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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명사신앙에서 동사신앙으로 (수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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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신앙에서 동사신앙으로 (수 1:1-4) 

  
오늘 우리는 체육대회를 한다. 운동은 신앙생활과, 영적전쟁과, 유사점이 많다. 운동경기와 신앙과, 영적전쟁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는 동작을 동사, 이름만 있고, 움직임이 없음을 명사라고 하면, 신앙생활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명사로 생각해서, 활동하지 않고, 이름이나 직책으로, 남으려는 경우가 있다. 이는 신앙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건강하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런데 건강하기 원하지만, 움직이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건강할 수 없다. 
그래서 체육활동을 통하여, 얼마나 내가 운동을 했는지 느껴야 한다.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움직이면, 온 몸이 아플 수 있다. 이는 내가 얼마나, 움직이지 않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런 분은 회개하고, 이제부터라도 몸을 많이 움직이기 바란다.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활동하는 생활을 하기 바란다. 예수님이 꿈꾼 교회는, 십자가 위에 든든히 세워져, 날마다 자라나는 교회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살아 움직여,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명사적 삶이 아니라, 동사적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을 바라보며 전진해 나아간다. 기독교는 조상의 무덤이나, 묘비를 기념하는, 죽음의 종교가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경험하는 생명이요, 활동하는 생명이다. 

헬라사상은 생각을 중시하는 정적이고, 윤회적인, 운명론적 사상이라면, 히브리사상은 직선적이다. 하나님의 복된 섭리를 믿고 나아가는, 활동을 중시하는, 동적신앙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근본정신은, 어디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며, 어딘가를 향해 나가는, 동적인 신앙을 보여주지, 명사 신앙이 아니다. 

본문은, 신앙이 무엇인지 말한다.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억압당할 때, 지팡이 하나 들고 그들을 탈출시킨 민족의 영웅이다. 그런데 이런 전설적인 지도자가, 죽고 말았다.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히 위기이다. 신앙은 위기를 당했을 때, 울면서 나는 할 수 없다며, 주저앉아 있는, 명사신앙이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동사신앙이 되어야 한다. 

시간은 흘러가기에, 사람들은 사라지고, 시대는 바뀐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기에,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된다. 모세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새롭게 열리면서, 변함없이 계속된다. 

1. 일어나는 신앙이 되라(2上).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죽었다고,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이다. 
기독교는 일어나는 신앙, 동사신앙이다. 성경에 일어나라는 말이 565번 반복된다. 특히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 일어났다. 못 걷는 사람도 일어났고, 절망의 자리에서도 일어났고, 죽은 지 나흘 된 상태에서도 일어났다. 

예수님은 이미 죽어 누워있던 아이에게도 (막5:41下)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소녀를 일으켜주었다. 예수님 자신도 안식 후 첫날, 첫 아침에, 무덤의 문을 열고 일어나셨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어떤 좌절과 낙담의 자리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베드로는 성전 입구에서, 인생을 자포자기하고, 구걸하던 사람에게, (행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했다. 불가항력적인 불행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우리 모두 일어나는 신앙을 갖기 바란다. 

운동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쓰러졌다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정신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난다.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우리민족의 상징 중 하나가, 민들레꽃이다. 한겨울 혹한과, 얼음 층에 짓밟히고 짓눌려도, 힘차게 일어나 꽃을 피운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훌륭한 정신력이기도 하다. 밟히면서도 피어나는 민들레같이 우리 모두, 운동경기를 통해, 새 마음으로 다시 일어나기 바란다. 

2. 도약하는 신앙이 되라(2中). 

“…이 요단을 건너…” 이스라엘 앞에는 넘실대는 요단강이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홍해를 건넌 것이 구원의 시작이라면, 요단강 도하는 새로운 행복을 향한 인생의 도약이다. 
신앙생활에는 장애물들이 있다. 이 장애물 앞에, 주춤거리지 말고, 반드시 건너가야,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이다. 역사를 보면, 항상 일정한 기간을 두고, 위기가 있었다. 이 이기를 어떻게 넘어가느냐에 따라, 한 민족이, 한 가정이, 교회가 달라진다. 

위대한 일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넘어야 할 난관이 있다. 우리의 삶에도, 반드시 건너지 않으면 안 되는, 지뢰와 같은 위험한 상황들이, 도처에 쫙 깔려 있다. 이러한 위기나 난관을 만날 때, 단지 하나님의 징계로 여기지 말고, 도약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일 수 있다. 
우리 인생에는, 자기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태산과 같은 위기와 난관이 있다. 그때 좌절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오히려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 앞에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자주 방해가 되는 요소는,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다. 특히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하고, 많은 설교를 들은 사람일수록, 선입견이 크고 많다. (3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물이 가장 범람하는 시기에, 강을 건너라고 지시한다. 영적 도약하라는 말이다. 
비행기가 하늘로 높이 치솟기 위해서는, 과감한 이륙과 도약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새로운 행복의 지평선을 넘기 위해, 과감한 도약이 필요하다. 물이 수증기가 되려면, 100°C가 되어야 한다. 0°C의 물이건, 99°C의 물이건, 똑같이 끓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 차이가 99°C나 되어도 말이다. 

