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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고전 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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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고전 1:10-17)

대한민국에는 여러 가지 갈등이 존재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된다. 한국인이 된다’는 말은, ‘갈등하는 사회에서 사는 존재다’라는 뜻을 포함합니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었고, 아직도 그 아픔이 남아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입니다. 남과 북의 첨예한 대립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고, 그로 인한 갈등도 여전합니다.

그렇다면 남쪽에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 사이에는 갈등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야의 정치적인 대립은 중간지대 없는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공멸을 향해 가면서도 상대방이 파멸하는 것이 곧 내가 승리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구조에서도 소위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양극화는 더욱 극명하게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당신의 경제적 위치는 어디입니까?” 라는 질문에, 60~70% 이상의 사람들이 ‘중산층’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언론 매체를 통해 ‘1%의 부자와 99%의 서민’이라는 표현으로 빈부의 격차를 더욱 극단화시키고 있습니다. 전체 국민의 1%만이 가진 자이고, 없는 자는 99%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는 없는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교회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등 여러 교파가 있습니다. 그 중 장로교에 속한 교회 분파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외면상으로는 우리 교회가 속한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나누어집니다. 하지만 장로교단에 등록되어 있는 분파들을 다 합하면 100개를 훌쩍 넘어 무려 250개의 교단들이 있습니다. 이 많은 교단들은 여러 가지 사항들 앞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예를 들어, 내년에 부산 BEXCO에서 열릴 WCC(세계기독교협의회)의 참여문제로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대립은 소망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교회 안에 갈등과 분파가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담임 목사인 저는, 애통하며 회개하는 심정으로 이 시간 이곳에 서 있습니다.

분쟁은 이기심에서 시작합니다.

도대체 분쟁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이기적인 탐욕을 들 수 있습니다. 개인 이기주의, 가족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등 이기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기주의는 나쁜 것으로 인식합니다. 실제로 나쁜 모습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좋은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챙긴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을 끌어내어, “이 시대는 현명한 이기주의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격려할 줄 알고 돌볼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몸을 바르게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웃도 바르게 사랑할 줄 모른다는 역설적인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 문제일 뿐, 자기를 아끼는 것은 모든 사랑의 기초가 됩니다.

주변에서 자신이 속했던 곳이나 자신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자랑하는 이들을 보면 아주 멋지게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족을 자랑하고, 공부한 학교와 친구들을 자랑합니다. 조국 대한민국을 자랑하고, 섬기고 예배드리는 교회를 자랑합니다. 100% 완벽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랑이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그러합니까? 자랑이 건방지고 교만하게 변하게 될 때, 남이 지닌 고유한 것을 무시하면서 자기만을 주장할 때 그렇게 됩니다. 나만이 최고이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때, 자기 자랑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의 몫을 챙길 때 자랑은 갈등으로 번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 생긴 갈등들이 확대되면, 분파 혹은 분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등은 무조건 나쁜 것이고 근절해야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갈등을 통해서 성숙하게 됩니다. 갈등은 더 좋은 나, 더 올바른 나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게 만듭니다. 공동체 또한 갈등을 통해 본연의 바른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갈등을 통해 새로운 삶의 자리로 발전해 나갔으며 성숙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갈등을 처리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극복하는 방식이 나쁘기 때문에 갈등이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작은 것에 집착할 때 큰 것을 놓치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이 남의 존재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될 때 분쟁이 생깁니다. 또한 거짓을 동원하면서 미움과 증오라는 감정을 투입하게 될 때, 갈등은 걷잡을 수 없는 분쟁으로 바뀌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것만을 주장하는 목소리라 분파를 만듭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분열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시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했고, 힘써 세웠던 주님의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고린도전서 1:11~12)

바울의 귀에 들린 소식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를 각각 중심으로 하는 4개의 분파로 나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파는 아마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바울에게 속한 자이며, 바울이 나의 스승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아볼로는 수사학에 능통한 달변가였으며, 그에게는 영적인 열정도 있었습니다. 아마 그의 현란한 가르침에 빠져들어 신앙에 입문한 사람들이 아볼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하나의 분파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게바파는 베드로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이자 초대교회의 수장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2차적이지 않느냐? 하지만 우리는 Original(오리지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들은 베드로에게 우리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다”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너희들은 사도를 중심으로 세움을 받았느냐? 그렇다면 오리지널 중에 오리저널은 우리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직접 영적인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다”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모든 분파의 뒤에는 영적인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와 그리스도가 나뉘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도 아볼로라는 영적 지도자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분파가 생기기 시작하면 각자가 가진 삶의 축복들을 함께 나누기 보다는, 내가 있는 곳이 최고이고 너는 별것 아니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분파의 특성이고 이 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분파가 만들어지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게 됩니다. 그들은 분파를 통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때로는 재물의 욕심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명예나 권력을 탐하는 욕심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기적인 욕심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분파를 통해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몸에 하나 된 존재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교회가 나누어지는 것을 보면서 애통한 마음에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경고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린도전서 1:13)

그는 세 번의 질문을 연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왜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해서 못 박혔느냐?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질문은 세 가지이나 그 핵심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을 존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이름을 통해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몸에 하나 됨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로 ‘그리스도가 나뉘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 됨을 파괴하는 사람들에게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영적 지도자인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고, 모든 사람들은 그의 몸에 속한 존재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높임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예수님이시지, 나 바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청지기이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붙잡힌 받은 종에 불과하다. 나는 복음의 일꾼에 불과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상기시킵니다. 내가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이것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높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세 가지 질문을 통해 모든 분파와 분쟁들이 우리를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이야기는, 갈등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우리에게도 가르침을 줍니다. 먼저는, 내가 가진 것이 소중하면 남이 가진 것도 소중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작은 자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큰 자랑 앞에서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얻고자 하는 작은 이익은 그리스도를 높여 드리는 큰 이익 앞에서 멈춰져야 합니다. 내가 취하고자 하는 작은 명예는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 돌리는 큰 명예 앞에서 머리를 숙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 됨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다시 한 번 이렇게 가르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인은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6~7)

“내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심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아볼로가 그 위에 물을 주어서 그들이 자라나게 했다. 심는 자도, 물주는 자도 소중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생명을 자라나게 하는 분, 그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을 자랑해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라. 성령님의 역사를 자랑해라. 사도들을 자랑하지 말라. 나 바울을 자랑하지 말고, 아볼로를 자랑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뜻을 가지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화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같은 마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에 분파가 생기고, 분쟁이 있을 때 가슴 아파하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되겠지, 뭐’ 생각하며 모른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아파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같은 마음입니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판단을 확대하고 확장해서 ‘나’라는 좁은 자아에서 ‘가족’이라는 자아로, ‘가족’이라는 자아에서 ‘공동체’의 자아로, ‘공동체’라는 자아에서 ‘민족’의 자아로 확장하여 마지막에는 ‘하늘’까지 확장하는 것, 그것이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까지 확장하는 것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자아, 하나님의 사랑에까지 자아가 확장될 때, 하나님께서 은혜의 역사를, 하나 됨의 역사를 허락해 주십니다.

갈등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내 안에도 있고, 가족 안에도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면 어디든 갈등은 존재합니다. 갈등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만났을 때 바르게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갈등을 만날 때 그것을 아파할 줄 알고, 아픈 마음으로 내 작은 자아를 하나님의 자아 속에 귀속시키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 그것이 갈등을 직면하는 바른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사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고 사도 바울의 경고를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같은 마음으로 아파하고 기도하면서 내 작은 자아를 주님의 자아로 확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자리에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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