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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례] 친구로 살 것인가, 종으로 남을 것인가? (요 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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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로 살 것인가, 종으로 남을 것인가? (요 15:12-17)
   
오늘은 가을철 성례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친구를 살 것인가 종으로 남을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유대인으로 랍비이신 마빈 토케이어는 탈무드를 현대인들에게 알기 쉽게 풀이하여 ‘몸을 굽히면 진리를 줍는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보면 ‘개와 놀면 이가 옮는다’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을 요약해보면 “완전한 친구를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의 친구도 없다. 좋은 것은 오랜 친구와 오래된 술, 나는 거기에 늙은 아내와 늙은 개를 더하고 싶다. 

좋은 친구를 가지면 자신도 저절로 발전한다. 오랜 친구 한 사람은 새로운 친구 열 사람보다 귀중하게 알라. 친구가 없는 사람은 한쪽 팔이 없는 인간과 같다. 철새와 같은 친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계절이 바뀌면 날아가 버린다. 개와 놀면 이가 옮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친구, 오랜 친구입니다. 세상의 그 어떠한 친구들 보다 귀중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제정하신 식탁, 성찬상을 마련하고 주님의 죽으심을 회상하면서 참여하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에 대하여 당신이 겪어본 것처럼 자세히 말씀해주셨습니다. 당신이 성만찬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먼저 떡을 가지사 축복의 기도를 드리시고 그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식후에 또한 그와 잔을 가지시고 축복의 기도를 드리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성찬을 거행하면서 주님을 기념해야 합니다. 

성만찬은 두고두고 연구하고 또 연구할 아주 중요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사건입니다. 이 성만찬으로 인하여 구교와 개신교회가 나누어지고 개신교회에서도 루터교회와 개혁교회가 성만찬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날 수 있으며, 구원의 주님과 한 인간이 생명력을 가진 살아있는 관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것이 성만찬입니다. 

천주교회, 구교에서는 

1) 화체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화체설은 개신교회의 견해가 아니라, 천주교회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성만찬에 대한 다른 신학적인 주장이나 학설이 모두 이 화체설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화체설은 성만찬의 가장 근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바, 이 화체설은 성만찬을 집례 하는 사제가 축복과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성물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실제론입니다. 성만찬의 성물,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사실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그나티우스라는 감독은 성만찬의 자리에 놓인 성물이 사제가 성찬을 위한 기도를 드리면 수난 받으신 예수님의 육체로 실제적으로 변화된다고 하면서 이것을 시인하지 않는 이들은 성만찬에 참여시키지 아니하였습니다. 빵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되어 그것을 먹고 마시면 실제로 주님의 몸과 피를 마시는 것이 되었습니다. 구교의 견해대로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육신을 씹어 먹고, 피를 마신 사람이 되어, 이 몸이 나의 몸이지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들어와서 나의 몸이 예수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만찬에만 참여하면서 예수님의 몸을 받았으니 구원받는 것은 맡아놓은 것이 되었습니다. 

2) 공재설이 있습니다. 

공재설이란 성체공존론이라고도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주장하였고, 독일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화체설을 조금 수정한 것입니다. 그동안 주장해온 화체설은 성물이 실제적으로, 사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과 피로 변화된다고 하였는데, 루터는 문자적인 몸과 피라는 것을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화체설을 받아들이면서 문자적인 주장을 버렸습니다. 

구교가 주장한 화체설은 사제가 축복하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그 성물은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하였는데, 그런 문자적인 주장을 완화시켜보려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주장합니다. “성만찬 제단위의 성물은 단순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음식일뿐 아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눈에 보이는 그 성물 안에, 그리고 그 성물과 함께 한다”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공재설, 성체공존론이라고 합니다. 

빵과 포도주는 여전히 빵과 포도주이지만,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눈에 보이는 그 성물과 함께 공존 공재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화체설을 조금 완화시킨 것으로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실제의 몸과 피가 공재하고 공존한다면 말만 바꾼 화체설이 됩니다. 성찬에 참여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문자적인 해석을 피하고 완화시켜준 이론입니다. 

3) 기념설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쯔빙글리가 주장한 것으로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만 강조한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성만찬이란 단순히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으로 격하시키면서 개혁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성만찬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요소를 다 제거해버리고, 사제만 참석하던 성만찬을 일반 신도들에게도 나누도록 하였습니다. 

성만찬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 이상의 어떤 신비한 뜻을 부여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은 죄의 대속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구속 신앙을 견고하게 하고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며, 순종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주장을 받음으로 성물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고 하는 신비한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쯔빙글리의 영향으로 성만찬을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기념적인 행사로 간주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말씀의 예전, 설교 중심의 예배와 이어서 성만찬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쯔빙글리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 매주일 드리던 성만찬이 1년 2회 정도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개혁교회를 이루신 존 칼빈은 

4) 영적 임재설을 주장합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목회한 존 칼빈은 성만찬이 단순한 기념에 머무는 것을 반대하면서 화체설의 문제점을 완전히 보완하는 견해를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존 칼빈은 성만찬의 성례전 현장에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는데 그 사실을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물만 본다고 하면 하나님의 신비하신 약속과 은총이 충분히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만찬을 거행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하고 해석해주고 오늘의 말씀으로 적용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기도할 때에, 예수님은 성만찬의 시간에 우리 중에 영적으로 임재하십니다. 우리 주님을 성만찬의 자리에 임재하십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임하십니다. 

