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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을 받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막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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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받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막 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밀라노에 있는 대 성당의 세 개의 문에 있는 아치형 길에 세 개의 글이 새겨져 있다합니다. 한쪽 문 위에는 장미꽃의 아름다운 화환이 놓여 있고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합니다. "기뻐하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또 다른 문 위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합니다. 그 십자가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합니다. "고통 받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러나 중앙 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을 지적해주는 말입니다.

더운 여름 어느 날 나비와 하루살이가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나비가 말했습니다. "하루살이야, 이제 자고 내일 같이 놀자." 그러자 하루살이가 말합니다. "내일 놀자고, 내일이 뭐야!" 이튿날, 나비는 하루살이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나비는 그날 하루살이 대신 한 개구리를 만났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도록 둘은 재미있게 잘 놀았습니다. 어느덧 찬 불어오기 시작하자 개구리가 말했습니다. "나비야, 이제 우리 들어가서 자고 내년에 만나자." 나비가 말합니다. "내년에 만나자고, 내년이 뭐야!"  우리 인생에게는 내일, 내년만이 아닌 영원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바로 이 영생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복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 후 아담에게 창조물을 다스릴 복을 주셨지만 이제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와 시간을 헌신한 자들에게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권한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마 19:28)  그리고 구원을 선물로 주심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위해 버린 소유의 백배를 보상해 주시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0절).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영생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영생’에 대해서 나이 들은 노인들이나 바라보는 망상의 나라나, 이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나 찾는 인생의 도피처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진지한 자세로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태도를 사랑스럽게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가고 맙니다. 이 사람이 부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그가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간 것은 그에게 영생의 소망은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중요한 오해가 있었다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는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때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그의 이 말속에서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호칭에 대해서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가운데는 선한 이가 없다.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선한 그 하나님이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과 같이 예수님을 존경할 만한 스승, 위대한 인류의 교사, 혹은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스승 이상의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무엇보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세상의 구세주이십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한 선생으로서의 예수는 자기 손익 계산서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는 언제라도 쉽게 떠날 수 있는 그런 예수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예수를 등지고 떠나가는 이유는 바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의 결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주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앞에 나온 이 사람이 진지하게 물은 ‘영생’에 관한 물음은 그가 매우 신실한 신앙적인 사람임을 보여주는 듯하나 이 질문을 잘 들여다보면 매우 그릇된 전제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구원에 대한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 해야 한다.' 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생 즉 구원에 대한 잘못된 오해인 것입니다. 사람의 어떤 최선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돕는 어떤 자선 행위도 그것으로 이웃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동정할 수는 있습니다. 

