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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롬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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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롬 14:1-4)
 
오늘의 질문은 언제나 남을 비판하기에 빠른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다. 

우리 각자의 신앙상태는 다른 누구에게 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중요하다. 신앙의 고백도 다른 사람의 고백은 의미가 없고 자신의 신앙 상태를 주님은 요구하신다. 

주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b~15) 물으셨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하였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말씀하셨다. 

이와는 사뭇 다르게 요한복음 9장에서는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눈을 뜨게 되었고 이 사람에게 주님이 아닌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이 묻기를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고 하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17) 라는 고백을 듣는다. 

나중에 v35에 예수께서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물으셨고 그는 확인 후에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는 기록을 읽는다. 

요한복음18장에 제사장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잡고 총독에게 사형언도를 해달라고 갔을 때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3~34)고 물으신다. 

사실 이렇게 신앙에 있어서 각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1:1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남을 비판하기 바쁘고 자신의 신앙 상태는 남을 비판하듯 보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이 시대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모두 자신이 누리기를 바라고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주문하고 요구하는 이기적은 모습이다. 이런 이유에서 불신의 사람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세상의 여론 조차도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부정적임을 본다. 

믿음의 고백이 각자에게 중요한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삶 자체가 남의 것이 내 것이 될 수 없고 내 수고는 절대로 남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부정적인 모습은 들보와 티의 가르침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옳을지라도 은혜가 되지 못하고 감사가 되지 못함을 본다. 

여기서도 우리의 관계자체의 변화는 십자가 때문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전8:11)고 경계를 주고 있다. 

Ⅰ. 비판을 조심해야 한다.(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헬, diakrisis, 사법적 평가, 논쟁]하지 말라” 

존경스러운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만고의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하찮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당하셨다. 물론 이런 경우는 전혀 신앙적이지 못해서 그러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게 되는 것 때문에 함부로 주님을 비방했고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을까는 안타깝지만 너무나 뻔하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두려운 경고를 주셨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 누구로부터 비판을 되받느냐 하는 것이 더 두려운데 그것은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께 비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을 비판했다가 그 비판이 단순히 사람에게로부터 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다. 

야고보 역시 비슷한 경계를 주고 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비판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미뤄도 늦지 않다. 오히려 이 땅에서는 격려가 더 필요하고 역할을 한다. 

우리 교회를 보는 믿음의 안타까움은 교우들 각자가 자신의 신앙의 부족됨이나 연약함을 진실히 내어놓고 안타까워하고 탄식하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문제만을 들추면서 ‘교회가 안되고 이 모양이라’는 불평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판하려는 안타까움이 있을 때 모두가 자신의 역할과 연약함을 먼저 해결하려 든다면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의지나 능력으로 신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해서 라는 고백을 가지고 나와 마찬가지로 상대도 그리고 모두도 같은 입장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5) 

세상에 온전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설령 하나님께서 온전한 것을 주셨다고 해도 그 온전한 것을 불완전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사람이고 그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죄나 판단을 조심해서 주님께 정죄 받지 않는 … 


Ⅱ. 신앙의 상태는 다 다르다.(2~3)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바울은 바로 연이어 먹는 것과 먹지 않는 이유를 “주를 위하여”라고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v6에서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함으로서 진정으로 믿음을 삶에 실천하기 위해서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먹고 먹지 않는 이유가 진정으로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증언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주님을 위한 것이면 다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거기에 대한 기준을 제시 하지만 자신의 육신의 욕심이 아닌 신앙의 이유 때문에 먹고 절제한다면 보이는 것으로 무조건 서로를 비판하는 자세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자세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물론 뒤에 가서 확신이 없으면서도 신앙의 담력이 있는 것처럼 먹는 자들의 흉내를 내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주고 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23)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않는 것에 기준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 

그리고 먹고 안 먹는 육신의 문제가 신앙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님도 히브리서 기자는 가르친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13:9) 

각자를 판단하기에는 모두가 온전히 알지 못하고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감춰져 있기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 다른 형태를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보다는 역시 격려와 사랑의 충고가 중요함을 이해하고 행하는 … 


Ⅲ. 하인은 주인만이 간섭할 수 있다.(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사람의 판단이나 비판에 민감하기 보다는 주인에게만 충실하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여기에 표현되는 종[헬, oiketes, 집안의 하인, 종, 가사를 돌보는 머슴]으로 신약성경에 자주 쓰이는 ‘둘로스’와는 다른 표현이다. 어떤 집안에서 주인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종과 그 주인의 관계를 비유로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일꾼을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쪽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 즉 먹는 자와 먹지 못하는 자를 동시적으로 책망하고 있다. 큰 집에는 여러 역할을 맡은 종들이 있을 것인데 주인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서로는 헐뜯거나 멸시하는 것은 그들을 부리고 명령할 수 있는 주인의 권리를 넘어서는 것으로 주인이 보던 그렇지 않던 옳지 못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하인들의 행동은 오직 주인만이 간섭할 수 있을 것이고 결과도 역시 주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는 데서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책망하고 정죄하는 것이 마치 어느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for Ex. The Party)은 불러내서 야단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것은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고 세상 속에서도 책망 받을 행동이라는 것이다.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 속에 일한다고 할지라도 집주인 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역을 넘어서는 자세는 남의 일꾼을 불러내서 큰소리치고 협박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주의 해야 한다는 경고이다. 

이렇게 믿음이 강한 자거나 약한 자에게 무시하고 비판하는 행동은 그를 세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넘어서는 것이며 십자가의 희생이 역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바울은 서로를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의 고백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유용하지 못하다고 포기하고 주님께 맡긴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믿는 사람으로서 남들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먼전 자신에게 유익이 없고 잘해도 본전이 안된다. 그것은 각자가 신앙의 상태가 다르고 사람은 모든 일의 가려진 부분까지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각 사람을 믿음으로 살게 하고 세우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자칫 주님의 주권을 자신이 가진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데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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