성만찬을 어떻게 이해하시고 있습니까? 이상의 네 가지 학설을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않으며, 어느 학설을 이단시 하지 않으면서 어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만을 통하여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 성경, 전파되는 말씀- 설교, 그리고 보이는 말씀-성만찬이 함께 가야 합니다. 

성례전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sacramentum 이라고 하고, 영어로 sacraments 라고 번역합니다. 이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감독은 3세기의 터튤리안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약속한 후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그 예전, 예배를 성례전 sacramentum 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로마의 군인들이 군에 입대하면서 군인으로 황제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입대 예식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군대에 들어가면 “군인의 길”이라는 서약을 합니다. 그 첫째가 “우리는 국토를 지키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값있고, 영광되게 몸과 마음을 바친다”고 7가지를 선서합니다. 우리가 성례전에 참여하면 목숨 걸고 주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단하는 예전이 되어야겠습니다. 

성만찬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1) 감사의 예전으로서의 성만찬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대속하신 구속의 주님 앞에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시고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그 몸을 찢기시고 그 피를 쏟으시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나를 위한 구속의 사랑에 감격해야 합니다. 감사의 예전으로서의 성만찬이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와 연합으로서의 성만찬이어야 합니다. 

세례와 성찬의 예전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온 새로운 계약이 성립되고 반복되는 예전입니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을 치고 계약을 확인하는 예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는 자마다 주님과 하나가 되어 그 분 안에서 살아가는 분가분리의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3) 회상으로서의 성만찬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념설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에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고 그 자리에 참여하는 결단을 가질 때 진정한 기념이 되고, 회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져야하는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회상이란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나를 위한 사건으로 끌어들여야 회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옛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오늘 바로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이십니다.

4) 그리스도의 희생제로서의 성만찬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몸을 희생하시므로 단번의 드리는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성만찬의 성물은 보이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죽으신 그 몸과 피를 재현하면서 주님이 죽으신 그 십자가의 희생을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5) 공동체 모체로서의 성만찬이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요”라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같은 믿음, 같은 고백으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피로 맺어진 형제들입니다. 세계 어디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성만찬을 행하면서 함께 하는 성도들은 모두가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저는 이 성찬을 집례할 때마다 깊은 생각에 빠집니다. 이 성찬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입니까? 정말 신비하고도 신비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떼는 빵이나 나누는 포도주는 단순한 빵이 아니며, 어디서 구입하여 마실 수 있는 그런 포도주가 아닙니다. 기도를 드린 후에도 빵이나 포도주를 나눌 때에 화학적인 성분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몸이요, 피라는 생각을 가지니 단순한 빵이 아니요, 포도주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역시 단순한 빵을 떼어주시면서도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물은 우리 주님의 몸입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고,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임재하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고 보셨습니다. 고전11:27-29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만찬이 단순히 기념하는 차원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하면 주의 몸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떼는 빵이나 마시는 포도주는 어느 곳에서 있는 빵이나 포도주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으로 임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큰 은혜로 축복하시는 순간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0:16-17절에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으로 내어놓은 성물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성물은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여”라는 말은 코이노니아, 교제(Communion)을 말합니다. 성만찬의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은 내 안에 계시면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겠다고, 주님과 동행하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요6:56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화체설보다도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고, 오늘 우리들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신앙입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님은 지친 영혼을 위한 하늘의 양식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생수이십니다. 목마름으로 갈급한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이 식탁은 바로 생명의 떡이시며 생수이신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잔치입니다. 지치고 상한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정욕의 노예로 살아갈 사람이었습니다. 타락하여 버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우리를 건져내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인이 지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시면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보고 “너희는 나의 종이라”고 하셨어도 저는 조금의 불만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종이라는 것도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황공하게도 친구라고 하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과분하고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대등한 관계에서 친구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와 같이 허물 많고, 부족하기만 한데,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택하시면서 노예적인 복종을 원하지 않으시고 친구로서 살아줄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의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과 친구의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은 너무나 차이가 있습니다. 종은 창의성이 없고,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전체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철저한 종의 의식도 있어야겠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면서 종이라고 해도 불평할 수 없는데, 주님은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친구로 살고 싶습니까? 예수님의 종으로 살고 싶습니까? 내가 먼저 주님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하면 말도 안되는 말이요, 종으로 살겠다고 하여도 부르신 분이 친구라고 하였으면 친구인 것입니다. 종보다는 친구가 훨씬 좋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13절의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반드시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신 말씀입니다. 가장 숭고한 사랑은 한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위하여 그의 목숨까지도 버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가장 귀한 생명은 사랑과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친구로 살면서 몇 가지 해야 할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로는 기도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세 번째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종의 의식에서 친구의 의식으로 우리의 생각과 믿음과 헌신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시고, 친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을 목숨을 내어놓고 사랑하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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