가지시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직감 · 영적인 감각 · 영적분별 · 성령의 마음을 분간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건 합리적인 사고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도덕적인 차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느끼는 분노가 편협함, 불관용을 나타내는 게 아니냐. 왜 남의 종교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느냐. 이건 배타적인 것이 아니냐. 이것이 종교 간의 갈등을 발생시키지 않겠느냐. 만일 바울이 이 분노를 느낀 결과로써 남의 종교를 금지했다거나 탄압을 했다면 그건 불관용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한 사람일뿐이고 그 성의 방문객일 뿐입니다. 그 대신 바울은 무엇을 했느냐면 그들과 변론을 했다고 했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기독교 신앙을 그들에게 강요한 게 아니고 믿음을 강요한 게 아니고 변론을 한 것입니다. 대화한 것입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에요.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기독교 신앙은 변론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지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대표적으로 그런 인물입니다. 

그 이후로 성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마틴 루터, 요한 칼빈, 파스칼, C. S 루이스, 그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불신의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하여 변론을 했습니다. 책을 썼고 사람들을 가르쳤고 생각의 시장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평이하게 전했습니다. 대화했습니다. 

우리가 이슬람권에 요청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함께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변론 자체를 금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의 자유, 비판의 자유를 금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는 믿을 자유뿐만이 아니고 믿지 않을 자유를 포함하고 있는데 왜 이 시대에 타문화권의 종교의 자유와 생각의 자유는 만끽하면서 자기 나라에서는 그러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북한에 부탁하는 것도 단 하나에요. 신앙에 대하여 변론할 기회를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강요하는 게 아니에요.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 Come, let us reason together’ 하나님도 변론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무슨 기적을 행한다면 모를까 변론을 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그건 모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변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적만으로 승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를 바꾸는 것은 생각의 힘이에요. 아이디어의 힘입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구텐베르크가 그것을 성경으로 인쇄했더니 그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퍼지면서 종교개혁을 가져온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소수의 목회자들은 정치의 힘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장로가 대통령이 되면 교회가 득을 볼 줄로 생각했는데 그래서 지지했습니다. 그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치와 종교를 섞을 수 없습니다. 섞을 필요 없습니다. 섞이면 안돼요. 초대 기독교가 예수 믿는 황제의 도움을 받아서 부흥한 것이 아닙니다. 생각의 힘 · 말씀의 힘 · 믿음의 힘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변론을 한 것은 실패의 사례가 아니에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바울이 아덴에서 변론한 것이 실패의 사례라면 뭣 하러 누가가 바울의 말 전문을 여기에 기록했겠습니까. 이건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는 귀한 메시지입니다. 세상에 기독교 진리를 변론하는 좋은 사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하나님의 나라는 반죽에 누룩을 넣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복음이라는 누룩이 온 세상을 부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세상과 대화해야 됩니다. 말을 섞어야 됩니다. 묻고 대답하고 또 대화해야 됩니다. 우리의 믿는 바를 전해야 됩니다. 반죽에 누룩을 던져야 됩니다. 믿음의 선조들도 그렇게 했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으로 과거에 불신자들의 세상이 복음화 된 것처럼 이 혼동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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