일시적인 도움을 베풀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이고, 사람은 다 그릇된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실 때 인간의 행함에 근거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영생이나 구원은 인간의 행함의 성취를 통해서 결과적으로 얻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 조건 없고 자격 없고 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사람은 영생을 얻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관심보다도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던 더 중요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물질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주후 79년 죄악의 도시 폼페이가 베수비우스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거대한 용암으로 인해 매몰되었습니다. 최근 매몰되었던 그 도시의 외곽 지대에서 건축 공사를 하려고 파들어 가던 인부들이 완전히 화석으로 변해버린 한 여인의 시체를 발굴해 냈다합니다. 그 여인은 필경 그 용암을 피해서 생명을 구하려 도망치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값진 보석들을 훔쳐서 한 아름 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 비같이 내리는 화산재에 덮여 그 도시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토록 많은 보화를 품안에 안은 채 죽고 만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눅 12:20)고 어리석은 부자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지옥 간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 16:24)하나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 16:25)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에게 예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생 얻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원 문제가 인생에서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빵과 황금이 아니라 죄 사함과 구원의 문제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언제나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과 같이 예수 앞에 왔으나 불행하게도 예수를 떠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아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 그 은혜를 알고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기 바랍니다. 실패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막 10:23-25)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막 10:28)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비록 그들의 소유물이 적은 것이긴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생을 얻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좋을 때 자신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들이 버린 소유물이 상대적으로 비록 적은 양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전 재산이었기에 부자의 전 재산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사람들 가운데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성 프랜시스입니다. 성 프랜시
스는 1182년 이태리 아시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상인이었던 아버지 피에톨 띠 벨라드와 경건한 신앙인 어머니 마돈나 피카 사이에 프랜시스가 태어납니다. 프랜시스가 태어날 때 난산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진통이 왔는데 아이가 나오질 못합니다. 그때 문밖에 지나가던 어느 성자가 나타납니다. “마구간에 짚을 깔고 거기서 아이를 낳으면 순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족들은 급한 마음에 마구간에 짚을 깔고 산모를 누이니 성자의 말처럼 아이를 순산하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은 이 아이가 예수처럼 태어났으니 범상치 않은 아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이 아이가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명이 요한입니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언뜻 세례요한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거부하고 ”프랜시스”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프랜시스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성장하면서 마구간에서 태어난 의미와는 다르게 방랑생활을 했습니다.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술 파티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러다가 1203년 11월 어느 날 프랜시스는 중병에 걸리게 됩니다. 날마다 뼈골이 상접해 갑니다. 어느 날 저녁때 산타 마리아 수도원에서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양떼 울음소리가 밖에서 들려옵니다. 그때 어머니가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프랜시스는 혼수상태에서 헤메다가 깨어나 온몸에 땀이 흠뻑 밴 채 초췌한 상태에서 깊은 상념에 빠지더니 회개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방탕자의 삶을 살았는가, 나는 그동안 값없이 살았구나. 벌써 내 나이 23세다“하고 후회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아들을 위로합니다. “아 내 아들아, 네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구나, 과연 몇 해만에 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는 거냐, 하나님께 무엇이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엄마는 참 기쁘구나, 하나님이 너를 큰 그릇으로 만드실 모양이구나, 이것이 연단이라는 것이란다, 독수리가 높은 창공을 날려면 호된 훈련이 필요하듯 이것도 네게 주시는 연단일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프랜시스의 병이 치유됩니다. 그리고 건강이 회복된 후 깊이 생각합니다. “나의 장래와 미래와 나에게 주어진 몫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할 일은 무엇이며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프랜시스는 그곳에서 마침내 마음에 다짐을 합니다. “나는 평생 가난한 자와 거지들을 위해서 살겠다.” 

프랜시스가 그런 결심을 하자 아버지의 반대가 거세었습니다. 아버지의 반대가 너무 격렬했습니다. 그래서 프랜시스가 기도를 합니다. “이 마음 변치 않게 하소서, 이 뜻을 굽히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주께서 이 뜻을 이루게 하소서” 하고 더 강하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프랜시스가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어려워할 때 그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었던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참 좋은 스승이었고 신앙지도자였습니다. 그 어머니가 이렇게 격려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거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똑바로 가거라, 엄마는 널 위해 기도할 것이다.” 그 격려에 힘입어 프랜시스는 마음으로 재삼 다시 다짐합니다. “진정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려면 그 사람들처럼 길거리에서 동냥을 받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거지가 되지 않으면 거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모르면 참다운 위로 자가 될 수 없다”하고 그는 그 각오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갑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 문 곁으로 가서 거지에게 사정해서 옷을 바꾸어 입습니다. 그리고 프랜시스는 거기 앉아서 거지의 삶을 체험합니다. 거지의 삶을 경험하고 다시 고향 아시스로 돌아옵니다. 돌아와 보니 당시 그 지역은 한창 나병이 퍼져서 고향 아시스에도 나병원이 세워졌는데 그 병원 앞을 지나는 순간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겼습니다. 그래서 코를 막고 빨리 병원 앞을 지나서 한참 지난 후에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프랜시스야, 이제 거지의 형편도 경험하여 알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버림받은 나병환자들의 마음도 알아야 되겠다, 그러니 너는 가서 나병환자의 발아래 엎드려 무릎을 꿇고 그 고름을 씻어주어라, 네가 그 일을 하지 못한다면 너는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러니 너는 싫다는 생각과 싸워 이겨보아라. 그러면 너는 한없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음성을 듣고 길을 가다 보니 누군가 길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보니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때 마음에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한쪽 마음에서는 “빨리 여기를 떠나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또 한편 마음에서는 “프랜시스야 네가 싫어하는 것이 도리어 한없는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빨리 그를 안아주어라, 너는 지금 제일 중요한 시험에 부딪쳐 있다. 너는 지금 불쌍한 사람을 두고 달아나려 하고 있다, 자, 너는 지금 이기는가 지는가 하는 네 인생의 중대한 분기점에 서 있다.“ 