그러나 99°C와 100°C의 차이는, 겨우 1°C에 불과하다. 우리는 99°C까지 올라가고도, 1°C를 더하지 못해, 중도에 포기한 일은 없는가?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규정하지 말고, 모든 장애물들과 역경을, 과감히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란다. 새로운 변화는, 1°C만 더 높이면 가능하다. 
현대인의 문제점 중에 하나는, 스스로 정해놓은 경계선을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는데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만, 골라서 할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한계에 도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기보다,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는, 도전과 도약이 필요하다. 

운동도 한계를 뛰어넘도록, 장애물 경기가 있다. 물이 수증기가 되기 위하여, 1°C만 높이면 되듯이 한계를 만났을 때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우리 모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놀라운 신화를 창출해낼 수 있기를 바란다. 

3. 전진하는 신앙이 되라(2下).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더 이상 멈추지 말고, 목표가 되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앞을 향해 계속 가라고 했다. 이처럼 기독교신앙의 본질은, 항상 동적이다. 
그래서 정글선교의 선구자 리빙스턴은 “앞으로 가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든지 간다.”라고 외쳤다. 스페인 잠언에도 이런 좋은 말이 있다. “앞을 보지 않는 사람은, 뒤에 남게 된다.” 한국 축구의 고질병도, 백패스를 하다가 당한다. 오늘 본문은, 2가지 사항을 강조하고 있다. 

(1) 목적지를 향해서 가라는 말이다. 더 이상 광야에 머물러서, 불필요한 고생을 하지 말고,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다. 방황하지 말고, 뚜렷한 목적을 품고 살라는 말씀이다. 

(2) 미래를 향해서 가라는 말이다. 
성경은 ‘가라’는 명령뿐이다. 앞을 향해 가라는 말씀뿐이다.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너희는 천하 만민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 땅 끝까지 가라고 했다. 

우리는 믿음의 퇴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앞만 보고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왜 전진하지 못하는가? 두려움과 근심이 차 있기에, 전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에, 전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ן󰚖󰗿)’은 분사다. 지금 막 주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순종하면, 받을 수 있고, 취할 수 있다. 순종하지 못하면 받을 수 없고, 취할 수 없는 땅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어떻게 되는가? (3下)에서는 ‘주었노니’라고 했다. 완료형으로, 확실히 준다는 말이다. 

(4-5)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수많은 적들과 싸우게 될 것이지만, 백전백승할 것이라는 말이다. 적이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강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약하면, 항상 적들이 얼마나 강한가에, 신경을 쓰고, 걱정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월등히 강하면, 어떤 적도 두렵지 않은 법이다. 

4. 함께하는 신앙이 되라(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여기서 매우 중요한, 동사가 2개다. (1) 밟으라. (2) 주었다. 그런데 그 앞에, 너희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너희 발바닥으로 밟으라.”고 했다. 내가 너희에게 주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으라는 말과, 너희에게 주었다는 말은, 함께하라는 말이다. 전쟁과 경기와 신앙생활에는 독불장군은 없다. 반드시 협력해야만 이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 

운동경기에서 절대적으로, 마음을 모아 함께 함이 필요하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기도도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할 때 힘이 된다. 모세는 기도할 때,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았다.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를 내고, 떼로 모이 날게 되면, 사람의 고막을 찢을 수도 있다. 개미도 많이 모이면 사자를 잡아먹는다. 모이는 힘이 이렇게 크다. 모이는 것이, 힘이요 능력이다. 

오직 믿음의 함께 발로 밟기만 하면, 그 좋은 가나안 땅을, 모두 주겠다는 말이다. 주었다는 말은 완료형이다. 이미 끝난 상태라는 말이다.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고 가라는 말이다. 아직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다는 보장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면 된다. 이 말씀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요단강이 가장 범람할 때, 그들이 순종하자, (3:16)에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져, 바로 건너갔다. 시대와 상황이 어려울수록, 믿음이 더 필요하고, 함께 하는 믿음은, 역사를 일으킨다. 

함께 하면, 서로에게 힘이 된다. 마지막 때에 마귀는, 하나님의 교회를 약화시키기 위해,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방해한다. (히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다. 
연합하는 교회와 단체가, 승리할 수 있다. 심판 받고 망하는 시대는, 절대 안 모인다. 이것이 성경의 진단이다. 함께 하지 못하면, 패할 수밖에 없다. 승리의 비결은, 함께 하는 동역이다. 따라서 힘을 서로 모으기 바란다. 동역은 신앙인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다. 

영적전투나, 경기에 있어서, 함께 힘을 합하는 하는, 효과적인 승리의 비결도 없다. 이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다. 우리는 함께 협력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과 마귀와 싸우고,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 믿음의 성도들은 끝까지, 힘을 합쳐야만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오늘 체육행사를 통해, 우리 신앙을 다시 살펴보자. 신앙생활과 운동경기는, 유사점이 아주 많다. 신앙도 운동경기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따라서 나의 신앙이 추상적이거나, 움직임이 없는 명사적 신앙에서, 동사적 신앙으로 변하기 바란다. 어떻게 변해야 할까? 

(1) 주저 앉아있지 말고, 일어서는 신앙이 되기 바란다. (2) 장애물 앞에 겁을 내지 말고, 도약하는 신앙이 되자. (3)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신앙이 되자. (4) 믿음으로 함께 하는 신앙이 되자. 이처럼 경기에서도, 넘어졌어도 일어서고, 겁을 내지 말고, 뛰어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자. 그때, 우리는 승리자가 된다. 그런 우리 다운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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