그러자 고민하다 결국 결단을 내립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를 일으켜 세우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나병환자의 손을 들고 그 상처 난 손과 목에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일어나 가던 길을 갑니다. 그때 온몸에서 환희와 승리감이 올라옴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는 외쳤습니다. ”나는 해냈다, 나는 이제부터 나병환자의 친구가 되겠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의 믿음이 부족함을 느낀 그는 아시스에 있는 성 데미안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합니다. “내게 바른 믿음을 주십시오, 온전한 사랑을 베풀며 살게 해 주십시오, 진정으로 나병환자를 사랑하고 친구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한 후 눈을 들어 십자가를 올려다보았을 때 순간 찬란한 빛이 비추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합니다.

그때 프랜시스는 그 순간 참 엄청난 영적 체험을 하고 그는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고 거리의 전도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법원에 달려가 모든 재산과 재산상속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씁니다. 그리고 나오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에게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제는 다른 것은 다 쓸데없다, 이제부터는 오직 실행뿐이다.” 그리고 프랜시스는 본격적으로 전도자의 길을 떠납니다. 이 프랜시스가 거리에 나가 본격적으로 전도를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담아 들어주었습니다. 그가 아시스의 갑부 집안의 아들이었다는 점, 그리고 모든 기득권, 재산, 상속도 포기하고 전도자 되었다는 점, 젊었을 때 방탕 생활하던 그 젊은이가 변화를 받아 전도자 되었다는 점 때문에 더 호소력을 주었습니다. 모두들 신기해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마태복음 10장에 의거해서 사도적인 청빈생활을 시작합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맨발로 지팡이와 전대 하나만 소지하고 돌아다니며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렇게 다니며 전도를 하니까 이곳저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친구들이 감동을 받고 전도자로 합류해 왔습니다. 또 거지들도 감동을 받고 전도자로 합류해 왔습니다. 

또 한 번은 자기가 없는 사이에 수도원에 도적들이 들어왔습니다. 밥을 달라는 그들을 수도사들이 혼내서 쫓아버렸습니다. 프랜시스가 돌아와 그 보고를 받고는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인데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좇아 보낼 수 있느냐, 먹을 것을 가지고 산속을 찾아서 정중히 사과하고 주고 오라“고 음식을 싸서 보냅니다. 그랬더니 그 강도들이 며칠 후에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우리도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나섭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가든 프랜시스는 몸이 쇠약해져서 1226. 10. 3. 44세 나이로 임종을 하게 됩니다.
  
복은 버릴 때 받게 됩니다. 자신의 소유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에 그 소유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백 배로 복 내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는다고 하십니다.(막 10:29-30)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창 26:12)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눅 8:8)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업이나 구제를 위하여 물질로 봉사할 때 더욱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재물에의 포기는 하나님 사랑의 적극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30)고 말씀 합니다.
기독교의 위대성은 고난을 복으로 여기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자랑으로 여겼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이 채운다고 말하였습니다.

'핍박을 겸하여 받고'라는 말씀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로마의 황제들에 의하여 환난과 박해를 받을 것을 미리 예언하신 말씀이었지만 교회사를 볼 때 세상과 전도자는 항상 적대 관계이므로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전도자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사역 수행에 있어 핍박과 곤란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핍박은 불씨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시대 때 초대 교회의 처참한 박해를 생각해 보면 복음은 도리어 예루살렘을 떠나 인근 지방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박해를 통해 복음의 빛이 더욱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사역에 있어 핍박은 필요한 과정으로 전도자에게는 오히려 더한 사명감을 고취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보훈을 말씀하실 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하셨고 베드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이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에 있어 영생에 대한 문제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고 복음이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은 영생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영생은 영원토록 계속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안식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서 헤어졌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이처럼 영생은 중요하며 성도들이 누릴 내세의 복은 영생으로 복 중의 복입니다.
이 복은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심판의 권한까지 행사하게 됩니다. 

(마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보좌는 승리의 자리입니다. 박해하고 핍박한 무리들을 심판할 장소입니다.

성경은 영생을 분명히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하시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하시며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하시고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합니다.

성도는 이미 영생을 소유하였지만 내세에서는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시 23:5) 은헤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영생을 받은 자는 성찬에 참여 하는 자라고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6:47- 58)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좋은 일꾼 되되 하늘 잔치를 바라보며 성찬에 참여하며 영생을 받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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